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 들어가 풍물패 활동을 하며 불의한 세상에 맞서면서 교사의 꿈과는 멀어졌다.
공군자 제공
그렇게 문예운동에 매진하다가 4학년이 되었다. 그해 1991년을 잊을 수 없다.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폭행으로 사망한 후 전국에서 정부 규탄 집회가 잇따랐다. 4월 29일 전남대학교에서도 결의대회가 열렸고, 5.18광장에서 1학년 박승희 학생이 "강경대를 살려내라"고 외치면서 분신을 한다. 군자씨도 그 자리에서 불길에 휩싸인 승희의 모습을 보았다. 그 뒤,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등 분신으로 항거하는 이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광주에선 한 달이 넘도록 장례식이 계속됐다.
그 역시 학교 앞에 있던 자취방에 갈 새도 없이 뛰어다녔다. 후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울분에 몸을 사리지 않던 나날이었다. 결국 분신 정국이 끝나고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시골집에 가서 한 달간 요양까지 했다. 당시 그는 졸업을 앞두고 생산현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체력으론 현장에서 버티기 어렵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사무직으로 방향을 바꾼다.
IMF의 비극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봐
서울에 사는 큰오빠네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겨 공무원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4년 동안 담 쌓고 살았던 공부가 낯설었지만 꼭 공무원이 되겠다는 의지로 고등학교 때 보던 수학의 정석을 다시 펼치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그 결과, 1년 만에 국가직 공무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하면 가고 싶은 부처를 써서 내요. 1순위를 고용노동부로 썼죠. 노동자들 편에서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2순위는 대학 때 문예활동을 했으니 문화관광부를 희망했고요."
다행히 가장 원했던 고용노동부에 배치돼 1994년 3월, 첫출근을 했다. 직무교육을 받을 때, 선임자는 업무를 가르치기 전 당부부터 했다.
"노동부는 주로 다치거나 죽거나 임금을 못 받거나 해고된 분들이 오는 곳이니까 특히 언행에 신경 많이 써야 해요."
일을 할수록 그 의미를 깨달았다. 기대와 달리 공무원이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큰 비나 눈이 올 때가 아니라 관할지역 사업장에서 분규가 벌어지면 비상근무를 해요. 집회 하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몰래 살피고 주말에도 나와서 동향보고를 하죠. 또, 근로감독관으로 일할 때는 근로자성 인정을 못 받거나 불이익을 받아 찾아온 민원인에게 '억울하시겠지만 법이 현재 이래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많이 들었죠."
한계는 명확했지만 악에 받쳐 온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최대한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다. 야근이 일상이던 노동부 공무원 시절을 회상하던 그가 한 장면을 떠올렸다. 업무에 치여 살다가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고용보험 부서로 옮긴 직후였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좀 여유 있는 곳으로 갔던 건데 IMF가 터진 거예요. 사람들이 실업급여를 받으러 오는데 내 자리에서부터 줄이 꼬불꼬불 계속해서 계단 밑까지 이어졌어요. 사람들에 막혀서 화장실에 가기도 힘들었죠."
IMF의 비극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때는 오가는 정이 있었다. 친절하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민원인들은 집에서 부침개를 해오고, 만두를 쪄오기도 했다. 힘들 때 보라고 취미로 찍은 꽃 사진들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한참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가 "IMF 때 일자리를 잃었던 그 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또, 산재승인을 받지 못한 산재사고 유가족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라며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 노동자의 편에서 일할 걸 기대하면서 고용노동부 공무원이 됐지만 현실은 억울한 노동자들에게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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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양심을 실천했다고 해고
그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자마자 한 일이 있다. 바로 승희의 영정 앞에서 했던 결심을 이어갈 활동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내가 의도한다고 다 되지도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연결되는 게 있어요." 그의 말대로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다. 약을 사러 가던 오빠네 동네 약국에 놓인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강동송파시민회라는 시민단체를 소개하는 홍보지였다. 곧장 전화를 걸어 풍물패 모임날 찾아갔다. 한번 쳐보라는 권유에 장구채를 놀리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첫날부터 몇 년을 같이한 사람인 양 모임에 스며들었다. 연락처까지 먼저 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시민회 회원이 되었다. 노동부로 발령을 받은 후에도 퇴근 후나 주말이면 당연하다는 듯 시민회 사무실로 향했다. 풍물패뿐 아니라 역사기행을 가는 나라사랑연구회 활동에 열성을 다하고 노래패도 직접 만들었다. 일이 끝나면 바삐 퇴근하는 그를 보면서 공무원 동료들은 "밥 한 번을 안 산다"고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군자씨는 말했다.
"여기 오면 나보다 다 부잔데 나가면 나보다 다 가난해요. 그래서 딴 데 가서 돈을 써요."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들 용돈 수준의 활동비를 받는 시민회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을 만날 때면 뒤풀이비를 앞서서 낼 수 있는, 꼬박꼬박 월급 받는 공무원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신변을 뒤흔드는 일을 맞고야 만다.
"둘째 출산휴가가 끝나고 복귀한 지 두 달이나 지났을까. 감사실에서 '공 감독관, 좀 봅시다' 해요. 올라갔더니 당 가입 조사가 다 끝나고 미행까지 했더라고요."
2002년 창립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2004년 3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을 하면서 그 파장이 커지던 차였다. 정부로선 공무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탐탁지 않았을 터. 공격의 칼날이 가장 약한 고리로 드리워졌다. "고용노동부는 그때 노조도 없고 별로 힘이 없었거든요."
민주노동당 당우이던 공군자씨는 2005년 4월 7일, '공무원의 정치 활동 금지 위반'으로 해임된다. '정치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첫 번째 공무원이 되었다. 선거 때만 되면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단체장들도 많은 상황에서 후원회원 격인 당우로 이름을 올렸다고 해고된 억울함을 국회 등을 찾아 호소하기도 했다. 1년 남짓 행정소송을 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도 했다. 유독 여름이면 더 덥고, 겨울이면 더 춥게 느껴지던 청와대 앞이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고마운 사람들도 많다.
"함께 일한 직원들이 자필로 탄원서를 엄청 많이 써줬어요. 과장님들도 당 활동을 업무에 연결시킨 적 없고 내부에서 전혀 문제가 없던 직원이었다고 하셨죠. 1인 시위할 때는 청와대 앞에서 경비 서는 경찰들이 먼저 말도 걸고 잘해줬어요. 잘 싸워서 경찰도 노동조합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도 했죠."
공무원노조와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1인 시위에 함께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후원회원이 돼 주기도 했다. 비번 날 와서 영양제를 챙겨준 간호사 후배까지. 많은 이들의 응원이 있어서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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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을 믿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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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왜 가난할까" 그가 찾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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