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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생존자가 절대 잊지 못하는 말, '너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누군가의 생존법 ②] 박정원·이민애씨가 들은 한재영(가명)씨의 이야기_첫 번째

등록 2025.11.01 11:18수정 2025.11.0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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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랜턴'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그 가운데서 느낀 삶의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폭넓게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그 모든 과정을 '생존'으로 이야기함으로써 10·29 이태원 참사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본 글에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와 당시의 경험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우울감, 불안감 등 외상 반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읽는 중이나 이후에 불안, 무기력, 두통·불면, 두근거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가족·친구에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기자말]

 재영 씨는 1주기 때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포스트잇에 '마주하겠습니다,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썼다.
재영 씨는 1주기 때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포스트잇에 '마주하겠습니다,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썼다. 박정원

지난 여름,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던 중 한 블로그 글을 접했다. "그래, 나는 그날 이태원에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에는 재영(가명)씨가 이태원 참사 당시 구조 활동을 했던 경험과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 빼곡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참사 이후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는 생각과 함께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오랜 시간 동안 통과해 온 그는 1주기 추모대회에서 포스트잇에 이러한 문장을 썼다고 한다.

"이제 마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서 편안할 수 있도록, 가족분들과 같이 싸우겠습니다. (…) 그러니 저를 잘 살펴봐 주세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마음으로 행동하는지 감시해 주세요. 저 정말 잘 살아가겠습니다."

재영씨가 가진 것은 흔들리는 삶을 넘는 단단함, 그리고 그보다 큰 용기였다. 그가 '마주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다다른 과정을 좀 더 듣고 싶었다. 그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글을 작성한 2023년 11월로부터 1년 반이 넘게 지난 현재,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댓글에 호박랜턴의 연락처를 남겼다. 얼마 후, 호박랜턴의 정원과 민애는 서울의 한 공간에서 재영씨와 만날 수 있었다.

재영씨는 90년대 후반생 여성이다. 20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지금까지 쭉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 귀여운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갔을까

재영: "이태원은 이전에 그렇게 많이 가본 건 아니었고, 핼러윈이나 그럴 때만 갔었어요. 그날 함께 갔던 친구는 고향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 친구가 처음 서울에 놀러 오던 날에도 이태원을 갔던 기억이 나요. 저한테 있어 이태원은 '서울 구경하는 장소'라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사람 많은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크리스마스나 핼러윈은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뭔가를 할 수 있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고, 다들 그날을 신나 하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날만을 위해서 해외 배송 시켜서 몇 달 전부터 준비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때 같이 살던 친구가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그런 거 엄청 좋아하는 친구여서. 원래는 분장할 생각도 없었는데 친구가 '분장해야지, 해야지' 해서 갑자기 재료 사서 분장하고 그랬어요. 저희가 좀 게을러서 늦게 준비해서 버스 타고 이태원으로 가는데, 창밖으로 젊은 엄마들이랑 아이들이 보이는데, 아이들이 너무 귀엽게 핼러윈 분장을 한 거예요. 친구에게 '봤어? 쟤네 봐, 너무 귀엽다! 저런 애들을 이길 수가 없다' 이랬어요. 그래서 친구가 동영상을 찍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저는 참사가 일어나고 나서도 그 아이들을 봤던 게 생각나요. 아이들 어떻게 됐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거기 있던 그 아이들은 집에 무사히 갔을까? 그날 찍은 영상이 되게 많았거든요. 틱톡 챌린지 한다고. 근데 그 영상도 1년 뒤쯤에 봤어요. 계속 못 보다가 (피해자 인정 신청) 증명해야 할 때쯤 봤던 것 같아요. 사람이 엄청 많았으니까, 그때 사진을 다시 보면 '이 사람 살아 있을까? 죽어 있을까?'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거죠. 너무 보기도 힘들었고,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고, 이태원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도 힘들었어요. 저는 분향소를 아직도 못 갔어요. 가면 그 사람들 얼굴이 다 있으니까."

정원: "당시에 라이프 가드 자격증이 있어서 구조를 선뜻 하겠다고 뛰어가셨다고 하셨어요."


재영: "자격증을 그해 봄에 땄으니까 사실 얼마 안 됐을 때였고… 모르겠어요. 저도 왜… 처음에 사람들이 막 실려 나오고, '남자분들 저기 가서 도와주세요!' 하고. '뭐지? 난 여기 가만히 있어도 되나?' 하다가, 제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러면서. 사실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해결을 못 했다'는 생각, '끝까지 도움을 안 주고 내가 떠났다', '더 할 수 있는 걸 못 했다'는 게 너무 컸어요. 제가 분향소 못 간다고 했던 게, 제가 구조 활동했던 사람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거든요. 처음에는 기억이 났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 상태가 괜찮아지면서 그게 잘 기억이 안 나더라구요."

정원: "그런 죄책감 같은 감정이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최선을 다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재영: "스스로 생각할 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나가서 CPR 할게요' 한 것도 죽을 줄 알고 나간 게 아니고, 그냥 가서 '그 사람 살린다', '나 살리는 법 알아'해서 간 건데, 사실 못 살렸어요. 그러면… 저도 살리는 법만 훈련받았지, 못 살렸을 때 어떻게 하는지는 훈련 안 받았단 말이에요. '이제 뭐 해야 돼?' 그런 순간이 왔던 것 같아요. 또 그 죄책감이라는 것도 구조를 다 같이 하는 게 아니라 딱 몇 명이서 한 사람만 맡는 식이니까, 제 느낌에는 책임 분산이 되지 않고 너무 집중된 죄책감인 것 같았어요. '우리가 못 살렸다'가 아니라 '내가 못 살렸다'가 되니까.

물론 지금 생각하면 복합적으로 모든 것이 다 잘못됐고 통제가 잘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제 마음속에는 '내가 못 살렸다'는 게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여전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구조하려고 했던 분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세 명이서 둘러 앉고 한 사람을 맡았는데, 내가 그 사람을 기억 못 해. 왜? 나는 너무 괜찮은데, 내가 그 사람 얼굴도 몰라, 이름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근데 그 사람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어' 이렇게 돼버리니까, '그러면 안 되지 않나?' 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고."

정원: "그런 죄책감이 사실 다 같이, 혹은 국가가 나눠 가져야 하는 감정인데. 그게 현장에 계셨던 생존자, 구조자분들한테 떠넘겨졌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현장에서 경찰이나 구조대조차 이 일에 대해서 파악을 못 하는 상황이 있었잖아요. 가령 경찰이나 구조대가 이쪽 골목을 보고 있는데, 사실 다른 쪽에 더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나서야 아셨다든가."

재영: "저는 CPR 할 때까지는 이게 사람'들'인지도 모르고 '이 사람 살려야 한다', '내가 맡은 이 사람이 빨리 깨어나야 된다'라고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뭔가 해프닝처럼 느껴졌었으니까. 저도 CPR을 계속하니까 힘에 부쳤지만 사실 힘에 부치는 건 내가 그냥 극복할 수 있었어요. 근데 보이잖아요. 아, 뭔가… 호흡이 없는데. 근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하고. 근데 내가 놓으면 진짜 안 될 것 같고. 그러다 다른 CPR 하던 사람이 교대해 주셨어요.

'상황을 좀 볼까' 하고 일어섰는데, '어, 너무 쓰러진 사람이 많은데?'. 정말 뭔가 공장 같았어요. CPR 공장 같이, 안 보이는 데까지 다 CPR을 하고 있고. 경찰을 보니, '어떡하지' 하는 느낌으로 손을 짚고 있으시고. '경찰도 모르면, 그러면 누가 알지?' 하다가, '구조대원이 빨리 와야 되는데, 우리 지금 몇십 분 동안 이러고 있는데, 왜 아무도 안 도와주지? 나는 시민인데? 나는 일반인인데? 왜 아무것도…' 하다가. '아,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다. 경찰도 몰라, 구조대원도 모르고, 나는 더 몰라. 그냥 여기서 다 죽는 거야.' 저는 그때까지도 그냥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근데 해결도 안 되고, 아무도 방법을 모르고.

그리고 저는 CPR을 하면 구호 붙여서 집중해야 되고 이 사람 상태만 계속 보고 있으니까, 주변 상황을 그때까지 파악을 못 했었어요. 그런데 일어나서 보니 CPR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은 팔을 주무르거나, 머리에 피를 닦아주거나 하고 계셨는데, 그분들이 울고 있는 거예요. '왜 울지?' 하다가 '아, 이거 사실 우는 상황이구나'하고 그때부터 갑자기 눈물이 막… 저도 막 울다가, 동행했던 친구가 가게 안에 있었거든요. 제가 우니까 가게에서 나와서, '재영아 가자, 우리 집으로 가야겠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집에 가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왜 우리가 집을 가. 아니야. 저기 안에 사람 더 있대. 저기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면서… 친구가 '아니, 재영아, 우리는 가야 해, 너 이래서 안 돼. 그냥 가자'하고 저를 끌고 큰길로 갔어요.

그런데 큰길로 나가니까, 골목 안쪽이 자리가 없어서 큰길에 눕힌다고 하더니, 텅 비어있었거든요. 몇 명 안 누워있고 거기에 구조대원들이 다 있고. 울면서 속으로 '저 안에 시체가 겹겹이 쌓여있는데, 이게 뭐지' 하면서. 저 안에는 지금 제세동기 갖다 달라고 해도 안 가져다 주고, 어떤 사람들은 산소 호흡기 달고 있고… 구급차들이 와 있잖아요. 근데 구급차가 안 움직이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다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구급차가 안 움직이네? 다른 사람들 많은데? 사람들을 살리려면 구급차가 움직여야 할 텐데'… 구조대들이 서서 얘기를 하고 있어요. '상황을 살펴보자. 구급차가 왜 안 움직여… 아, 사람들이 사실 다 죽었구나'라고 그때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가서 얘기를 했어요. '저기 안에 사람이 더 많다. 봐야 한다. 제가 맡았던 분이 피가 나고 지금 상태가 안 좋다. 저기 들어가 보셔야 된다'라고 하니까 그제야 '안에도 사람이 있나요?' 하고 수근수근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인도해서 데려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 이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하면서… 그때 저도 엄청 심하게 울고 있었고 몸도 너무 못 가눠서. 그래도 일단 전문가들에게 얘기했으니까 됐다고 생각하면서, 친구가 끌고 가니까 그냥 끌려갔어요.

근데 조금만 벗어나도, 이제 막 이태원에 온 사람이 있었어요. (참사가 일어난 지) 저는 시간이 좀 많이 흘렀다고 생각했어서, '사람이 왜 가지, 저기 가면 안 되는데' 생각했어요. 우선 걸어가서 버스를 탔는데 그때 휴대폰을 봤더니 뉴스가 떠 있었어요. 버스 타러 가는 길에서도 구급차들이 오잖아요. 근데 오는 구급차만 있고 나가는 구급차가 아무도 없었어요. 그것도 너무 슬퍼서, '오면 뭐하나, 이제 와서 뭐 하나' 생각도 많이 했어요.

구조활동 할 때의 현장도 아수라장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냥 일반 시민들이 사람들을 한 명씩 옮기는 식이었어서.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사람들 왜 자꾸 실려 올까?' 하면서 헛소문이 부풀어오르는 과정이 있었고, '무슨 일이야?' 하면서 기사나 트위터나 이런 데 찾아보면 안 나오고. 그래서 저는 그때 '별일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었고, 원인도 모르고, 그래서 저는 진짜 몰라서 돌아왔어요. (압사 사고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구조 활동할 때까지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저는 더 오히려 살릴 수 있었다라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정원: "손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거를 받아들이는 게 너무 어려웠을 것 같아요."

재영: "그때는 오히려 가이드를 내려줄 사람이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어요. 정말 급박한 상황이잖아요. 한시를 다투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저희는 이것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다 아니까요. 그 자리에 의사나 간호사나 이런 사람들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CPR을 최소 30분정도 했던 것 같아요."

정원: "CPR을 하시는 동안 체감하시기에 제세동기를 제때 갖다준다거나, 구조대원처럼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 총괄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느끼신 거죠?"

재영: "네. 그리고 있었어도 한두 명 있으니까 그 사람들도 감당이 안 되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생사를 봐줄 수도 없고. 좀 답답하기도 하고.

저는 일어나서 상황을 보고 '진짜 더 뭘 해야 될까'라고 생각했을 때, 다른 옆에 있는 분들이 남자분 여자분 상관없이 옷이 벗겨져 있잖아요. 옷이 조이면 안 되니까. 소지품도 다 나뒹굴고 있고. 그래도 이 사람이 누군지 식별이 가능해야 하니까 옆에 가방을 붙여 주는 게 제일 마지막 도리였어요. 제가 천주교여서 기도를 드리고 싶었는데, 기도를 드리면 진짜 이 사람이 죽게 될까 싶어서 그것도 못하고. 그런 것들도 결국 죄책감으로 남았던 것 같아요. 제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 더 있었을 수도 있는데."

정원: "그렇게 다른 분들에게 현장을 맡기고 돌아가는 길에, 참사 보도가 아직 알려지지 않아 이제 막 이태원에 도착한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축제에 들떠 있는 사람들을 보셨다고 했어요. 그런 사람들을 봤을 때 재영씨가 느끼셨던 감정이 미움 같은 게 아닌, '저 사람들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였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재영: "저는 진짜 별로 화가 안 났고, 그때는 진짜 그냥 감사했어요. 그 사람들이 살아 있어서. 거기 있던 사람들 대부분 제 또래고… 저는 항상 조금만 더 일찍 갔거나 다른 친구랑 같이 있었다면 사실 저도 거기 누워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차라리 내가 거기 있어야 했다, 그 사람들 말고' 이런 생각도 많이 했고. 그래서 정말 얼마 차이 안 나는 그 찰나 때문에 제가 살아 있다고 생각했고, 제 뒤에 온 사람들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저에 대한 행운보다는 사실 그 사람들의 행운을 바랐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정말 다행이라고.

참사 이후 얼마 동안은 아예 젊은 사람 얼굴을 못 봤어요. '이 사람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거기 있었으면 어떡하지', '이 사람들도 사실 거기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얼마 동안 계속 했어요."

참사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참사 당일 재영씨가 촬영한 이태원 풍경
참사 당일 재영씨가 촬영한 이태원 풍경 한재영

재영: "저는 참사 당시 친구랑 같이 살았고, 그 친구도 현장에 같이 있었는데, 비교하게 되는 게 있었어요. 제가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참사 후에는 PTSD에 대한 상담으로 바꿔서 똑같은 선생님과 진행을 했어요. 제가 참사 이후에는 자존감도 너무 낮아져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잠식당해 있으니까, 선생님께서 '내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에 대한 장점을 써보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A4 용지를 주셨는데, 아무것도 못 쓰겠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그럼 집에 가서 친구랑 같이 써 보라'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집에 가져가서 친구한테 보여 줬어요.

근데 친구는 '나 그런 거 완전 잘하지!' 이러면서 A4 용지에 꽉 채우는 거예요. 저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친구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똑같다, 자존감 높고, 자신만만하고, 그런 능력치가 100점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던 사이였는데. '어, 우리가 시작은 똑같았는데, 그런 똑같은 일도 겪었는데, 왜 이렇게 다르지? 나만 왜 극복을 못했지?' 생각했었어요.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보이잖아요. 같이 사니까. 저는 거기서 못 헤어나오고 있는데, 친구는 지하철도 잘 타고, 콘서트를 간다고 하고. 그런 걸 제가 비교를 많이 했어요. '같이 있었는데 왜 나만…' 하고. 근데 그것도 저는 너무 싫어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친구인데 얘를 미워하고 있는 게."

정원: "회복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게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투영되고 비교하게 되는 것이네요."

재영: "저는 이태원 참사 있고 나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라는 생각이었는데 연말이었으니까 남은 연차가 없었어요. 연차가 없으니까 병원도 못 갔어요. 그래서 휴직을 해야겠다 했는데, 제가 입원을 했거나 큰 상해를 입은 게 아니라 정신적인 병이니까 신병 휴직을 해야 됐어요. 그걸 하려면 2차 병원 이상의 진단서가 필요한데, 정신과 특성상 진단서는 진료 한번 본다고 나오지 않고 최소 1달은 진료를 받아야 하잖아요. 근데 난 지금 당장 휴직이 필요하고.

결국엔 월급을 깎고 어떻게 해서 2차 병원에 전화하니까 한 달 뒤에 진료를 잡을 수 있는 거에요. 나는 당장 병원이 필요한데… 어쨌든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병원으로 갔는데, 진단서가 필요하다 하니까 검사가 필요한데 검사 결과가 또 한 2주 뒤에 나온다는 식으로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어요. 제가 휴직을 12월 말에 했으니까 한 2달 정도 걸렸는데, 그 과정도 너무 힘들었어요. 결국 휴직에 성공하고 바로 본가로 내려갔어요.

제 친구는 처음에는 좀 괜찮은 것처럼 보였어요. 근데 그 친구는 '나는 안 괜찮을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저는 구조활동을 했는데 친구는 목격자 입장이니까. '옆에서 재영이가 힘들어 하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보여서, 제가 '너도 사실 안 괜찮다, 이거는 너도 피해자다'라고 했고 그 친구도 휴직을 했어요."

마음의 이유를 넘겨짚던 말들

 지난 2022년 11월 1일 오후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화와 메모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 2022년 11월 1일 오후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화와 메모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희훈

정원: "회사에서 참사 이후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반응들은 혹시 있으셨어요?"

재영: "'네가 이태원 일도 있겠지만 일하기 싫어서 지금 이러는 거다' 이런 것들. 제가 힘든 거를 거짓말처럼 치부하고. 근데 제가 스스로 그런 말들을 진실로 받아들여 버리는 과정이 있었고, 저 스스로도 부정을 했던 것 같아요. '진짜인가'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런 식의 얘기를 들으니까 더욱 '다른 사람들한테 (참사 경험에 대해서) 말 못하겠다'는 것도 생겼나 싶기도 해요.

저는 그 발언이 잘못됐다는 것도 굉장히 나중에 알았기 때문에... 글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가 뭐라도 말할 수 있었을까요? 모르겠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약해져 있던 시기였어서. 근데 제가 10월이 될 때마다 힘들다고 했는데, 그때 들었던 말이 뇌리에 박혀버려서 그런 것 같아요. 10월이 되었는데 갑자기 심리적으로 힘들어지고 위축이 되면, '너 이태원 일 핑계로 지금 이러는 거야'라고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되니까요. 그 발언이 잘못됐다는 걸 아는데,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을 검열하고, 그때 받았던 가스라이팅이 또 시작될까 봐 좀 두려운 것 같아요."

정원: "아직도 그 말이 재영 씨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재영: "그런가 봐요. 사실 그때 사내에서 힘들어했었던 구체적인 일들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들었던 그 말만은 죽을 때까지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 생각하지 않고 싶어도 10월이 되면 자연히 떠오를 것 같아요."

정원:"참사에 대한 폭력적인 사고가 응축된 말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참사 트라우마를 개인의 탓으로 축소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그리고 회사에 있는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끌어가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아주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 같고요."

재영: "사실 저는 (이태원 참사 이후로) 이태원 관련해서나, 아니면 다른 사회적 참사나 재난 소식을 잘 못 봐요. 이태원 이후부터는 너무 다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너무 내 일처럼 느껴지고, 거기 있던 다른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떨까, 그런 게 너무 사무치게 다가왔어요. 그런 게 다시 조금 무뎌지나라고 생각하다가, 이번에 소방대원분 소식 들었을 때 이 일 때문에 또 한 명이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분도 사실 이 사회가, 이 세상이 그렇게 뒀나?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사실 참사 직후에 일부러 소식을 피했던 기간을 좀 지나고 나서 '이러면 안 되지. 다 찾아봐야지. 지금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해서 그 시기에는 엄청 찾아봤어요. 그러다가 너무 힘들면 적당히 타협해서 보이면 보고, 그걸 반복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진짜 다 찾아보고 진짜 내 일처럼 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죄책감이 있긴 해요. 어떤 죄책감이냐면, 제가 거기에 있었잖아요. 거기 있었고, 힘들었고, 병원도 다녔고, 휴직도 하고, 사람들한테 그렇게 힘들다고 한 주제에 사실 그 일에 대해 잘 몰라요. 그런 게 죄책감이 아닐까 싶어요. 제 마음 안에서 갈등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남들처럼 평범하게 보통의 인간으로 살고 싶다' 하는 마음과, '나도 거기 있었던 피해자니까 좀 더 알아보고 힘을 보탤 수 있는 게 있으면 찾아서 행동하자' 하는 마음이 계속 대립되는 것 같아요. 그 무게가 상당히 큰가 봐요. 둘 다."

정원: "그 일을 겪었는데 잘 알고 있지 못함에 대한 마음이 있으신 거지요. 1주기와 2주기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어요?"

재영: "1주기 때는 친구들한테 '추모 행사 같이 가줄 수 있어?' 해서 다 모여서 같이 있어줬거든요. 관련 다큐도 찾아서 보고, 책들이 1주기 때 많이 나와서 독서 모임에서 같이 읽고. 그렇게 하는 게 제 짐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제는 모두에게 이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타이밍이 1주기였던 것 같아서 그렇게 크게 보냈었어요. 그런데 2주기 때는 개인적으로 바빠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지나갔던 것 같아요. 1주기 때는 그 1주기를 위해서 한 달을 다 보냈던 것 같거든요. 근데 2주기 때는 오히려 '그때 일정을 뺄 수 있을까?', '빼면 추모제 갈까?' 생각만 하다가 갑자기 지나가 버려서. 오히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아 버려서.

그런데 저는 2주기가 오기 전까지는 10월이 오는 게 너무 두려웠었는데, 왜냐면은 1주기 때도 너무 힘들었어서요. 시기적인 것도 있고 날씨도 딱 바뀌는 시점이니까, 저도 모르게 힘든 게 물리적으로 오나 봐요. 사실 지금도 10월이 두렵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10월이 싫어지는 게 저는 싫거든요."

정원: "10월이라는 시간이 싫어지는 게요?"

재영: "네. 사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서도, 그렇게 또 한번 무기력하고 또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계속 느끼기는 싫어요, 정말. 그런데 그게 제 욕심에 싫은 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태원도 다시 축제의 장으로 바꾸자, 언제까지고 이태원이 추모의 공간으로만 있을 수는 없다, 하는 움직임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걸 바꾸거나 힘을 보태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사실 작년처럼 그냥저냥 넘어가도 되는지. 고민과 대립이 계속 있는 상태인 것 같아요."

정원: "어렵네요. 1주기는 크게 보냈고 2주기는 지나가듯이 보냈다면 3주기는 어떻게 보내야 될지."

재영: "그렇죠. 그게 3주기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있는데 그걸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앞으로도 이 감정이 점점 옅어져서 없어지나? 그럼 안 될 것 같은데, 이런 마음.

1주기 때 제가 유가족분들이 계시는 북토크에 갔다고 했잖아요. 그때 책에서도 제가 처음 안 사실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저는 제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였는데, 사실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런 걸 하나도 모르는데 내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게 맞나? 이런 마음이었어요.

이건 한 사람만이 슬픈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걸 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려를 해야 된다. 내 말을 아무리 하고 싶다고 해도 내 말이 실수가 될 수도 있고, 사실 틀린 걸 수도 있고, 그래서 좀 찾아보려고 했던 것도 같아요. 그리고 내가 억울해하고 슬퍼하는 게 맞는 건지, 종합적으로 봤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올바른지 그런 거를 좀 알고 싶어서."

민애: "그런 물음표들을 시작으로 계속 찾아보았을 때 답은 좀 찾게 되셨나요?"

재영: "생각보다 정말, 정말 많은 기억들이 겹쳐져 있구나, 이런… 그리고 너무, 뭐라고 해야 되지? 너무 겹겹이 쌓여있는 슬픔인 거예요. 이 사건이. 해소가 됐을까요?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도 해소가 안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뭔가 제가 참사에 대한 걸 찾아봤던 게 '같이 슬퍼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모르고 지나친 게 너무 많았다고 했던 게, 사실 그 당시에 알았다면 내가 같이 더 슬퍼하고 같이 더 연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내가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그것들을 다 모르고 지나쳤구나 싶어서요. 사실 우리가 다 같은 일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건데."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도 실립니다.
#1029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이태원 #핼러윈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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