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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 있었어요' 이태원 생존자의 고백, 그를 울린 한 마디

[누군가의 생존법 ⑤] 이상민·박정원씨가 들은 보빈(가명)씨의 이야기

등록 2025.11.05 11:04수정 2025.11.0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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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랜턴'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그 가운데서 느낀 삶의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폭넓게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그 모든 과정을 '생존'으로 이야기함으로써 10·29 이태원 참사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 본 글에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와 당시의 경험이 서술돼 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우울감, 불안감 등 외상 반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읽는 중이나 이후에 불안, 무기력, 두통·불면, 두근거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가족·친구에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기자말]

 보빈씨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아끼던 인형을 두고 왔다.
보빈씨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아끼던 인형을 두고 왔다. 박정원

올해 호박랜턴은 제26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해 부스를 운영했다. 이태원 혹은 핼러윈을 즐기던 사람이라면 올 법한 자리를 고민하던 참이었다. 특히 이태원은 퀴어 커뮤니티가 발달한 지역인 만큼 퀴어문화축제에 가면 누구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렇게 핼러윈 가면 만들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추모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커다란 천을 준비했다.

그리고 당일 은근히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나도 참사 현장에 있었다고. 보빈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명동의 한 잡화점에서 일하는 보빈씨는 퇴근하는 길에 우연히 들렀다고 했다. 재미난 구경인가 싶어 한 바퀴 돌다가 그는 호박랜턴 부스 앞에 멈춰 섰다. "나 참사에 대해 아는데!" 이야기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제안하게 됐다. 약속한 날이 되자 보빈씨는 휴대폰 앨범에 사진을 정리해 왔다. 촬영 시각이 남은 상세 정보를 꼼꼼히 보여 주는 한편, 질문지를 받아들자마자 이야기를 쏟아냈다.

보빈씨의 경우, 그날 오후 8시경 이태원을 벗어났다. 스스로 반복하기를, 사건이 일어나기 두 시간 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그의 생생한 경험을 듣고 나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자'란 도대체 누구일까. 10·29 이태원 참사는 열린 공간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특수한 성격을 갖는다. 참사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서 끝이 나는지, 언제부터 시작해 언제 끝이 나는지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보빈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두 시간 전 집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하지만, 동시에 그날 겪은 위험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울러 만약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어떤 일을 당했을지 사후적으로 체감했다. 이때 보빈씨는 참사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역시 비슷한 고민으로 참사 이후를 보내 왔을지 모르겠다. 펑펑 눈물을 흘리고, 길길이 분노하고, 무뎌지고, 괜찮아지고, 힘껏 소식을 알리고, 돕지 못한 데 자책하고, 아찔함을 느끼고. 보빈씨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어떤 곤경을 읽는다.

사진 속 담긴 그날의 핼러윈 풍경

보빈 : "사진을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쉽게 찾기 위해서 정리를 많이 해왔어요. 진짜 지우면 안 되겠더라고요. (앨범 넘기며) 저는 (오후) 5시 조금 넘어서 이태원에 도착했어요. 이때쯤에는 그래도 사람이 적었어요. (앨범 넘기며) 그런데 점점 많아진 거예요. 오후 5시 41분. 여기가 어디냐면요. 사건이 일어난 블록 전에 있는 블록이에요. 간판이 예뻐서 찍었는데 보세요.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왔어요. 끝까지 있는 거 보이죠. (앨범 넘기며) 이제 밤이 되는 게 보여요. 무슨 이벤트를 하고 있었어요. 저 그거 아직도 갖고 있어요. 당첨권? 응모권? 사람들이 많아지죠. 진짜 많아지고 있어요."

상민 : "앨범을 넘길수록 시간이 흐르는 게 보이네요."


보빈 : "(앨범 넘기며) 지금 시간이 (오후) 6시 24분쯤이거든요.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이때부터 발이 아프기 시작해요. 여기가 A베이커리 앞이었어요. 이 영상 찍고 난 다음에 빵을 먹었어요. 쉬었다고 보면 되죠. (앨범 넘기며) 이촌역에서 (오후) 8시 30분쯤 영상을 찍었어요. 집에 가고 있다, 안녕.

집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 10시쯤이었고 씻고 나오니까 12시쯤 됐더라고요. 제가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요. TV에서 이태원에서 지금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이게 뭔 소리야? 나 방금 그쪽에 있었는데? 그날 잠을 못 잤어요. 나는 분명 거기 갔다 온 사람인데 내가 계속 거기에 있었다면... 당황스러운 거죠. 너무너무 놀랐고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 나 저기 있었다면 진짜 죽었을 것 같아.' 엄마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 자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잠이 잘 오겠냐고."


정원 : "이태원에서 (오후) 8시쯤 집으로 출발하셨던 거네요."

보빈 : "개찰구를 통과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더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집에 가는 중이니까 '사람들 재밌게 즐기세요' 이러고 나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요. 아니 진짜 너무 어이없었던 게 제가 이태원 거리를 몇 바퀴 계속 돌았어요. 음식 거리? 거기 그 거리를. 호박랜턴 들고 다니면서 사탕 달라고 하는 꼬마도 있고, 천사 분장한 사람도 있고. 그냥 재미있는 핼러윈 분위기였어요. 그 골목에 소파 같은 게 있었어요. 거기서 잠시 쉬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여기 계속 있으면 사람들한테 밀리겠다 싶어서 옆으로 빠지는 골목 있잖아요. 그 골목으로 나갔어요. 일단 그때 해밀톤 호텔 쪽은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어요. 이태원역 1번 출구였을 거예요. 골목과 만나는 구간 있잖아요. 그쪽에서 사람들이 더 많아지더라고요. 다른 쪽으로 잠깐 이동했다가 다시 오고 그랬는데도 상황은 똑같아요. 경찰도 3명밖에 없어요. 3명. 뭐야 이거 통제해 줄 사람 없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질서정연하지 못해? 진짜 통제하는 사람들 없었어요. 이상하네. 이쯤되면 삑삑대고 할 텐데 왜 그렇게 안 하지?"

나는 이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어

 그날 이태원에서는 핼러윈 이벤트가 곳곳에서 한창이었다.
그날 이태원에서는 핼러윈 이벤트가 곳곳에서 한창이었다. 보빈

상민 : "아까 보여주신 사진들은 기록용으로 찍으신 거예요?"

보빈 : "아니요. SNS에 올리려고요. '나 여기 왔는데 사람들 진짜 많아.' 당시에는 정말 즐거워서 '이태원 엄청 멋지다' 했어요. 저 이태원 그날 처음이었거든요. 그때 이후로 많이 울었어요. 3개월간 계속 우울했어요. 병원 가서 약 타 오고. 선생님한테도 얘기했어요. 선생님 제가 이태원에 갔다 왔는데, 많이 우울하고 힘들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제가 중요하대요. 일단 당신이 중요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상민 :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보빈 : "다른 사람들은 좋은 데 갔을 거라고. 지금은 당신이 제일 중요하니까 회복하는 문제 아니면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그러냐고. 아니 나도 다녀왔는데 내가 일찍 와서 살아남게 된 건데 어떻게 그 사람들 생각을 안 하냐고...

미안해요. 내가 그때 살아 돌아오게 돼서. 3년 동안 그 마음이 계속 안에 있는 거예요. 아직도 생각하면 너무 슬퍼요. 분향소 가서 또 울었죠. 왜 이렇게 울고 있냐고 누가 인터뷰 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처럼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도 심폐소생술 할 수 있는데,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하면 할 수 있고 나도 힘 있는데, 나도 도움 줄 수 있는데. 너무 미안했어요. 내가 살아있는 이유가 있겠죠? 내가 그때 상황 정리해서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어땠는지 이야기하면 도움이 될 수 있겠죠? 몇 번씩 찾아다니긴 했어요. 제 말을 들어줄 사람을."

상민 : "분향소라면 어디로 계속 가셨던 거예요?"

보빈 : "항상 이태원에서 내렸어요. 녹사평 광장이었어요. 거기에서 유가족분도 만났어요. 그래서 '저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두 시간 전에 집에 왔지만 마음이 안 좋고 여기 분향소 지키고 있는 분들이 안쓰럽고 그래서 비타민 음료 들고 왔으니 받아주세요' 했어요. 많이 고마워하시더라고요. 거기서도 울고 왔죠.

그리고 2년 뒤에 이태원역에 내려서 그 골목 안 편의점 있죠. 그쪽에서 포스트잇도 사서 붙였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외국인이 맥주를 먹으면서 그 앞 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니까 '내 친구가 여기 있었고, 나도 여기 있었다'고...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어요. 그때 다리를 다쳤고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계속 압박을 당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대요. 너무 중요한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한국 사람들 만나면 너의 이야기를 전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고맙대요. 친구는 거기서 목숨을 잃었고 자기는 살아서 친구 기억하면서 여기 맨날 온대요.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속 기억해야지.' 친구를 위해 싸우고 싶다는 거예요. '나도 지금 싸우는 중이지만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벽 바라보면서 이야기했어요."

상민 : "참사 이후에 일부러 뉴스도 더 많이 보셨어요?"

보빈 : "일부러 찾아보진 못했어요. 일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공부하는 게 있었는데 펜이 전혀 안 잡히기도 했어요. 그때 일에도 지장을 받았어요. 매니저가 너 왜 그러냐 그러는 경우도 있었고. 그래도 직장 동료들한테 이야기를 안 했어요. 괜히 그럴까 봐."

상민 : "사람들을 찾아다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또 어떤 분들을 만나셨어요?"

보빈 : "첫 번째로는 외신에 이야기했어요. 이 사건을 다룰 예정이니까 알고 있거나 경험한 분들은 이야기해 달라고 SNS 계정에 올라온 걸 보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나는 참사 당일 이런 일을 당했다'고 SNS에 게재하면서 계속 검색했어요. '지금 여기서 이걸 다루고 있구나.' '나는 여기서 이야기를 해야겠어.' 어떤 일본 기자도 만났어요. 이태원에서 인터뷰를 잠깐 했는데 한국말을 잘하시는 분이었어요."

상민 : "국내 언론사에서 연락을 받으신 적은 없으세요?"

보빈 : "그런 적은 없어요. 국내 언론사라고 해야 되나. 무슨 TV였는데 기억이... 아무튼 그러고 나서 탄핵 집회에도 나갔어요. 그림 그려서 피켓처럼 들고 다녔어요. 아마 매번 사진 찍었을 거예요. 잠시만요. 남아 있나...

(앨범 넘기며) 참사 1년 뒤 10월 29일에 이태원에 또 왔네요. 지금 많이 조용하다고 친구들한테 알려 주려고 했어요. 여기 바리케이드 쳐 있는 거 보이죠? 제가 그날 지나갔던 데에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벽에 꽃도 제가 놔둔 거고. SNS하는 제 친구들은 다 외국 친구들이에요. 그래도 소식이 많이 알려진 것 같아서 다행이더라고요. (앨범 넘기며) 2024년 10월에도 이태원에 다시 왔어요."

상민 : "2024년에는 10월 30일에 방문하셨네요."

보빈 : "다시 갔더니 벽이 조금 좁아져 있더라고요. 추모 공간이 되게 좁아져 있었어요. 규모가 컸던 것 같은데 왜 줄어드는 것 같지? 이제 사람들이 많이 기억을 안 하는 건가? 자괴감이 들고."

무뎌지는 것과 괜찮아지는 것 사이에서

 2주기 당시 보빈씨가 작성한 추모 포스트잇
2주기 당시 보빈씨가 작성한 추모 포스트잇 보빈

상민 : "직장 동료에게 이야기 안 하셨다는 것도 더 여쭙고 싶어요."

보빈 : "그때 안 친했어요. 친했으면 이야기했을 텐데. 그래도 만나는 사람마다 '사실 나 이태원 갔어.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두 시간 전에 나왔어.' 그렇게 풀어 나갔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무뎌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제가 이 일에 분노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적게 다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크게 다쳐야 했던 거예요? 그리고 인터넷 댓글을 보면... '너는 그런 놈이구나.' 놀러 가서 다칠 수도 있는 거지. 제일 슬픈 건 참사 있고 소방서장이 나와서 브리핑을 하는데 사람들 살리려고 정말 많이 노력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그만큼 잘 안 되니까 후유증이 크다고 하잖아요.

나도 도울 수 있는데. 내가 그래도 끝까지 놀고 갔으면... 그런 생각을 하긴 해요. 그런데 거기 있었다가 엄마 아빠도 못 만나고 그럴 수도 있었잖아요.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내가 살아있는 게 다행인 거죠. 아니면 어떤 때는 나도 거기서 도와야 했다고 계속 충돌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벽에 설 때마다 죄송해요. 제가 그때 조금 더 놀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계속 울어요."

상민 :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에요?"

보빈 : 1년 시간이 지났을 때는 펑펑 울 만큼이었는데, 2, 3년 정도 지나니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해요. 슬퍼하면서도 이제 눈물은 안 흘리겠다고. 덤덤하게 잘 기억하겠다고. 지금 내가 울지 않는다고 안 슬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분노하고 있는 것도 맞고 전보다 마음을 삭이면서 분노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약간 어렵네요."

상민 : "직후에 일상생활이 어려웠다고 말씀하신 것도 자세히 여쭙고 싶어요."

보빈 : "일단 식욕이 많이 증가했어요. 화나면 와구와구 먹잖아요. 3~4kg 급격하게 늘어나기도 하고 우울증도 왔어요. '나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자괴감 진짜 많이 느꼈어요. 그런데 사회생활하면서 많이 무뎌, 괜찮아졌어요. 그러면서도 매년 10월이 다가오면 저는 그때 사진 보면서 이때 평화로웠는데 왜 그랬나 생각해요.

저를 알고 있는 SNS 지인들이나 온라인 게임 사람들한테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지금 버텨내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럼 물어봐요. '괜찮아?' '너 혹시 다쳤어?' '아니, 난 그 사건 일어나기 두 시간 전에 집에 돌아왔어.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 그게 반복됐던 거예요. 그럼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왜?' '야, 돌아왔으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 같이 살아있는 거잖아.' '내가 살아있으면 뭐하냐, 이 사람들 내가 도울 수도 있었잖아.' 계속 한숨 쉬는 상황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너는 살라'고 하면서 앞으로 밀어주는 그 느낌을 한 2년 정도 뒤에서야 조금 깨닫게 됐죠. 이 사람들이 그래도 나를 앞으로 나아가라고 힘을 실어주는구나."

상민 : "3개월 동안 특히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후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거예요?"

보빈 : "그냥 시간이 흘러간 것 같아요. 계속 힘들어하면 일에 집중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걱정을 잠깐 내려놓고 내 상황에 집중하자.' 그 당시에 코엑스에서 일을 했는데, 사람이 정말 많아서 걱정할 틈이 없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할까?"

상민 : "힘들었던 기간 동안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보빈 : "아뇨. 재미있었어요. 이 일 자체가 잘 맞고. 그리고 저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런 성격이에요. 그 일을 잠깐 배제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어서 괜찮았나 싶어요."

앞으로 나아갈 힘에 대하여

 2022년 10월 29일, 보빈 씨는 오후 5시를 넘겨 이태원에 도착했다.
2022년 10월 29일, 보빈 씨는 오후 5시를 넘겨 이태원에 도착했다. 보빈

상민 : "지금 하는 이야기는 공개되기도 하잖아요.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어요?"

보빈 :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에요. '나는 여기 놀러 갔다 온 사람인데 그 상황을 직접... 그 사건이 일어나기 두 시간 전에 있었던 사람이고 밀려드는 걸 직접 본 사람으로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때 경찰은 3명밖에 없었고(안 보였고) 질서를 정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정말 화가 났다. 여기 정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많이 화가 났고, 즐거워야 했던 핼러윈 파티가 어느 순간 망가지게 되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서는 안 됐다.'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긴 해요.

그리고 '나는 그 참사 직후에 임시 분향소에 가서 이야기를 했고 그림을 그렸고 많이 힘들긴 했지만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또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싶어서 외신 인터뷰를 하면서 거리낌없이 다 알려줬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지면 좋겠는데 그게 아쉽다. 하지만 나는 알리는 걸 멈추지 않고 싶다. 지금은 일이 바빠서 깊게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이 사람들이랑 같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또 이 사람들이 나한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상민 : "'이 사람들'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보빈 : "그러니까 이태원 참사 때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제가 이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눈물 흘리고 막... 그러니까 이제 슬퍼하지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마냥 슬퍼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달라고 제가 앞으로 미는 것 같아요. 이렇게. 그래서 제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상민 :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에 대해 언제 느끼게 되셨어요?"

보빈 : "글쎄요. 이태원에서 1년 뒤에 어떤 분을 만난 적 있어요. '저는 여기에서 돌아왔습니다. 제가 여기 있었어요' 하니까 저를 안아주시면서 '잘 돌아왔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했어요.) 거기서 약간 힘을... 그래, 무사해서 난 다행이야. 난 다행이야. 그분 덕분에 힘을 얻게 된 것 같긴 해요. 나도 힘을 잃지 말아야겠다. 나만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유가족들도 그렇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다른 분들도 힘을 내서 이렇게 알리려고 하는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러니까 나도 알려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잖아요"

상민 : "참사 당일 겪은 일을 가족들하고는 어떻게 나누셨나요?"

보빈 : "그때 엄마한테 흥분하면서 이야기했어요. '엄마, 내가 여기 있었어. 진짜야. 여기 사람들 진짜 많이 몰렸어.' 그래서 옆으로 빠졌다고 이야기했고요. 발이 너무 아파서 집에 빨리 왔다고 하니까 '그래, 그게 너를 살린 것 같다' 하면서 가족들이 안심했어요. 천만다행이라고. 천운이라고. 그런데 저도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잖아요. 한 3개월 동안 관련된 기사가 언급될 때마다 '엄마, 내가 저기에 있었다'고 말하면 엄마는 심각하게 그 광경을 다시 바라보고.

제가 스트레스 받고 살 찐 거는요. 사실 공공기관의 그 태도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 소방대원분도 돌아가셨잖아요.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 이름 뭐였죠? 이태원에서 사람들 몰렸을 때 집에 혼자 갔다는 그 사람. (용산구청장) 맞아요. 그 사람 태도를 보니까 진짜 엄청 화가 나는 거예요. 나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사람들이 몰려서 엄청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그렇게 도망을 갔다고? 그러니까 너무 복장이 터지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태도 때문에 한 3개월간은 화가 나고.

엄마는 저 보고 '야, 네가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아니야. 엄마 내가 저기 갔다니까? 만약 신발이 괜찮았고 휘말렸으면 어떡할래?' 말이 안 통하겠구나 싶어서 많이 답답했어요.

나는 거기 상황에 있을 뻔했어요. 엄마가 안 알아줘요. 사람들이 저랑 1m 정도 떨어져 있었어요. 위에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오는 느낌 있잖아요. 그래서 여기 더 있으면 압박을 당하겠구나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하면서 트인 공간으로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길 따라서 사람들이 또 올라가요. 골목길로 계속 쭉. 아무도 통제하는 사람 없고. 신고할 걸 지금 와서 후회해요. 그런데 제가 신고한다고 달라지진 않을 거 같은 거예요. 그게 천추의 한이에요. 그 마음이 계속 들어요. 너무 너무 답답하죠."

상민 : "집에서 조금 아쉽게 느끼기도 하셨잖아요. 어떻게 반응하기를 기대하셨어요?"

보빈 : "'우리 딸 그래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때 어땠니? 무슨 상황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엄마가 물어보지 않아요.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너무 아쉬웠던 거예요. 저번에 이태원 추모하러 가서 어떤 단체분이 저를 안아주셨다고 그랬잖아요. 그 자리에서 정말 창피한 것도 모르고 오열했어요.

'괜찮아요.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계속해서 다행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또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내가 더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막을 수 있었을까. 저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거나 곤란해 보일 일 때 도움이 되고 싶은 그런 게 있거든요. 그런데 가끔 네가 도운다고 저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없었을 거라고 듣기도 해서 김이 새더라고요.

그리고 또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들을 보니까, 처음에는 '왜 이런 상황에 카메라를 꺼내서 찍지' 했어요. 그런데 찍을 수도 있지 않나? 왜냐하면 지금 상황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이 바뀔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기록 남겨도 좋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비난하지 말고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평면적으로 보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두고 온 인형

 보빈 씨가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 공간에 두고 온 인형
보빈 씨가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 공간에 두고 온 인형 보빈

상민 : "(앨범을 넘기며) 이건 또 언제 가셨던 거예요?"

보빈 : "2022년 11월 16일. 지금 여기(이태원역 1번 출구)도 임시 분향소에요. 제가 찍었어요. 나는 이렇게 추모했다고. 이건 11월 5일. 참사 직후에 갔어요. 여기 인형 두고 갔어요. 제가 아끼던 인형인데 제 마음을 두고 온 거예요. 저랑 약간 동기화되었을 거 아니에요. 특이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제 일부 제 영혼을 두고 온 거니까 가는 길 많이 외롭지 않게..."

정원 : "어떤 물건을 두고 온 분들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보빈 : "그래도 제 마음이 거기 잘 닿아서 마음이 괜찮아졌어요. 그러고 나서 화가 나더라고요. 그 즐거웠던 핼러윈 파티가 망가졌어요. 자료 찾아보니까 정부가 진짜 나쁜 짓 저질렀네? 그때부터 알게 된 거예요. 직장을 코엑스에서 명동으로 옮긴 게 지난해 12월 3일이었어요. 화요일 저녁이었죠. 그때가 첫 출근이었어요. 시간이 지나서 대통령 잘못이 드러나다 보니까 그동안 살았던 설움이 있잖아요. 제가 조용히 분노하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마음속에 응어리가 졌어요."

상민 : "지난 겨울 집회에도 많이 나가셨어요?"

보빈 : "겨울에는 못 갔어요. 명동에서 일하니까 참 바쁘더라고요. 외국인들도 많이 오고 방한 용품이 많이 팔렸어요. 시위하는 방향이랑 가까워서 토요일 오후쯤이면 사람들이 지나가는 게 보여요. 정문 앞에 메인 매대가 있거든요? 사람들이 어지르면 제가 정리를 많이 해요. 그럴 때마다 깃발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어요. 모두 정말 잘 만들었어요. 멋지다 다들. 제가 직접 나가지는 못해도 SNS에 '저는 지금 일 때문에 못 나가지만 여러분들을 언제나 지지하니까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방한용품 같은 건 우리 매장에 많이 있으니까 들러주세요' 기재했어요.

세상이 그렇게 바뀌고 있구나. 사람들이 바꾸려 하고 있구나. 사고가 일어나도 쉬쉬할 게 아니라 상기하고 서로 아파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는 참석을 못하니까 거기서 또 죄책감도 들고. 제가 명동에서 일을 한다고 했잖아요. 나도 나가고 싶은데 나만 못 가니까 너무... 그냥 마음속으로 응원했어요. 그래도 되나? 그치 그래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사람들한테 알리고 있다. 내가 지금 비록 일하고 있지만 나도 응원봉 흔들면서 시위하고 있는 거다.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진짜 진짜 참여하고 싶었어요."

상민 :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찾아 가면서 하셨네요."

보빈 : "외국 친구들이 저를 알고 있으니까 저를 통해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한국에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서 SNS에 다 인용하고 했어요. 그 여파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된 거 같기도 하고. 제가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또 드네요. 도움이 됐을까요?"

보빈씨는 청각이 예민하다. 주4일 잡화점에서 근무하는 동안 작은 소리도 금세 알아챈다. 유리인지 플라스틱인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움직여 먼저 상황을 정리한다. 또한 보빈씨는 시야가 넓다. 매장에 출입하는 손님들을 살피다 적절히 응대하는 건 언제나 그의 몫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고를 예방하는 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발생한 문제를 매끄럽게 수습하는 일 역시 주목 받기 어렵다.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드문데, 내심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도 잠시, 보빈씨는 사심 없이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역할을 이어간다.

그래서일까. 그는 참사 이후 사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요한 책임을 지닌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고 정작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자 애쓴 사람만이 자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그런 보빈씨의 마음은 오히려 과도하다 여겨지기 일쑤다. 나는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독백처럼 전한 말에 응답하고 싶다. 보빈씨는 분명 도움이 됐을 거라고.

한편, 여기에는 보빈씨의 위치도 작용한다. 그는 사건을 겪었지만 어쩐지 사건을 겪을 뻔한 사람으로서밖에 입을 열지 못한다. "나 참사에 대해 아는데!" 하고 다가올 때 보빈씨는 목격자가 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알리고자 했던 것들 중에서는 생존자로서의 감각 또한 있다. 그런데 그 역시 살아남았다고 강변하는 데 망설이게 된다. 보빈씨가 머물렀던 자리에 계속 남아 위험을 겪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더군다나 보빈씨의 진심을 일축하는 반응도 왕왕 보인다.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위로에 기대자니 심리적 장벽이 두텁다.

그러고 보면, 참사 피해에 대한 지원은 주로 개인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당신은 생존자입니까?" 같은 질문 앞에 서야만 하고, 그럴 때마다 몹시 난처해지는 입장이 있다. 나는 관점을 달리 하고 싶다. 인터뷰 중간 보빈씨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변과 어떻게 주고받아 왔는지 이야기한다. 사회는 '생존자'에게 어떻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글 : 이상민

* 이 활동은 재단법인 숲과나눔의 2025 풀씨 사업이 지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도 실립니다.
#10·29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이태원 #핼러윈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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