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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말고, 이젠 '선배시민'이라고 불러주세요

[땀의 열전] 공무원에서 활동가로, 공군자 씨 ②

등록 2025.11.03 15:40수정 2025.11.0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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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왜 가난할까" 그가 찾은 답 https://omn.kr/2fvrd

갑작스런 해고로 공군자씨는 공무원에서 활동가로 신분이 바뀌었다. 2004년 출범한 노동단체인 서울노동광장에서 상근을 하면서 노동운동사, 노동인권, 조직활동 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뭘 알려주는 게 재미있어서" 선생님이 되고 싶던 어린 시절의 장래희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같이 상근하던 활동가들은 교육 전에 체할까봐 밥을 안 먹더라고요. 저는 배고프면 말을 못한다고 첫 강의 전에도 짜장면 한 그릇 먹고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넌 '교육이 체질'이라고 말했죠."

활동을 하면 할수록 "내가 교육 하고 조직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은 그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스스로가 권위적이란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내가 옳아. 우리만 옳아'라는 전제 하에 다른 사람들한테 그 생각을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인권은 일방이 없고 쌍방"이라는 사실부터 새롭게 배웠다. 교육을 하러 가서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참여자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임을 매순간 되새겼다.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공군자는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접하면서 자신이 권위적이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공군자는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접하면서 자신이 권위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공군자 제공

"예전엔 청소년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으니까 내가 뭔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접하고부터는 나이나 경험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그 뒤로는 청소년, 1차로는 우리집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뀌었어요."


'아이들의 삶은 아이들의 것이니 내가 강제하면 안 된다'는 양육관을 세울 수 있었다. 덕분에 두 아이는 초중고 내내 "공부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즐겁게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독립심과 자립심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는 "내가 그들 인생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까 본인들이 알아서 자기 계획을 세우더라"며 웃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필요한 물건을 골라놓으면 그가 주문을 했다. 학원도 아이들이 보내달라고 하면 가서 결제만 해서 학원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컸던 건 딸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다. 그는 조언했다.


"자퇴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여전히 존재해. 네가 그걸 어떻게 극복해갈지 먼저 자퇴해본 선배나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고 결정하렴."

딸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나눴고, "더 이상의 학교생활은 별 의미가 없어. 엄마, 나 자퇴할래"라고 결론을 알려왔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왜 말리지 않느냐고 노발대발 하는 함께 사는 시부모님과 남편을 설득했다.

"싫다는 애를 강제로 다니게 해봐야 학교 가서 잠만 자요. 그렇게 시간만 버리는 것보다 그 시간에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게 요즘 애들한테는 훨씬 좋아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친구 관계도 잘 맺어온 딸을 알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결국 딸은 고등학교를 그만뒀고, 진로를 모색한 끝에 3년 후 미대생이 되었다. 둘째가 고등학생이 되자 그가 물었다. "너도 자퇴할 거니?" 아들이 답했다. "아니야, 엄마. 내 적성에는 학교 다니는 게 맞아." 그 말에 "그래, 그럼 잘 다녀." 한 마디 하는 걸로 아들의 학교생활 참견을 마쳤다.

부부 사이도 상당히 독립적이다. 그는 여러 활동을 하느라 주말도 없이 하루를 쪼개 쓰며 살고, 남편은 노무사인 직업이 부업처럼 느껴질 정도로 산악인에 가깝게 산다. 지금은 체력에 부쳐 자제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한두 번씩 해발 8000미터가 넘는 산들을 등정했다. 국내 산은 여전히 주말마다 오른다. 암벽등반도 하고 겨울이면 산악스키도 탄다.

신혼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치열한 토론을 벌여 두 사람이 내린 결론 덕분이다. 나쁜 일만 아니면 서로 하고자 하는 일은 존중하고 인정하자. 그 즈음, 남편은 등산학교에 가게 됐고, 그 뒤론 산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은 남편의 지인들이 묻는단다. 결혼한 거 맞느냐고.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느냐고.

지칠 때 와서 힘 받아 갔던 곳이 있었기에

활동가 공군자의 고향과도 같던 서울노동광장은 2011년 말 이춘자 대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2012년 진보정당이 분열되면서 회원들도 큰 영향을 받았다. 또, 2010년 전후로 크게 늘고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만날 접점도 찾던 중이었다. 남은 상근자들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을 모색했다. 서울 영등포역 근처에 있던 사무실을 카페로 바꾸고, 지역에서 노동자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곳이 바로 '카페 봄봄'이다.

 노동교육단체이던 서울노동광장은 사무실을 카페로 바꾼 후 지역의 노동자들을 만나왔다.
노동교육단체이던 서울노동광장은 사무실을 카페로 바꾼 후 지역의 노동자들을 만나왔다. 공군자 제공

카페 봄봄을 매개로 다양한 사업들을 펼쳤다. '공감밥상'이란 이름 아래 택배기사, 라이더, 요양보호사 등 여러 영역의 방문노동자들이 만나 서로의 노동이야기를 들려줬다. 지역주민,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스트레칭교실, 우쿨렐레 강좌도 열었다. 그러면서 영등포 지역에서 일하는 베이비시터, 가사관리사,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지원사들과 관계를 맺고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예전엔 회원들이 대부분 정규직이어서 현장에서 뭔가를 시도하기가 훨씬 쉬웠어요. 그런데 지역에서 만나는 분들은 대부분 개별로 노동하는 분들이었죠. 같은 시간에 모으는 것 자체가 힘든 거예요.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맞춰가는 연습부터 했지요."

공간 자체가 지역 속에 스며들기 위해 카페 앞에 작은 텃밭을 꾸며 방울토마토와 고추, 상추도 심었다. 동네 주민들이 거름 줄 시기를 참견하고, 열매를 따 먹기도 하면서 서로 친해졌다. 서울노동광장 회원들과 주민들이 함께 골목에 벽화도 그렸다.

"주변 상인들과도 많이 가까워져서 코로나 때 '어떻게 견디고 있어, 괜찮아?' 하면서 걱정들을 굉장히 많이 해주셨어요."

그는 서울노동광장에서 일하면서 외부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특히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의 마지막 노동위원장이자 통합진보당 서울시당의 첫 노동위원장이었던 기록은 꼭 남기고 싶단다. 노동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사를 비롯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전에 양재동에 있는 한 빌딩 구내식당에서 3개월여 일한 경험이 학교 조리사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정말 힘들더라고요. 진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잠깐도 쉴 틈이 없어요. 조리사들이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정신없이 일하는지를 그때 알았죠."

미래를 내다보듯 활동 중 번아웃이 온 그에게 "가서 어깨에 힘 좀 빼고 와라"며 취직을 권했던 고 이춘자 대표에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종종 떠오르는 이춘자 대표가 돌연히 운명했을 때는 일상생활이 쉽지 않았다. 버틸 힘이 필요했던 그는 어느 순간 핸드폰 게임 속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특이한 사람들만 게임 중독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홀로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울노동광장이 언제나 팔 벌려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도 컸다. 서울노동광장이 어떤 곳인지 물었을 때 그가 한 답은 그에게도 해당됐던 것.

"광장은 회원들이 현장에서 힘들고 지칠 때 와서 편하게 밥 한 끼 나누면서 현장의 어려움을 털어내고 다시 힘 받아서 가는 곳이었어요."

'노인' 대신 '선배시민'으로서 사회권을 고민 중

현재 공군자씨는 전국요양보호사협회와 선배시민협회를 가꿔가는데 큰 애정을 쏟고 있다. 1년 전 전국요양보호사협회가 출범한 데는 그의 역할도 컸다. 10여 년 전 처음 만난 요양보호사들에게 "요양보호사란 직업을 잘 모르니 가르쳐달라"며 다가갔던 그를 요양보호사들은 활동가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선배시민협회 부협회장으로 전국을 누비고 있다. 선배시민협회는 노년을 맞이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단체이다. '노인' 대신 '선배시민'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묻자 그가 책상 위에 선을 그으면서 설명했다.

"봐봐요. 청소년, 청년, 중년 하다가 갑자기 노인이 돼요. 늙을 로(老)에 사람 인(人). 그냥 늙은 사람이야. 우리 사회가 노인을 바라보는 편견이 다 들어간 단어에요. '선배시민'은 '선배'보다 '시민'에 방점이 찍혀 있어요. 먼저 사회에 대해서 인식한 선배시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자기 권리에 대해 고민하고 후배들을 맞이하자는 의미를 담았죠."

선배시민협회 홈페이지에선 '인간은 빵과 장미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노인도 인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빵은 의식주와 같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장미는 보편복지 등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을 말해요. 결국 일자리만이 아니라 사회권으로 노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그는 노년도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문제를 지적했다. 국민연금제도가 대기업부터 적용되면서 현재 국민연금 격차가 월 20만 원에서 200만 원까지 벌어져 있단다. 노동 현장에서 연봉이 2천만 원부터 1억 원까지 벌어져 있는 그대로. 그 격차를 줄일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선배시민협회는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경기도, 진천군 등 전국 각 지자체에서 선배시민 지원 조례가 제정되면서 관련 논의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단순히 늙은 사람이 아닌 선배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뭉치고 있다.
단순히 늙은 사람이 아닌 선배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고민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뭉치고 있다. 공군자 제공

공군자는 선배시민협회를 비롯해 서울노동인권복지네트워크,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희망씨 등 여러 단체에서 직책을 맡고 있지만 활동비를 받는 곳은 없다. 방송통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출석 수업을 나가면서 받는 강사료를 비롯해 각종 교육을 다니면서 받는 강의료로 스스로의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학 때 품은 마음을 사회에 나와서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을 물었다. 그는 "한쪽에는 승희가 있고, 또 변화하지 않는 상황과 사람들 때문"이라고 답했다.

"활동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 애들 친구 가족 중에 장애인 자녀가 있는 집이 있어요. 그 가족이 '아글타글'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데 저 힘듦을 어떻게 개인이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거죠. 또, 힘들다고 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에게 '그건 네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꾸 하면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되뇌는 거죠."

그와 함께 사회의 변화를 느끼고 있기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다.

"어려서 우리 막내오빠가 아플 때는 건강보험이 없었어요. 그땐 응급실, 중환자실 가면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죠. 그런데 지금은 건강보험이 있잖아요. 적어도 아프면 기본 치료는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거죠. 이런 작은 변화들을 우리들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커요."

미리 보낸 질문지에 '활동 중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느낀 때'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술술 이야기를 이어가던 군자씨는 이 질문 앞에서 "그런 때가 있었나 잘 모르겠더라"며 생각에 빠졌다. "기본적으로 활동하면서 뭔가를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신중히 말을 고르던 그가 "기쁠 때는 사람의 변화를 느낄 때"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과 1박2일 워크숍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한 분이 나이 70 넘어서 외박을 처음 해본다고 하시더라고요. 여자라고 집 밖에 나가서 자는 걸 엄두도 못 내던 분들이 요양보호사의 권리와 국가의 시스템 변화를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처음에는 요양보호사 일을 좋은 마음에 봉사하는 거라고 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이런 변화를 느낄 때 제일 즐겁고 기뻐요."

 50대 중반이 넘는 여성 활동가가 많지 않은 현재, 공군자는 자신이 걷는 걸음걸음의 무게를 느끼며 살고 있다.
50대 중반이 넘는 여성 활동가가 많지 않은 현재, 공군자는 자신이 걷는 걸음걸음의 무게를 느끼며 살고 있다. 신정임

요즘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엔 '화이트 스페이스의 경계에 서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화이트 스페이스란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 같은 곳이다. 그곳에선 먼저 걷는 이의 발자국이 타인이 따라가는 길이 된다. 50대 중반이 넘는 여성 활동가가 많지 않은 현재, 주변에서 "이후 어떤 삶을 살지 당신이 가는 길을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화이트 스페이스의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단다.

"내가 특별히 훌륭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발짝 한 발짝을 잘 디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잠정적인 은퇴시기를 잡아 놨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번에 "아니요"라고 답했다. "은퇴는 내 삶이 끝나는 날이 되겠죠. 나이를 더 먹으면 또 그 나이대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교육조직활동가 공군자씨가 앞으로 새길 발자국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흔들릴지언정 넘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WORKER ZINE: 일과봄에도 실립니다.'땀의 열전'은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온 이들이 땀으로 엮어온 인생을 풀어냅니다.
#땀의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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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을 믿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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