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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건, '그날 왜 이태원에 갔냐'는 질책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

[누군가의 생존법 ④] 이정숙씨가 들은 유희진(가명)씨의 이야기

등록 2025.11.04 10:20수정 2025.11.0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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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랜턴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그 가운데서 느낀 삶의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폭넓게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그 모든 과정을 '생존'으로 이야기함으로써 10·29 이태원 참사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본 글에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와 당시의 경험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우울감, 불안감 등 외상 반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읽는 중이나 이후에 불안, 무기력, 두통·불면, 두근거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가족·친구에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기자말]

 그날 이태원에 있었던 희진씨는 소꿉친구를 떠나보냈다.
그날 이태원에 있었던 희진씨는 소꿉친구를 떠나보냈다. 박정원

참사 이후의 세계는 낯설다. 한 사람의 부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어지는 내 몫의 삶을 살아내야 해서 그렇다. 이태원 참사가 있던 그날 밤 희진씨는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 사이에서 들것에 실려 나가던 죽은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들. 그날 밤 희진씨가 마주한 얼굴이 너무나 앳돼 보였다는 사실이 희진씨를 슬프게 했다. 계속해서 실려 나오던 사람들 사이 어딘가 희진씨의 오랜 소꿉친구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상실을 겪은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명제를 견디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희진씨 이야기에서 나는 '안부'란 단어를 떠올렸다. 참사 이후 휘청이던 희진씨 삶을 다시 서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일상을 묻는 평범한 말들이었다. '안부(安否)'라는 한자어를 들여다보면 그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편안할 안(安)'과 '아닐 부(否)'로 이루어진 이 단어엔 상대가 편안한지 아닌지 두루 묻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상대의 일상과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마음이 깃든 말이 바로 안부다.

같은 슬픔을 겪던 오랜 친구들과 가끔 주고 받던 안부가 희진씨에겐 힘이 됐다고 한다. 희진씨와의 인터뷰는 한 사람의 회복담을 넘어서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재고하게 한다. 서로의 안녕을 묻는 작은 공동체가 한 사람에게 어떻게 위로가 되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그날, 이태원에서 본 얼굴들

정숙: "희진씨,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희진: "28살 유희진입니다. 지금은 당진 본가에서 지내고 있고요, 반갑습니다."

정숙: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수락하셨는지 궁금해요."


희진: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홍보 게시물을 보다가 정숙씨가 이런 활동을 하는 구나, 하고 처음엔 그냥 넘겼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나 올해 이태원 참사 관련해서 어떤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몰랐거든요. 정숙씨가 올려준 게시물을 보고 그제서야 알게 됐어요. 처음엔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는 게 좋지만은 않아서 더 생각하지 않았는데 먼저 연락을 주셨잖아요. 정숙씨와는 친구니까 당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알겠다고 했죠."

정숙: "부담스럽거나 마음이 힘들진 않으셨어요?"


희진: "그렇진 않았어요. 그냥 그때 이태원에 있었으니까, 그때의 분위기나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충분히 이야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태원 참사가 있고 나서 이 참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거든요. 그날 골목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정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분들이잖아요. 이런 인터뷰 작업들을 통해서 죽음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태원에서 있었던 죽음에 같이 아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정숙: "희진씨는 이태원 참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나요?"

희진: "이태원에서 매년 핼러윈 파티가 크게 열리잖아요.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핼러윈 코스튬하고 이태원에 놀러 가는 게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때 마침 언니랑 형부가 서울에 살고 있었어서 그 둘에게 같이 가자고 했죠. 당시엔 그냥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어요.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정숙: "당일 현장에 계셨던 거군요."

희진: "네. 사람이 정말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많았고 저희 셋이 인파에 휩쓸려서 계속 한 방향으로밖에 걸어가지 못했어요. 아무튼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서 들것에 사람이 실려 나오기 시작했어요. 주위 사람들도 다 '뭐지' 하고 깜짝 놀란 상황이었고... 골목에서 들것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계속 실려 나왔어요. 그 상태가 너무... 태어나서 처음 봤거든요, 죽은 사람을. 소름도 돋고 무섭고 해서 그 골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한 30명에서 40명 정도는 (죽은 사람을) 본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엔 이태원에서 마약 파티를 한다는 소문도 있었어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인가 했는데 아니었던 거죠."

정숙: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희진: "일단 제가 버스를 타고 해방촌에서 내렸을 때는 그냥 별다를 게 없었어요. 구급차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고 해방촌 쪽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으니까 저처럼 이태원으로 향하는 사람들만 주위에 있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그 T자 골목 부근에에 진입하게 됐을 때부터 사람들이 실려 나왔어요. 그때까지도 경찰 호루라기 소리 정도만 들렸고요. 처음엔 (상황을 모르고) 골목 안으로 더 들어가려다가 사람이 계속 실려 나오니까 여기 좀 위험한 것 같다, 빨리 벗어나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 골목을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빠져나온 거였죠. 대로변으로 나온 다음에서야 구급차 소리가 들리면서 구급차가 진입하는 걸 봤어요. 한남 오거리까지 걸어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고요."

그 골목에 오랜 친구가 있었다

정숙: "희진씨가 이태원에 있다는 걸 아는 친구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연락 많이 오지 않았어요?"

희진: "그랬죠. 처음에 이태원에 도착해서 쭉 둘러보면서 분장하고 춤추는 사람들 모습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촬영한, 춤추고 놀던 사람들 뒤쪽으로 (골목에 끼어 있던) 사람들이 같이 찍혀서 나왔던 거예요. 그걸 본 친구들이 다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저는 괜찮았는데, 그때 제 친구 소영이를 참사 희생자로 잃게 됐어요.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쭉 친하게 지내던 친구요. 서로 어렸을 적 비밀도 다 이야기하고, 정말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는데. 매년 코스튬하고 이태원에 놀러 가는 걸 좋아하던 친구였거든요. 참사 당일에도 거기에 있었던 거죠. 그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라 한동안 우울했었어요."

 참사 이후 추모 포스트잇이 붙은 골목 풍경
참사 이후 추모 포스트잇이 붙은 골목 풍경 이상민

정숙: "소꿉친구를 잃으셨다니... 무척 힘드셨겠어요."

희진: "저는 그날 사람들이 실려 나오는 것만 보고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몰랐거든요.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니까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때 친구가 딱 생각난 거죠. 당시에 한 일주일 정도 연락이 끊겨 있었는데 뉴스를 보고 친구가 떠올라서 연락했어요. 안 받더라고요. 그다음 날에 전화도 해보고 계속 연락했는데 다음 날 당진 본가로 내려가는 버스에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한동안 슬프게 지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친구 어머님은 밖을 거의 못 나오신다고 그랬어요."

정숙: "희진씨 친구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희진: "미용하는 친구였거든요. 꾸미고 화장하는 거 되게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고 그런 친구였어요. 서울에 있는 미용실에 취업해서 친구가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취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진짜 열심히 일 배우고 하다가 자기 삶을 좀 이렇게... 자기 시간을 보내던 중에 그렇게 돼서 너무 안타깝고 연락을 좀 더 자주 할 걸. 좀 더 챙겨줄걸. 만나자고 해서 맛있는 밥도 사주고 할 걸 너무 후회돼요.

이태원에도 미용실 직원분들이랑 같이 놀러 갔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를 포함해서 일곱 분이 놀러 갔다가 친구랑 같이 있던 동료 세 분도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중에 당진에 사시던 분도 계셔서 장례도 같은 곳에서 치렀어요."

정숙: "당시 당진시청에도 추모 공간이 마련됐던 걸로 알고 있는데 가보셨나요?"

희진: "그때 당진시청 1층에 추모 공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요. 저도 그때 한창 일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보진 못 했는데 그래도 1층에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으니까 시민들이 와서 편지도 쓰고 조문하러 많이들 오셨던 것 같아요. 당진에선 이태원 참사 희생자가 한 세 분 계셨나, 그랬던 것 같은데 당진이 워낙 좁은 지역이라 마을 전체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던 기억이 나요."

정숙: "그 당시 희진씨는 어떤 생각을 가장 자주 했나요."

희진: "일단은 저도 이태원에 있었는데 제 친구도 거기 있었잖아요. 제가 연락을 한 번 더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후회도 되고 죄책감도 들고,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충격이 덜했을 텐데 너무 가까운 친구를 잃으니까 그 참사에 더 공감되고 이입되고 하더라고요. 이후로 언제 어떻게 사고가 생길 지 모르는 거니까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겨야겠다고도 생각했고요. 너무 소중한 친구를 잃어서 다음에는 그런 후회가 남지 않게 사람들한테 좀 더 잘해야겠다, 이런 생각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말들 속에서

정숙: "희진씨께서 참사 이후 어떤 시간을 보내오셨는지 궁금해요. 참사 이후 이태원에 가보신 적이 있었는지, 가족들과 이태원 참사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은 있으셨는지."

희진: "헌화는 아직 못했어요. 아직 이태원을 가기가 무섭기도 하고요. 이후에 심리 상담을 받아볼까 생각해 보긴 했는데 병원에 찾아가 본 적은 없었고 친구 묘지에 찾아가서 들여다보고 하긴 했었어요.

이태원 참사는 사실 이야기하기 전에 주저하게 되는 게 있어요. 우리 또래들은 참사를 두고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반응이 더 일반적인 것 같은데 윗세대 어른들은 놀러 가서, 사람 많은 데 가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도 거길 가서 죽냐, 이렇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들도 자주 들었단 말이에요. 핼러윈이 우리나라 문화도 아닌데 굳이 외국의 문화를 즐긴다고 그러냐, 이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얘길 들으면 저도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지죠. 자랑도 아니고... 그래서 잘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21일 소영씨의 생일을 맞아 묘지에 다녀왔다며 희진씨가 보내온 사진
지난 21일 소영씨의 생일을 맞아 묘지에 다녀왔다며 희진씨가 보내온 사진 유희진

정숙: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길 들어보신 적 있으셨나요?"

희진: "할머니 생신 때였나, 한 번은 친척들이랑 다 같이 대화하고 있는데 삼촌이 이태원 참사 이야길 꺼내시는 거예요. 그냥 거기 왜 가서 변을 당하냐... 삼촌께 크게 소리를 내서 이야긴 못 했고 그냥 놀러 갈 수도 있지, 이렇게만 말했어요. 속으로는 어른들도 가을에 단체로 단풍 축제 구경하러 가시지 않느냐, 만약 거기서 사고가 났어도 이렇게 욕할 수 있냐고 화내긴 했지만요. 엄마한테는 그날 이태원에 다녀왔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직 아빠는 모르시거든요. 아마 지금 말씀드리면 거길 왜 갔었냐고, 이 정도로만 끝나겠지만 저희 아빠는 안전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혼날 게 뻔해서 그땐 얘기 안 했어요."

정숙: "언니랑 형부 반응은 어떠셨어요?"

희진: "언니랑 형부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다만 이후에 이태원에 대해 이야기 나눴을 때 언니도 당시에 저처럼 빨리 이 골목을 벗어나야겠다고만 생각했다고 그랬어요. 너무 무섭고, 놀랐다? 저랑 같은 반응이었어요. 형부는 그때 현장에서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언니랑 제가 빨리 집에 가자고 해서 돌아왔다고. 그리고 제 친구가 희생자인 것도 알아서 괜찮냐고 위로해주기도 했어요."

정숙: "이태원 참사 전후로 희진씨에게 생긴 변화가 있을까요?"

희진: "그런 일 있고 나서 그냥 안정적이고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안정적인 삶, 언젠가는 가정을 꾸려서 화목하게 소소하지만 별 탈 없이 지내고 싶다는 마음? 어렸을 때는 막연히 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평범한 미래가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죠. 그 전에는 사람 많은 곳, 시끌벅적한 곳에 가서 친구들이랑 노는 걸 되게 좋아했는데 참사를 기점으로 사람이 많이 몰린 현장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서울 지하철도 퇴근 시간에는 사람이 정말 많잖아요, 그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 골목에서 봤던 모습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잦고, 무서워서 놀라게 되고. 그래서 이전처럼 시끌벅적하고 사람 많은 곳에는 잘 안 가게 됐어요."

정숙: "신체에도 트라우마 반응이 남아 있는 건데, 희진씨는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셨나요?"

희진: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피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이전까지는 제가 직접적인 부상을 입지도 않았고, 그 골목 중심에 있던 것도 아니라서 피해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책임을 외부로 돌리기보다) 내가 더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끔, 가끔은 그때 골목에서 본 사람들 얼굴이 생각이 나요. 생각 안 하려고 하는데도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생각나서..."

정숙: "상담을 받아보실 생각은 없으셨어요?"

희진: "참사에서 목숨을 잃었던 친구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잖아요. 다른 친구들 무리가 있는데 실제로 다른 친구 한 명은 상담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고로 친구를 잃은 게 본인에게 너무 큰 충격이라서 상담을 받았다고.

저도 당시에는 충격이 컸고 말씀드렸듯 그날 본 광경이 생각나긴 했거든요. 그때 상황이 생각나서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도 무서웠고요. 무엇보다 저랑 제일 친했던 친구가 그렇게 돼서 슬픔, 우울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가볼까 고민은 했지만 그 슬픔에 계속 매몰돼 있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상담을 받지는 않았고 대신 참사 이후로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만나는 빈도가 늘었어요. 그 전엔 자주 못 만나던 친구들이었는데 참사를 계기로 그 관계가 소중해져서 더 자주 얼굴 보고 대화하고 힘든 일 있으면 나누고 하면서 괜찮아진 것 같아요."

서로를 감싸안는 말을 찾다

정숙: "말하자면 새로운 친구 모임이 생긴 거네요."

희진: "맞아요. 원래는 몇 년에 한 번 이렇게 만났던 것 같은데 친구 장례 이후로는 명절 때마다 같이 모여서 만나게 됐어요. 연휴에는 다들 본가에 있으니까. 지금 당진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랑은 더 연락이 자주 돼서 그 친구들이랑은 못해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고요. 많지는 않지만, 한 두 세명? 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들이에요."

정숙: "친구분들과 만나면 보통 어떤 대화 나누세요?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지."

희진: "일단은 어렸을 때 있었던 추억들 이야기죠. 앞으로 우리들은 연락 자주하고 지내자, 이런 이야기도 하고요. 기억에 남는 얘기는… 참사로 잃은 소영이가 워낙 어렸을 때부터 꾸미는 걸 좋아했어요. 화장품 가게에서 새 화장품 사고 학교에서 화장하다가 선생님께 혼나고. 그때 선생님이 '소영이는 맨날 거울만 본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서 다들 같이 그 얘기하고 웃고…"

정숙: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희진씨가 위로 받거나, 회복하는 데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희진: "위로가 됐죠. 이제라도 소영이 있는 데 같이 가서 이야기도 한번 하고, 한번 보고 오자고 그렇게 자주 이야기하고. 다른 친구들과 자주 만나고 연락하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괜찮아졌던 것 같아요. 그전처럼 똑같이 사는 얘기 하면서...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편하게 자주 나누던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가끔 친구들 통해서 소영이 부모님 안부를 전해 듣기도 하고.

소영이네 집은 당진 안에서도 더 시골에 있었거든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있어서 가끔 골목에서 부모님 마주치면 부모님 만났다, 이런 이야기 전해주고 했죠. 저는 1년에 한 두 번씩 어머님께 잘 지내시냐고, 어떻게 지내시냐고 문자 보내드리기도 하고요."

정숙: "어머님께 처음 연락드렸던 날 기억나세요?"

희진: "그 사건 있고 나서 바로 그 해에 한번 연락드렸고, 2023년 되는 새해에도 연락드렸던 기억이 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드리면서 요즘은 괜찮으시냐, 아프신 데는 없냐, 나중에 괜찮으시면 한번 찾아뵙겠다 이렇게 연락드렸어요. 어머니께서 엄청 힘들어하셨어요. 당시에는 대인기피증처럼 밖에도 잘 못 나가시고 힘들다고 그러셨었어요. 꿈에도 가끔 소영이가 나온다고, 이런 이야기도 나눴던 기억이 있네요.

그러고 나서 한 번은 또 저한테 먼저 연락을 주셨던 적도 있었어요. 2023년 4월 말. 이때는 제가 소영이 산소에 가서 편지를 놓고 왔던 때인데 그 편지를 어머니께서 보셨나 봐요. 편지 잘 봤다고, 잘 지내고 있냐고 그리고 어머니 기운 차리셔야 한다고 이런 연락을 주고 받았었어요. 어머니는 소영이 어렸을 적 추억 속에서 지내고 계신 것 같아요. 이후론 연락 못 드린 지 꽤 됐고요. 올해는 연락을 못 드렸네요."

안부를 묻는 일 너머에 필요한 마음

정숙: "소영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또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게 희진씨에겐 큰 위로가 됐겠어요. 희진씨는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희진: "이태원 참사가 있던 날 현장 상황이 정말 무질서했어요. 그렇게 인파가 몰리는데 안전을 위한 경찰 인력 배치나 질서 유지를 위한 지원이 체계적이지 않았잖아요. 거기 있던 사람들은 핼러윈을 즐기려고 이태원에 간 건데 압사로 돌아가셨으니 너무 안타까운 사고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 행사가 있으면 안전 방침이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당일 어떻게 할 건지 사전에 계획하고 하잖아요. 그날 이태원엔 그런 과정이 없었던 거고요.

저도 공무원이지만 행사를 진행하는 주체일 때면 늘 행사가 있기 전에 사전 회의를 하거든요. 인파가 몰릴 걸 대비해서 참가 인원에 맞는 안전 요원들을 현장에 배치하고 행사장 내부에 구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인력도 배치하고. 통신 체계도 갖추고요. 사고가 있을 경우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게끔 경찰, 소방 같은 유관기관들에 연락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요. 순찰대나 자율방재단 등 시민들의 도움을 받는 일도 있고요. 설령 용산시에서 주최한 행사가 아니었더라도 핼러윈 당일 이태원에는 전국 각지, 또 외국인들까지도 몰리잖아요. 전례가 있다면 당연히 시에서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죠."

 참사 이후 추모 포스트잇이 붙은 골목 풍경
참사 이후 추모 포스트잇이 붙은 골목 풍경 이상민

정숙: "올해로 이태원 참사 3주기인데요. 시민들에게 이태원이 어떤 공간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희진: "올해는 안전 요원들도 잘 배치돼서 통제가 가능한 환경 아래 핼러윈 행사가 진행되면 좋겠어요. 이태원이라는 공간에 대해선 복합적인 마음이 드는데요. 이태원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이태원에 놀러가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그 공간에서 참사가 있었는데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신나게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이태원에 가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어요. 그런데 그 마음 아래엔 이태원에서 있었던 참사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애도, 추모하는 마음이 있어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 뉴스 댓글 중에는 '누가 놀러가라고 했냐', '우리나라 전통도 아닌 외국 전통 파티에 가서 죽은 건데' 이런 식의 희생자를 모욕하는 댓글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돌아가신 분들은 정말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있었던 안타까운 사고로 받아들이고 앞으론 이런 참사가 없도록 예방 방안을 마련하는 데 생각이 모였으면 좋겠어요." <끝>

부끄러운 일이지만 대학 동기인 희진이 이태원 참사에서 겪은 상실을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졸업 이후론 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묵혀둔 슬픔을 꺼내보이기란 부담스러웠을 것도 같다. 어떤 이유에서든 퍽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희진은 평소 불만이나 아쉬움,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을 안으로 삼키는 성향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참사 이후 홀로 무언갈 버티며 지내왔을 모습이 그려졌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희진의 곁에 동질의 상실감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고향 친구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친구가 아닌 인터뷰이로 '희진씨'를 마주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참사에 관해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던 희진씨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한 건 고향 친구들과 다시 모이면서부터다. 그건 소영씨의 장례가 있던 날로부터 얼마 뒤의 일. 유년 시절을 공유한 초등학교 동창 여럿과 죽은 친구를 기억하고 철없던 시절 추억을 나누는 자리가 잦아졌다. 처음엔 괴로운 마음이 더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무리와의 대화는 삶을 회복해 나가도록 희진씨를 이끌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참사 이후 회복의 과정에서 '느슨한 연대(weak ties)'가 발휘하는 힘을 보여준다. 이는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제안한 개념인데, 고향 친구들 무리와의 '느슨한 연결'이 희진씨 회복의 통로가 되어줬다고 본다.

희진씨와의 인터뷰를 돌이켜보며 생각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슬픔을 말할 공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참사 이후 3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를 향한 혐오의 말은 여전히 사그라드는 법이 없다. 적어도 그러한 공론장에 상처 입은 이들이 '말할 공간'은 없다. 참사가 야기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일은 물론 늘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불편한 감각이 참사에 관한 이야기를 차단하게끔 둘 수는 없다. 필연 참사로 인한 고통을 홀로 감당하도록 개인을 내몰게 되기에. 공동체가 함께 그 슬픔을 나눌 순 없는 걸까? 슬픔이 고립되지 않고 서로에게 닿을 수 있도록. 쉽게 풀리지 않을 숙제가 주어진 것만 같다.

글 : 이정숙

* 이 활동은 재단법인 숲과나눔의 2025 풀씨 사업이 지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도 실립니다.
#1029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이태원 #핼러윈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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