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5.11.04 15:01수정 2025.11.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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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카시 부인 전화를 받았다. 오사카행 신칸센을 자기가 예매해 주겠단다. 그녀는 내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 해결해주는 수호천사다. 차비는 왕복 3만엔이 넘는 금액이다. 내 3개월 방세에 해당한다. 교통비 한번 어마어마하네... 일본 공공요금이 비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 어쩌겠나. 오사카까지 시험을 치러 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걸.

▲ 어렸을 때부터 하루미씨 지도를 받고 있는 고토쨩 자태가 제법 유려해졌다.
유신준
예매표가 왔다. 새벽 6시 39분 구루메역 출발. 대중교통도 없는 시간에다가 자동차로 30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구루메 역까지는 어떻게 가야하나? 시골에서 차가 없으면 사는데 어려움이 많다. 평소 다져놓은 친분의 두께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할배에게 쫒아갔다. 여차저차해서 구루메역에 새벽에 가야 하는데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잊을 수 있으니 전날 밤에 다시 얘기해 달란다. 당일날 새벽에 자기를 깨워주면 데려다 주겠단다.
고마우셔라. 살면서 어지간하면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어쩔 수 없다. 당일날 신칸센을 타지 못하면 시험장은 구경도 못한다. 지금까지 온 정성으로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된다. 거사를 앞둔 나에게 오사카까지 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초 특급 프로젝트다. 용의주도하고 주도면밀한 마스터 플랜을 짜둬야 한다.
당일 동선을 점검하다보니 걱정이 하나 더 생겼다. 할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다. 할배는 움직이는 종합병원 급이다. 어떤 때는 한 달에 두 번이나 구급차를 부른 적도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예비운전사를 떠올려야 했다.
내가 아쉬운 소리를 쉽게 꺼낼 사람이 하루미씨 밖에 더 있나. 그녀의 전통무용 강습실로 갔다. 아담한 플로어에선 5명이 지도를 받고 있는 중이다. 옆집이지만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사는 하루미씨가 깜짝 반가워한다. 거기 앉아서 춤구경 좀 해 봐. 중후한 남자 가수의 호소력짙은 목소리가 실내를 감돌고 있다. 전통 춤곡으로 유명한 엔카다. 선곡은 훌륭하군.
나는 그녀들 정기 발표회 때마다 수년간 사진을 찍어 준 전속 사진사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서 수 없는 춤사위를 봤다. 그녀들의 전통 춤에 대해서는 좀 안다. 곡도 훌륭하고 곡에 어울리게 춤사위도 아름답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미씨 지도를 받고 있는 고토쨩 자태가 제법 유려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그녀의 사진을 찍어 왔는데 벌써 중 2란다.
정면을 향한 앳띤 얼굴이 미동도 없다. 손끝은 음악을 따라 흐르다가 정확한 박자에서 멈추었고, 스텝에 맞춰 살짝 발 뒤꿈치가 올라간다. 동작 하나하나마다 그녀가 얼마나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보인다. 한껏 박자에 온몸을 실은 춤사위는 수백 번 연습한 흔적이 유감없이 묻어난다. 남자나이 60이 넘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들이 많아진다.
두 팀씩이나 제자들 춤구경을 마친 후 나는 어렵게 본론을 꺼냈다. "내일 오사카에서 시험이라 반드시 가야 하는데 할배가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예비로 부탁해 두는 거예요." "흐흠 그러니까 내가 보험이라는 거지? 알았어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날 깨워. 깨워주면 데려다 줄게. 당일날 돌아오면 쿠사노까지 들어오는 차는 있나?" 그녀답게 돌아오는 차편까지 걱정해준다. 출중한 배려다.
구루메역 도착시간이 밤 8시40분이니 대중교통편은 끊어진 후일 것이다. 새벽에 구루메 역까지 가는 것이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 부탁하지만 돌아오는 차편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다. 시험 이후 일은 전혀 걱정을 안 한다. 지금 모든 관심은 오로지 시험장에 가는 일에만 집중 돼 있다. 하루미씨에게 보험까지 들어뒀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어떻게 얻은 시험 기회인데...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전날 시험 준비모임이 다시 모였다. 3차 최종 점검인 셈이다. 오사카까지 작품을 무사히 운반할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아카시 부인이 카트를 준비해 가져왔다.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무엇이든 알아서 척척 해준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초특급 배려다. 수호천사가 없었으면 나 혼자서 시험은 꿈도 못꿀 뻔 했다.

▲ 작품 식재 배치도를 작성하면서 최종 후보가 바뀌는 이변이 발생했다.
유신준
실기작품 2점은 순조로운 편이다. 나는 그것들을 생긴 모양에 따라 가로공주와 세로왕자라 이름지어 구분했다. 가로공주는 옆으로 퍼진데다 너무 일찍부터 꽃이 펴 버려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날씬한 세로왕자를 잘 키워서 쓸 만한 작품을 만들어 시험장에 가져가리라. 공주는 대충 물만 주고 왕자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다. 시험 전날 시험본부에 제출할 작품 식재 배치도를 작성하면서 최종 후보가 바뀌는 이변이 발생했다.
개화 시기를 늦춰 보려고 첫 봉오리들을 전부 잘라준 것이 화근이었다. 세로왕자는 화려하게 꽃을 달고 있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겨우 빈약한 봉오리만 몇 개 달고 있었다. 조연을 맡고있는 알테르난테라도 생육이 불량해 전체 균형까지 무너진 상태다. 활력제를 몇 번 뿌려 봤지만 의도대로 자라주지 않았다.
새옹지마라는 격언은 꽃들에게도 적용되나 보다. 세상 모든 일들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거다. 기막힌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정성을 듬뿍 들였는데 그게 독이 되어 실패했다. 사람과 꽃과 날씨, 3박자가 제대로 맞아야 작품이 탄생한다. 막판에 세로왕자가 간택에서 탈락하는 걸 보며 깨달았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을 이기지 못한다. 자연은 언제나 사람보다 낫다. 큰 경험이었다.
준비한 박스에 그동안 방치 수준이었던 가로공주를 손질해 넣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르니 비닐까지 씌워 정성껏 포장을 마쳤다. 고명딸 시집 보내는 기분이다. 어딘가로 바쁘게 전화하던 고가 선생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내일 아는 마스터에게 오사카 시내 이동을 부탁해 뒀단다. 브라보!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응시 때부터 오랫동안 가슴을 눌러오던 걱정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마스터 고가 선생 인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내일 오사카행이다. 선배들 도움을 받으면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마당발 고가 선생 덕분에 시내이동 걱정꺼리까지 없어졌다. 내일 새벽까지 아무 일없이 신칸센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진인사 대천명.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순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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