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시루 출근 버스에서 만난 하루 치 '행복'

꽉 찬 사람 틈에서 가방 맡아주신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등록 2025.10.27 18:01수정 2025.10.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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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부터 시작한 새벽 출근이 제법 익숙해졌다. 오전 8시까지 직장에 가려면 오전 6시 30분쯤 집을 나서는데 동네 골목은 낮과 다르게 한가하고 버스에도 자리가 많아 여유롭다. 이런 풍경은 새벽출근의 매력이기도 하다.

버스 안에는 젊은이들보다는 내 또래 아니면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는 중장년이 대부분이다. 새벽 인력시장 일거리를 찾아가는 건설 노동자들도 볼 수 있다. 이들 어깨에는 작업 도구가 들어있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있다.


그간 새벽마다 출근하면서 버스에서 한가로이 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모두가 생업에 쫓겨 치열하게 살기 때문인지 모른다. 27일, 오늘은 평소보다 출근이 한 시간 늦었다. 2주 전 돌아가신 작은 어머니 장례를 끝내고 몇 군데 감사 전화를 드리다 보니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고 말았다. 출근을 서두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출근길 만원버스에서 만난 할머니

 할머니의 호의를 만나다.
할머니의 호의를 만나다. itsseyed on Unsplash

오전 7시 30분쯤 버스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동네에 살면서 정류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이다. 이 시간대 버스는 분 단위로 쉴 새 없이 운행하는데 승객들의 버스 타기는 거의 전쟁 수준이다.

승객을 더 이상 태울 수 없어 그냥 통과하는 버스도 많았다. 조금 이른 새벽에 출근할 때는 이런 무정차 버스는 없다. 버스가 오자마자 사람들 따라 무조건 버스에 몸을 욱여넣듯 올라탔다. 이게 이 시간대 버스 타는 요령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스를 놓치고 만다. 버스 뒷문으로 내가 가장 마지막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은 승객들로 혼잡했다.

지하철을 타려면 대여섯 정거장을 가야 하는데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움직여봤자 버스카드 단말기 주변이다. 가방은 앞으로 안고 있었다. 그런데 카드단말기 앞 의자에 앉아있는 한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어르신, 가방을 이리 주세요. 내가 맡아줄게요."

70대로 보이는 할머니는 내 답변도 듣기 전에 가방을 뺏다시피 자기 무릎으로 가져갔다. 재빠른 할머니를 내려다보면서 이 와중에 가방까지 들어주는 분이 계시다니 감동했다. 그새 버스는 지하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가방을 챙기려는데 할머니가 졸고 있었다. 할 수 없어 할머니를 흔들어 깨우면서 말했다.


"이제 내려야 하니 가방을... 정말 고맙습니다."

할머니가 가방을 맡아주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버스 안에서 몸 따로 가방 따로 한참을 고생했을 것이다. 피곤하고 귀찮을 텐데 가방을 대신 챙겨주는 할머니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런데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실 그분은 이 바쁜 시간에 어디로 가는지 괜히 궁금했다. 아침 일찍 나서는 걸 보니 나처럼 일터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버스에서 뜻하지 않은 친절한 할머니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사실 버스로 등교하던 1960~1970년대에는 혼잡한 버스가 아니더라도 서 있는 사람들의 가방이나 물건을 대신 들어주거나 받아주는 것은 예사였다. 그 시절에는 이런 호의를 베푸는 데 별다른 용기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요샌 되레 조심스러워 꺼리는 모습이다. 실제 낭패 본 경험도 있다. 한 번은 혼잡한 지하철에서 무겁게 보이는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며 한 승객에게 제안했다가 거부 당하고, 그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갔다.

이 일로 왜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 일을 했는지 민망했고, 스스로 원망했다. 베푼 선의가 무시 당한 꼴이어서 의기소침했다. 옆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무안 당한 나를 위로했지만 그날 일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 점에서 할머니는 요즘 보기 드문 매우 용기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도 할머니 모습이 한참 떠올랐다. 할머니 배려 덕분에 하루 종일 행복하고 기분 좋았다. 할머니 따라 남의 가방을 들어 줄 용기를 다시 내보기로 했다.
60대 이상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
#새벽출근 #카드단말기 #70대할머니 #호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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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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