▲ 21일 국회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시민사회 원탁회의 결성식’에서 참석자들이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봉수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이 전면 차단돼 있는 이상한 나라가 한국이다. 지난 21일 국회에서 출범식을 가진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시민사회 원탁회의'는 60여 년간 '정치적 금치산자'로 묶여 있는 교사들의 족쇄를 풀어주려는 시민사회의 의지가 담긴 행사였다.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교사의 정치 참여를 금지한 이래 기나긴 민주화 과정에서도 풀지 못한 최후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매우 뜻 깊은 출범식이었던 셈이다.
언론은 왜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을 외면할까
24일까지 관련 기사를 모니터링한 결과, 기이한 것은 기사든 칼럼이든 주요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은 것을 넘어 '교실의 정치화'라는 구태의연한 틀로 기본권 회복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재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합뉴스매체로는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뉴스1>이 출범식 기사를 내보냈을 뿐이다. 그 밖에 전문매체인 <교육언론 창>과 <매일노동뉴스>가 보도했고, 관련성 있는 기사를 포함하더라도 <경향신문>이 지난 16일 김누리 중앙대 교수를 인터뷰해 22일 내보낸 게 전부이다. 보수·수구 성향인 '조중동'은 물론 '진보매체'라는 <한겨레>도 '국가기간통신사'라는 <연합뉴스>도 행사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이데일리>는 <불붙는 교사 정치기본권 논의…커지는 교실 '정치화' 우려>라는 제목을 달아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비중을 두고 보도했다. '교사들의 정치색이 은연 중 드러나거나 교실에서 편향된 발언이 나와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매체는 내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를 둔 이의 익명 인터뷰를 통해 "교사도 정치 관련 활동을 하겠다고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 얘기가 교실에 들어오지는 않을지 걱정된다"고 전했다. 또 양정호 성균관대 교수의 발언을 통해 "교사의 정치적 활동이 자유로워지면 특정 정치인을 후원하거나 공개적으로 정치적 의사표명을 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여지가 많다"며 "학부모 반발로 이어져 교육 현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디어가 우리의 관점을 조작하는 수법
한국 언론이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를 아예 외면하거나 왜곡 보도하는 태도는 '틀짓기 이론'(Framing Theory)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디어는 어떻게 우리 관점을 조작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유통되는 사진 중 하나는 AP통신이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찍은 것이다. 미 해병대원들이 사로잡은 이라크 군 병사에게 총을 겨눈 채 물을 먹이고 있는 사진인데, 왼쪽만 잘라내면 포로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살벌한 장면이 되지만 오른쪽만 잘라내면 물을 먹여주는 인도적인 장면이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 정도가 아니라 '가파른 절벽'처럼 보수 편향이 심한 우리나라 주요 언론의 가장 큰 병폐는 진보적인 의제들을 거의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선진국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재벌언론과 언론재벌, 그리고 종교단체들이 소유한 매체들이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윤석열 정권 탄생에서 몰락 직전까지 검찰발 기사가 홍수처럼 담론시장을 휩쓸 때는 '진보언론'이라 일컬어지는 <한겨레> <경향> 등도 대항언론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수언론이 설정한 의제를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 적도 많았다. <뉴스공장>이나 <매불쇼>의 구독자 수를 들어 보수 대 진보가 균형을 이뤘다는 시각도 있으나 두 매체는 절실하면서도 무거운 주제는 잘 다루지 않는다.
'하의상달의 물꼬' 가로막는 주류언론
위르겐 하버마스는 저서 <사실과 규범 사이>에서 버너드 피터스 모델을 활용해 노동조합과 시민사회 등 주변부의 의견이 권력핵심부에 잘 전달되는 의사 소통과 정책 결정 구조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로가 상의하달식으로 역행해 정당성 확보는커녕 독재로 흐르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 언론 상황을 보면 핵심부와 주변부를 연결하는 '물꼬'(sluice)가 아예 막혀 있거나 한쪽 방향으로만 물이 흐르도록 설계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한국사회 지배 카르텔이다. 수구세력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모두 허용하고 있는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을 '교실의 정치화'로 매도한다.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원탁회의 공동제안자는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안민석 미래교육자치포럼 대표, 김누리 중앙대 교수이고, 이에 호응한 시민사회 인사들이 144명이나 된다. 곽노현은 교육행정 현장에서, 안민석 전 의원은 의정활동을 통해 교사의 정치기본권 확대를 추진해왔다.
김누리 교수는 저서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등을 통해 독일모델을 전파해왔다. 원탁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김동춘 교수는 <시험능력주의> 등의 저서로 교사에게 정치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교사들을 '입시지옥'에서 구해내는 열쇠라고 역설해왔다. 이들은 대개 사범대학 출신이거나 교육과 인연을 맺으면서 교육개혁의 절실함을 느껴왔는데, 나 또한 사범대학 출신에 교육담당 기자로 일한 적도 있어서 원탁회의 언론인위원으로 참여했다.

▲ 김누리 교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해냄)와 김동춘 교수의 <시험능력주의>(창비)는 한국에 만연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와 경쟁 교육이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고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이봉수
박정희가 교사들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이래 교육현장의 간절한 목소리는 교육정책 형성에 반영되지 않아 입시지옥과 능력주의의 온갖 폐단이 누적돼 왔다. 50만 교원은 경선투표권, 정당가입권, 정당활동권, 선거운동권, 선거출마권, 정치후원금제공권이 모두 차단된 '정치 천민'이다.
언론은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도 근본원인을 규명하는 심층보도에는 소홀했다. 2023년 한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98%가 교권침해를 경험했고, 87%가 사직이나 이직을 고민했으며, 38%는 심각한 우울증 상태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사기가 떨어진 교사들에게 자녀를 맡기는 게 두렵다면 학부모 전체가 교육개혁에 나서야 당연하겠지만 자기 자녀가 동료들을 누르고 특목고와 세칭 명문대에 입학하게 해줄 것을 압박하는 게 고작이다.
우리는 교사 길러내는 학교를 일제 때 '사범대학'이라 명명했는데, 그 명칭에 '모범'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있으니 규격에 맞는 범생이를 길러내는 게 교사의 사명처럼 되어버렸다. 깊은 생각을 통해 비판의식을 기르기보다는 정답이 정해진 시험에 최적화한 범생이들이 나라를 어떻게 망쳤는지는 윤석열 정부가 입증했다. 학벌주의를 부추기는 정점에 대학이 있다. 미국이 학벌주의가 짓누르는 사회였다면, 하버드 중퇴생 빌 게이츠는 학점 따느라, 리드대학 중퇴생 스티브 잡스는 편입시험에 매달려 재능을 소진했을 것이다.

▲ 시민사회 원탁회의 결성식에는 전국교직원노조 박영환 위원장, 교사노조연맹 이보미 위원장과 김용서 전 위원장 등이 참석해 연대의 뜻을 밝혔으나 교사들은 정치활동 금지 규정에 묶여 참석하지 못했다.
이봉수
'정치기본권 보장하면 교육이 망한다'는 가짜뉴스
그러나 교사 정치기본권이 실제로 보장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을 돌파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교사 출신인 백승아 민주당 의원은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교원에게 정치기본권을 보장하면 교육이 망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서 "그렇다면 OECD 가입국들이 모두 망했느냐, 잘 살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을 공약했으나 당선되자 '보장'을 '확대'로 말을 바꿨다.
곽노현 전 교육감이 말한 대로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 취지는 교사가 근무시간에는 정치중립을 지키되 근무 외 시간에는 온전한 시민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게 하자는 것이다.
실은 교실에서도 민주시민을 길러내려면 정치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독일에서도 논란이 일었지만 각계각층이 보이텔스바흐라는 소도시에 모여 정치교육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교사의 신념을 강제하지 말고, 찬반 논점을 균형있게 제시하고, 학생들 미래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세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 가르치는 영국 학교
지금 학생들은 만 16세 이상이면 정당에 가입하고 18세 이상이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데, 교사들이 학생들을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마흔일곱에 유학을 간 데다 세 자녀가 여섯·다섯 살 터울이어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모든 영국 교육과정을 체험했다. 영국 각급학교에서는 민주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 노동자의 권리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게 한다.
우리나라 교육은 민주시민은커녕 선거권이 주어지더라도 좋은 정당과 정책 그리고 후보를 고르기 힘든 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정치인은 유권자들이 민주시민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게 되면 선출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이들이 아닐까?
문화연구의 본산이었던 버밍엄대학의 레이먼드 윌리엄스 교수는 "교육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성취하기 힘든 혁명"이라고 했다. 그 긴 혁명 대열에서 우리만 낙오한 결과가 초래한 게 오늘날 한국의 '교육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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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천읍에 배롱서원 북스테이를 열어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무료 기숙학교로 운영하며, 서울에선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합니다.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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