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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잊을까봐 무서웠어요" 3년 만에 털어놓은 그날의 기억

[누군가의 생존법 ⑥] 이슬하·박정원씨가 들은 배현민씨의 이야기

등록 2025.11.06 09:38수정 2025.11.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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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랜턴'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그 가운데서 느낀 삶의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폭넓게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그 모든 과정을 '생존'으로 이야기함으로써 10·29 이태원 참사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 본 글에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와 당시의 경험이 서술돼 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우울감, 불안감 등 외상 반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읽는 중이나 이후에 불안, 무기력, 두통·불면, 두근거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가족·친구에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기자말]

 현민 씨가 기획에 참여한 공연에 오기로 했던 채화 씨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현민 씨가 기획에 참여한 공연에 오기로 했던 채화 씨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박정원

시간이 약이라는 말. 인정하기 싫은 말이지만 그 말밖에 붙잡을 수 없는 순간도 있다. 배현민씨는 그 오래되고도 시시한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태원 참사로 '소울메이트' 유채화씨를 잃은 그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시간이라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잊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바쁘게 지낸 나날들 속에서도 이러다 정말 언니를 잊을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채화씨가 그은 밑줄이 남은 책장만 봐도 언니와의 추억은 끝 모르고 떠올랐다. 무더위가 가실 줄 모르던 지난 여름, 현민씨를 자택과 인근 카페에서 두 차례 만났다. 현민씨가 통과해 온 시간은 이제 '새로운 장'을 맞고 있는 듯했다.

슬하: "처음 뵙겠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현민: "저는 1997년생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이름은 배현민이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향우회라는 밴드를 하고 있어요."

슬하: "반갑습니다. 이 인터뷰 기획에 신청해 주신 이유가 궁금했어요."

현민: "제가 하고 있는 향우회라는 밴드가 인권 이야기를 하는 밴드인데요. 그러다 보니 밴드, 트위터 계정으로 관련 소식이 많이 들어와요. 이 기획도 그렇게 알게 됐어요. 저도 이태원 참사 때 희생된 친구가 있는데, 몇 년 동안 마주하지를 못하다가 이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링크가 뜬 김에 신청했어요."

슬하: "그러셨군요. 친구분은 어떻게 알고 지내신 사이였나요?"


현민: "그 친구는 저보다 두 살 많았는데, 처음에는 취미 동호회 같은 걸로 만나 친해졌어요. 여러모로 잘 맞았죠. 취미라는 것도 되게 다양한 게 있잖아요? 근데 그런 취미나 취향이 비슷하고, 사는 것도 비슷하고, 진로도 디자인으로 같고, 심지어 둘 다 집안에서 장녀라는 점도 같았어요. 한마디로 소울메이트였어요. 같이 전시나 영화를 보고 와서 신랄한 비평을 나누기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별로 없거든요. 또 제가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것들을 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어요. 그러면서도 서로 반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친구인데 계속 서로 존댓말로 대했어요.


그리고 저보다 한 걸음 정도 먼저 나아가 있는 친구였어요. 제가 중학생일 때, 언니는 고등학생이었고, 제가 고등학생일 때 언니는 대학생이었어요. 그래서 늘 조언을 구하곤 했죠. 저에겐 언니가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롤모델이었어요. 롤모델이라는 게 아주 멀리 앞선 사람일 수도 있지만, 같은 분야에서 한 발짝 앞선 사람이 의지가 많이 되더라고요.

제가 장녀라 그런지 사람들한테 의지를 잘 안 하는 편인데요. 유일하게 언니한테는 의지를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이랑은 전화도 잘 안 하는데, 언니랑은 하루에 5시간씩 하기도 하고. 언니가 가는 길을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걸으며 언니를 많이 동경했어요. 그렇게 동경하기만 하다가 저도 제법 커서 언니 앞에 떳떳해질 수 있을 무렵, 그런 일이 일어났죠."

슬하: "정말 각별한 사이셨던 모양이에요."

현민: "그렇죠. 그런데 저와 언니 사이에 겹지인이 없었어요. 둘이서만 만나고, 둘만 노니까 겹치는 친구가 없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같이 끼워 놀려고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늘 잘 안 맞아서 결국 다시 둘이 놀았어요. 그러다 보니 제 주변에서는 아무도 언니의 존재를 몰라요. 둘이서만 알고 지냈으니까요. 그런 언니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니까 그와의 추억을 공유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날 이후 더 바쁘게, 더 열심히

슬하: "언니분께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당일 현민씨가 그 소식을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요?"

현민: "지금 저희가 인터뷰하고 있는 이 방 건너편에 사는 친구랑 그때도 같이 살 때였어요. 그 친구가 음악을 하는데, 참사 다음 날 저녁에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어요. 언니도 그 공연에 오기로 했었거든요. 제가 기획에 참여했던 그 공연은 제 연인을 언니에게 소개해 주는 자리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기다리는데, 언니가 계속 연락을 안 받는 거예요. 계속 나타나질 않아서 '왜 안 오지? 오늘 와야 하는데' 하면서 영문도 모르고 기다렸어요. 피자를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자 한 통이 왔어요. 언니가 사망했다는 문자였어요.

저는 '진짜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주변 친구들 중 이태원에 간 친구가 있는지 확인할 때, 언니한테는 연락을 안 돌렸어요. '당연히 안 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평소에 이태원은 가지도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아무튼 그날은 도무지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공연도 취소가 됐어요.

그리고 장례식장에 갔는데, 너무 낯설었던 기억이 나요. 저는 증조할머니도 아직 살아계시거든요. 한 번도 누군가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죽은 거예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믿기지 않았어요.

처음 가본 장례식장이란 곳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곳 같았어요. 부조금이라도 최대한 많이 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너무 절망스러운 마음에 오열했죠. 우습게도,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유가족 중 자매분께서 저를 위로하러 와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언니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마구 늘어놓았는데, 저를 안아주시더라고요. 다른 분이 오셔서 제가 더 울지 못하게 한 기억도 나요. 유가족 앞에서 너무 울면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슬하: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냈나요?"

현민: "우선 회사에 다니기가 너무 버거웠어요.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 것도 힘들었죠. 제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사람이 많은 곳에만 가면 자꾸만 떠오르더라고요. 제 상황을 회사에 말씀드리니 회사 측에서도 이해를 해주셔서 한 달을 쉬게 해주셨어요.

쉬고 나서 다시 회사에 나갔지만 결국 그만두었어요. 힘든 것 말고도 삶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더라고요. 저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이 죽고 나니까 인생이 덧없게 느껴졌어요.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퇴사 이후에는 방황의 시간이라 치고 1년 정도 다른 일을 했어요."

슬하: "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현민: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니 인테리어 디자인이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맞는지 알아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인테리어 일을 잠깐 쉬면서 음악 활동을 했어요. 원래부터 저는 사람들이 문화를 만들어가고 그걸 향유하면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좋아했어요. 인디음악 씬에 몸담으며 이런저런 일들을 벌였고, 지금까지도 계속 활동하고 있네요."

슬하: "1년 동안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도 했나요?"

현민: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저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아요. 일단은 제가 살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인디음악 씬에는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 속에서 치유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커뮤니티 안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슬하: "그런데 사실 그렇게 밖에서 위로받다가도 결국엔 집에서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이 오기 마련이잖아요. '음악이든 뭐든,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고요. 그런 시간은 어떻게 통과했는지도 궁금해요."

현민: "혼자 있는 시간을 아예 안 만들었어요. 원래도 힘든 일이 있으면 일을 더 늘리는 편인데요. 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바쁘게 지냈어요.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 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음악과 관련된 일을 많이 벌였어요.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한 일을 하기엔 좀 어려운 상태였어서요.

타투 문하생으로 잠깐 있기도 했어요. 그 당시 선생님이 자기도 세월호 참사로 할머니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위로의 말처럼 건넸던 기억도 나네요. 아무튼 이것저것 뛰어들어보며 바쁘게 지냈어요. 원래 기질이 빈 시간을 잘 못 견디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기는 한데요. 이게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서 그냥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에 강박이 조금 있어요."

슬하: "그런 기질도 언니분의 영향이었을까요?"

현민: "맞아요. 언니가 정말 그랬거든요. 언니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아침 전화영어를 하던 사람이자 5년 후, 10년 후 미래까지 계획이 서 있던 사람. 그런데 그렇게 늘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에 충실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니까 삶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더라고요.

언니랑 실존주의 철학도 같이 공부하고 그랬거든요. 실존주의에서는 삶의 이유가 없다고 하잖아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인생이 덧없게 느껴졌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니가 못 산 만큼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어요.

'언니였으면 이랬겠지' 하면서 더 열심히 살려고 했어요. 그때는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화도 나고 그랬어요. '누구는 진짜 열심히 살고 싶어도 못 사는데 왜 저렇게 대충 살지?' 하면서요. 언니는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제가 그걸 대신 다 해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현민 씨 집에 있는 책 <요람에서 요람으로>의 한 페이지. 채화 씨가 그은 밑줄과 붙인 포스트잇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민 씨 집에 있는 책 <요람에서 요람으로>의 한 페이지. 채화 씨가 그은 밑줄과 붙인 포스트잇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배현민

실존주의 얘기하니까 생각났는데, 언니랑 같이 철학이나 문학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쳐 보이며) 여기 포스트잇이 다 언니가 붙여놓은 거예요. 메모라든가 흔적이 다 남아있어요. 이렇게 책 한 권을 봐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참 웃긴 게 언니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이 저한테는 계속 운명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언니가 저한테 남긴 게 책과 옷과 시계예요. 너무 웃기지 않아요? 무슨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에요. 웃긴 줄 알면서도 자꾸 운명적으로 해석하는 게, 그래야 제가 이 사람의 부재를 견딜 수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해요."

언젠가는 언니 같은 사람이 나타날 텐데…

슬하: "언니분의 부재를 더 실감하게 되는 날들이 있을 것 같아요. 가령 1주기, 2주기가 되는 날들처럼요. 그럴 때면 혹시 좀 어땠을까요?"

현민: "사실은 회피를 굉장히 많이 했었어요. 아예 마주하려 하지 않았죠. 이태원에 가본다거나 추모제를 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갈 자신이 없었어요."

슬하: "제가 찾아보니 채화씨에 관한 기사가 좀 있더라고요. 가족분들께서 채화씨에 대한 기억을 나누기도 하고, 국회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하고요. 그 소식도 따로 접하지는 못한 걸까요?"

현민: "네, 기사 같은 것도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채화 언니 이야기뿐 아니라 이태원 참사에 관해서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어요."

슬하: "이제는 조금 마주할 수 있게 된 게 시간이 흘러서일까요?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던 걸까요?"

현민: "계기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인테리어 일 때문에 이태원에 갈 일이 의도치 않게 많았는데요. 비즈니스 모드로 자주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적인 영역에서도 덤덤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원래는 이태원 자체를 아예 못 갔으니까요.

무엇보다 시간이 흘러서가 큰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모든 건 무뎌지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알았어요. 모든 건 그러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제가 언니를 점점 잊을까 봐. 저와 언니 사이에 겹지인이 없었다고 했잖아요.

내가 잊으면 기억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언니가 정말 '상상 속의 인물'이 될까 봐 두려웠어요. 지금도 아무도 같이 추억할 사람이 없고, 제가 기억 못 하면 이 사람은 사라지는 거고, 그런데 제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질 테고.

그러면 언니가 정말 가상의 사람처럼 없어질 것 같아서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 언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도 나타날 텐데 그것도 너무 싫었어요."

슬하: "채화씨 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반가울 수도 있잖아요."

현민: "언니는 저에게 너무 큰 의미였잖아요. 부모님과 못하는 이야기도 나누며 감정적으로 교류하고, 직업적으로도 비슷해서 저의 롤모델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이 분명 또 나타날 텐데, 왠지 '그 사람이 언니의 역할을 가져간다'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무언가 언니가 대체된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게 불쾌했어요.

죽은 사람을 너무 우상시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사실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대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좋은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 당연히 좋은 건데, 언니가 대체되면 언니가 잊히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그게 어떻게 별거가 아니냐고 말해주던 사람들

슬하: "현민씨에게 채화씨가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은 알겠어요. 현민씨가 힘들어할 때, 주변에서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현민: "주변에서는 저를 많이 돌봐줬죠. 사실 그 일이 너무 큰 일이다 보니까 다들 직접적인 위로를 하기보다는 곁을 지켜주는 형태로 시간을 같이 보내줬어요. 하지만 그건 주로 음악 씬에서 만난 사람들이었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애초에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제가 유족은 아니다 보니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기도 했고요.

때로는 스스로 유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부모님께 말씀드려본 적도 있지만, 무심한 반응이 돌아왔어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학교 동창도 아니고, 직장 동료도 아닌 친구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오늘 이 인터뷰를 하러 오기 전에도 아빠한테 얘기했더니, '제가 그렇게까지 힘들었는지 잘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들한테도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그렇게 나쁘게 말할 사람도 없긴 한데 일단은 말을 안 했어요. 말을 꺼내면 그때마다 이 일이 언급되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힘든 이야기를 나눈다고 고통이 나눠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일을 겪지도 않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들었고요. 껍데기뿐인 위로를 받지 않을까. 위로해 준다고 하더라도 제 내면에서는 '너는 이 사람 모르잖아' 이런 목소리가 올라오기 마련이니까.

최근 들어서야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놨고, 친구들이 '그때는 우리가 잘 몰랐다. 괜찮았냐'고 걱정해 주었어요. 사실 그때 제가 잠적하다시피 친구들 연락을 잘 안 받았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됐다고 해줬어요."

슬하: "'너는 이 사람 모르잖아'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이해가 돼요. 사실 저도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채화씨에 관해 당연히 잘 알지 못하니까요. 이 인터뷰를 읽게 될 독자분들은 어쩌면 채화씨와 접점이 더 없는 분이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채화씨를 어떻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게 혹시 있으실까요?"

현민: "아까도 얘기했듯이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어요. 확실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주어진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남을 잘 돕기도 하고요. 그냥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슬하: "열심히 살던 정말 멋진 사람. 채화씨가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는 걸까요?"

현민: "글쎄요, 그건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그리는 이미지로 어떤 사람이 기억되는 건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슬하: "음악 씬에서 만난 사람들이 위로가 됐던 건 이유가 있을까요?"

현민: "소위 '정상 소셜'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거쳐온 삶의 궤적도 그렇거든요. 좋은 부모님 아래서 초중고 무탈하게 나와 4년제 대학 들어가 취업하고. 정상 소셜의 범위에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인데, 사실 기질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은 거죠. 제가 비주류적인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정상 소셜의 사람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반면 인디씬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게 너무 평범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어디 가서 기후운동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맨날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 나가서 피켓 들고 서 있고요. 감수성이 달랐죠.

제가 '별거는 아닌데 이런 일이 있어서 너무 힘들었어'라고 털어놓으면, '그게 어떻게 별거가 아니냐'고 답이 돌아오고.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제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다양한 사람 중 한 명이 된다는 점이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언니를 마주하는 시간

슬하: "현민씨에게는 음악 씬이 무척 안전한 공간으로 느껴지겠어요. 혹시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현민: "이것도 채화 언니랑 관련이 있긴 한데요. 둘 다 음악을 좋아해서 같이 밴드를 해보자고 했었어요. 저는 기타, 언니는 베이스. 그래서 악기를 사서 같이 배우고 그랬어요. 그러다 언니가 사라지니까 '같이 하기로 했던 밴드를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어떤 소명처럼 느꼈던 것도 같아요.

그렇게 시작한 게 향우회라는 밴드인데요. '방향성 있는 폭발과 그 폭발들 사이의 연대'라는 슬로건으로 활동하는 여성펑크밴드예요. 여성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향우회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저는 무대에 직접 서지는 않고, 기획 및 디자인 등의 역할을 맡고 있어요. 향우회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람들이 저희 음악에 공감해 주면 저도 거기서 힘을 얻곤 해요."

최근에 'The Panic Tool'이란 앨범을 냈는데요. 누구나 '패닉', 즉 감정의 재난을 겪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이겨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데, 음악도 그런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든 앨범이에요.

사람들이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는 것처럼, 너무 화가 나거나 삶을 놓고 싶을 때 이 노래를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감정의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도구로서의 음악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사람,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요.

이번 핼러윈에는 공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데요. 이태원 참사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위로하고, 같이 서로의 고통을 보듬는 자리가 매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너무 무겁기만 하기보다는 조금은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갈수록 이태원과 핼러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당연히 웃고 떠들면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추모의 방식을 고민해 보고 싶어요."

슬하: "멋진 공연이 될 것 같아요. 그 외 3주기를 어떻게 맞아야겠다는 계획이 또 있을까요?"

현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아직 현장에는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하는데도 계속 눈물이 나는데, 가면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요. 다만 언니 수목장한 곳은 가보고 싶어요."

슬하: "이유가 있을까요?"

현민: "원래 사람이 죽으면 기일마다 가잖아요. 저도 당연히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간 거라서요. 이제는 스스로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한번 가봐야겠더라고요. 무섭긴 하지만요. 그래도 납골당이 아니라 나무니까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요?"

 지난 10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공연장 ACS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3주기 추모공연 포스터. 현민 씨는 이 공연의 공동기획으로 참여했다.
지난 10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공연장 ACS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3주기 추모공연 포스터. 현민 씨는 이 공연의 공동기획으로 참여했다. 배현민

핑크빛으로 물들던 날
나는 어지러워 숨도 쉴 수 없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니
너는 신기룬가 아님 무지갠가
(중략)
너는 들꽃처럼 살아갔지
스러지네 오필리아
- 향우회, '오필리아' 중 -

현민씨는 조금씩 마주할 용기를 내고 있다. 올해 3주기에는 채화씨가 잠든 수목장에 가보려 한다. 이 인터뷰도 그런 용기의 일환이었다.

사람들이 묵을 공간을 디자인하고 동료들이 설 무대를 기획하던 현민씨는, 이제 채화씨를 마주하는 자신의 마음도 꾸려나가려 한다.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나 무지개가 아닌 분명 숨 쉬고 있던 채화씨를 열심히도 기억하며.

글 : 이슬하

* 이 활동은 재단법인 숲과나눔의 2025 풀씨 사업이 지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도 실립니다.
#1029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이태원 #핼러윈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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