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심리치료는 왜 경제적으로 옳은가> 표지 국내에 번역 출간된 영국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어드와 임상심리학자 데이비드 M. 클라크의 책 (2014)의 제목은 <심리치료는 왜 경제적으로 옳은가>이다.
아몬드
역사학자 줄스 에번스(Jules Evans)는 IAPT가 행복을 통계와 효율로 환원한 '산업화된 스토아주의(Industrialized Stoicism)'였다는 표현을 썼다. "감정은 훈련될 수 있다"는 명제로 개인의 고통을 국가의 회계항목으로 바꾼 프로그램, 즉 '대중 정서의 관리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파르하드 달랄(Farhad Dalal)은 한발 더 나아가, 이 모델이 행복을 도덕적 의무로 규정하는 공리주의적 국가의 기술이라고 비판했다. "당신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사고 통제의 심리학', 불행을 개인의 인지 오류로 규정해 사회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통치 담론이라 썼다. 국가가 행복을 표준화하고, CBT는 그 표준을 내면화시키는 정신적 산업의 기초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독립 평가와 학계 분석들은 IAPT가 실제 회복률, 재발률, 탈락률 등에서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음을 폭로했다. 실제 회복률은 보고된 수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치료 종료 후 재발률이 높았으며, 중증 환자와 복합적 삶의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애초에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치료자는 평가 점수와 회복률에 얽매인 산업 노동자가, 환자는 데이터 단위가 되었다. 2019년 출간된 책 <돌봄의 산업화(The Industrialisation of Care)>(Catherine Jackson & Rosemary Rizq, 2019)는 IAPT가 "치유를 생산성의 언어로 치환한 제도"라며, 관계를 데이터로, 돌봄을 성과로 바꾸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IAPT는 섭식장애를 비롯한 중증·복합 정신질환은 별도의 전문 치료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짧은 회기 인지행동요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공식 가이드라인에서도 '섭식장애·성격장애·중증 정신질환은 IAPT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은 이마저도 없다. 정부 문서 어디에도 섭식장애의 존재나 특수성이 언급되지 않으며, 관련 전문 인력이나 치료 체계에 대한 고려도 전무하다. '국민 마음건강 증진'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고통을 단일한 프로그램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행정적 확신의 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구조를 내부에서 가장 철저히 해부한 인물이 미국 정신분석가 조너선 셰들러(Jonathan Shedler)다. 그는 논문 <Where Is the Evidence for 'Evidence-Based' Therapy?>(2018) 등의 저술을 통해, 의학에서 '근거 기반 치료(evidence-based practice)'는 본래 연구 증거 + 임상 전문성 + 환자 선호의 통합을 뜻했지만, 정신치료에서는 단기 매뉴얼형 CBT를 합리화하는 마케팅 용어로 전락한 지 오래라 지적한다. 연구는 실제 환자의 80%를 배제한 선택적 샘플로 이뤄지고, 완전 회복률은 20%대에 불과하며, 긍정적 결과만 출판되는 출판 편향이 치료 효과를 75%까지 부풀린다. 셰들러는 "근거 기반"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 과학은 약화되고 행정 편의가 강화된다고 결론짓는다.
한국의 정책은 이 지점에서 가장 위험하다. CBT와 디지털 멘탈 헬스의 도구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정책의 유일한 언어로 만들면 모든 고통은 측정 가능한 '개인 태도의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구조적 불평등, 관계의 파탄, 돌봄 체계의 결여는 무마되고, 남는 것은 "생각을 고치면 나아질 수 있다"는 얄팍한 행정적 문장뿐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부재한 것은 '당사자의 지식(lived expertise)'이다. IAPT의 설계자도, 한국의 정책 입안자도 정신질환 당사자와 그 가족의 경험을 정책적 자산으로 삼지 않았다. 정책은 '근거'와 '효율'을 말하지만, 사람 없는 증거, 경험 없는 정책이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 쓸모없는 구호물자처럼 던져져온 셈이다.

▲섭식장애 당사자 활동가 호프 버고(오른쪽)와 영국 하원의원 베라 홉하우스 "체중계를 버려라(Dump the Scales)" 캠페인을 처음 단독으로 시작해 현재는 동명의 글로벌 비영리단체를 이끌고 있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활동가 호프 버고(Hope Virgo)가 섭식장애를 위한 초당적 의원모임(APPG) 의장을 맡고 있는 하원의원 베라 홉하우스(Wera Hobhouse)와 함께 캠페인 슬로건이 적힌 카드를 들고 있다.
Wera Hobhouse

▲최근 발표된 영국 섭식장애 APPG 보고서 표지 2025년 10월 영국 의회에서 발간된 보고서로, 섭식장애 관련 초당적 의원단체(APPG on Eating Disorders)와 당사자 단체 'Dump the Scales'가 공동 집필했다. 영국 내 섭식장애 사망 사례를 조사하고, 국가 차원의 섭식장애 예방 대책 및 정책 개선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Dump the Scales
'막을 수 있었던 죽음'에 대한 국가적 조사 요구
영국은 이 '효율의 언어'가 어디로 귀결되는지를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수년 간의 잇따른 사망 사건을 계기로 2019년 결성된 섭식장애 대책 초당적 의원단체(APPG)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단체 'Dump the Scales'(https://www.dumpthescales.org/)와 함께 두 차례의 국회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중심에는 'Dumpt the Scales'의 창립자 호프 버고(Hope Virgo)가 있다.
그는 자신의 섭식장애 경험을 토대로 "체중계의 숫자가 한 사람의 치료 자격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0년 넘게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끈질긴 캠페인을 이어왔다. APPG를 이끌며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 활동해 온 노동당 의원 리처드 퀴글리(Richard Quigley) 역시 딸이 섭식장애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경험을 지닌 가족 당사자다.
두 단체는 2023년 발표한 첫 보고서 <The Right to Health: People with Eating Disorders Are Being Failed>에서부터 단순한 호소가 아닌, 체계적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개혁안이 담겼다.
● 1차 의료진·교사·간호사 등 전방 인력의 의무 교육 제도화
● 고위험군 대상 정기 건강 스크리닝 및 조기 발견 시스템 구축
● 비만 정책과 섭식장애 정책의 메시지 충돌 방지를 위한 공공 캠페인 개선
● 아동·성인 섭식장애 서비스 모두에 대한 추가·전용 예산 확보
● 간병인·가족에 대한 교육과 지원 강화
● 섭식장애로 인한 모든 사망 사건에 대한 기밀조사 제도 도입
● 각 NHS Trust와 Health Board에 외부 비상무 감시이사(non-executive director) 배치
● 연구비 확대 및 근거 축적을 위한 국가 차원의 데이터 구축
올 10월 발표된 두 번째 보고서 <An Inquiry into the Prevention of Eating Disorder Deaths>는 첫 보고서에서 확립한 "훈련–예산–데이터–감독"의 4대 축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그 실행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 국가 전략 수립: 보건·교육·복지 부처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책임 구조와 성과 지표
● 데이터 인프라: 퇴원 BMI, 사망률, 대기 기간, 재발률 등을 중앙에서 집계·공개
● 전국적 훈련 체계: 1차 의료, 응급실, 학교까지 포함하는 전문 교육 및 감독
● 품질 및 안전 기준: 섭식장애 응급대응 국가 표준지침(2022년) 의무화, 퇴원 하한선 설정, 외부 비상무 감시이사 제도
● 치료 접근의 형평성 보장: BMI 기준 폐지, 폭식장애(BED) 등 비정형 섭식장애 포함
● 가족 참여권: 치료 결정 및 퇴원·사후 관리 과정에서 가족의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
● 섭식장애로 인한 사망 사례 기밀조사: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대상으로 한 독립적 조사와 연례 보고 공개

▲지난해 4월 런던에서 있었던 'Dump the Scales' 행진 호프 버고가 행진 참가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Hope Virgo
당사자 경험이 만든 정책 지성
이 두 보고서의 체계적이고 정밀한 내용은 의원이나 관료가 혼자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그 출발점은 경험 그 자체였다. 호프 버고, 제임스 다운스(James Downs) 등 섭식장애 경험을 지닌 활동가 및 연구자들의 기여가 컸고, 수년 간의 진정서·증언·언론 활동을 통해 수많은 당사자와 가족들은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 어디서 사람이 죽어가는지를 정확히 기록했다. 그 기록이 곧 정책의 지도가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정책적 전문가(lived expert)로 자리 잡았다.
보고서가 주창한 내용들 중 상당 부분은 호주의 리더십에 기반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호주는 '2023–2033년 국가 섭식장애 전략(National Eating Disorders Strategy 2023–2033)'을 통해 전용 의료 수가(MBS 코드), 조기개입(FREED) 모델, 전국적 훈련 및 평가 루프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정신건강 정책 전반에 '당사자 전문성(lived expertise)' 반영을 제도화한 최초의 국가다.
호주의 NEDC(National Eating Disorders Collaboration) 와 InsideOut Institute는 기획 단계부터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자문단(Living/Lived Experience Advisory Group)과 협력하며, 진료지침·훈련 프로그램·연구과제까지 모든 결정 과정에 '소비자(consumer)'로서의 경험자 참여를 보장한다. 이러한 '소비자 운동(consumer movement)'은 1990년대부터 호주 정신보건 개혁의 중심축이 되어,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정책의 동반 설계자(co-designer)로서 당사자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확립해왔다.
이처럼 호주는 윤리적 의지를 행정적 구조로 번역하는 방법, 다시 말해 당사자 경험을 지식으로, 지식을 정책으로 전환하는 언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 영국의 두 번째 APPG 보고서가 보여주는 '정책 설계의 문법'은, 바로 이 호주 모델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호주 NEDC 디렉터 Sarah Trobe와의 화상 인터뷰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박지니는 2024년 12월 15일 호주 NEDC 디렉터 Sarah Trobe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내용을 블로그에 게재했다.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nedc-sarah-trobe-20241215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한국이 배워야 할 것
한국의 정신건강 정책은 여전히 슬로건에 머물러 있다. 조기 발견, 조기 진단이 강조되지만, 발견된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의뢰되어 연속성 있는 치료와 돌봄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설계는 없다. 상담 바우처와 디지털 멘탈헬스 프로그램이 난립하지만 전문 인력 훈련, 데이터 인프라, 성과 감독은 비어 있다. 영국의 보고서가 가르쳐주는 것은 연민이 아닌 '구조(構造)'다. 정책이 배워야 할 것은 새로운 앱이나 기술이 아니라, 변화를 실행할 수 있는 체계적 문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출발점은 학문이나 행정이 아니라 당사자 경험 그 자체다.
진짜 변화는 "고통을 관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지식의 형태로 인정하는 순간 시작된다. 경험을 타자화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시스템은 결코 배우지 못한다. 이제 우리의 정신건강 정책도 묻혀 있던 이 지식을 드디어 학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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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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