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민 씨 집에 있는 책 <요람에서 요람으로>의 한 페이지. 채화 씨가 그은 밑줄과 붙인 포스트잇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배현민
실존주의 얘기하니까 생각났는데, 언니랑 같이 철학이나 문학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쳐 보이며) 여기 포스트잇이 다 언니가 붙여놓은 거예요. 메모라든가 흔적이 다 남아있어요. 이렇게 책 한 권을 봐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참 웃긴 게 언니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이 저한테는 계속 운명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언니가 저한테 남긴 게 책과 옷과 시계예요. 너무 웃기지 않아요? 무슨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에요. 웃긴 줄 알면서도 자꾸 운명적으로 해석하는 게, 그래야 제가 이 사람의 부재를 견딜 수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해요."
언젠가는 언니 같은 사람이 나타날 텐데…
슬하: "언니분의 부재를 더 실감하게 되는 날들이 있을 것 같아요. 가령 1주기, 2주기가 되는 날들처럼요. 그럴 때면 혹시 좀 어땠을까요?"
현민: "사실은 회피를 굉장히 많이 했었어요. 아예 마주하려 하지 않았죠. 이태원에 가본다거나 추모제를 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갈 자신이 없었어요."
슬하: "제가 찾아보니 채화씨에 관한 기사가 좀 있더라고요. 가족분들께서 채화씨에 대한 기억을 나누기도 하고, 국회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하고요. 그 소식도 따로 접하지는 못한 걸까요?"
현민: "네, 기사 같은 것도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채화 언니 이야기뿐 아니라 이태원 참사에 관해서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어요."
슬하: "이제는 조금 마주할 수 있게 된 게 시간이 흘러서일까요?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던 걸까요?"
현민: "계기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최근에 인테리어 일 때문에 이태원에 갈 일이 의도치 않게 많았는데요. 비즈니스 모드로 자주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적인 영역에서도 덤덤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원래는 이태원 자체를 아예 못 갔으니까요.
무엇보다 시간이 흘러서가 큰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모든 건 무뎌지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알았어요. 모든 건 그러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제가 언니를 점점 잊을까 봐. 저와 언니 사이에 겹지인이 없었다고 했잖아요.
내가 잊으면 기억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언니가 정말 '상상 속의 인물'이 될까 봐 두려웠어요. 지금도 아무도 같이 추억할 사람이 없고, 제가 기억 못 하면 이 사람은 사라지는 거고, 그런데 제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질 테고.
그러면 언니가 정말 가상의 사람처럼 없어질 것 같아서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 언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도 나타날 텐데 그것도 너무 싫었어요."
슬하: "채화씨 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반가울 수도 있잖아요."
현민: "언니는 저에게 너무 큰 의미였잖아요. 부모님과 못하는 이야기도 나누며 감정적으로 교류하고, 직업적으로도 비슷해서 저의 롤모델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이 분명 또 나타날 텐데, 왠지 '그 사람이 언니의 역할을 가져간다'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무언가 언니가 대체된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게 불쾌했어요.
죽은 사람을 너무 우상시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사실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대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좋은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 당연히 좋은 건데, 언니가 대체되면 언니가 잊히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그게 어떻게 별거가 아니냐고 말해주던 사람들
슬하: "현민씨에게 채화씨가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은 알겠어요. 현민씨가 힘들어할 때, 주변에서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현민: "주변에서는 저를 많이 돌봐줬죠. 사실 그 일이 너무 큰 일이다 보니까 다들 직접적인 위로를 하기보다는 곁을 지켜주는 형태로 시간을 같이 보내줬어요. 하지만 그건 주로 음악 씬에서 만난 사람들이었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애초에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제가 유족은 아니다 보니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기도 했고요.
때로는 스스로 유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부모님께 말씀드려본 적도 있지만, 무심한 반응이 돌아왔어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학교 동창도 아니고, 직장 동료도 아닌 친구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오늘 이 인터뷰를 하러 오기 전에도 아빠한테 얘기했더니, '제가 그렇게까지 힘들었는지 잘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들한테도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그렇게 나쁘게 말할 사람도 없긴 한데 일단은 말을 안 했어요. 말을 꺼내면 그때마다 이 일이 언급되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힘든 이야기를 나눈다고 고통이 나눠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일을 겪지도 않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들었고요. 껍데기뿐인 위로를 받지 않을까. 위로해 준다고 하더라도 제 내면에서는 '너는 이 사람 모르잖아' 이런 목소리가 올라오기 마련이니까.
최근 들어서야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놨고, 친구들이 '그때는 우리가 잘 몰랐다. 괜찮았냐'고 걱정해 주었어요. 사실 그때 제가 잠적하다시피 친구들 연락을 잘 안 받았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됐다고 해줬어요."
슬하: "'너는 이 사람 모르잖아'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이해가 돼요. 사실 저도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채화씨에 관해 당연히 잘 알지 못하니까요. 이 인터뷰를 읽게 될 독자분들은 어쩌면 채화씨와 접점이 더 없는 분이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채화씨를 어떻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게 혹시 있으실까요?"
현민: "아까도 얘기했듯이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어요. 확실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주어진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남을 잘 돕기도 하고요. 그냥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슬하: "열심히 살던 정말 멋진 사람. 채화씨가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는 걸까요?"
현민: "글쎄요, 그건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그리는 이미지로 어떤 사람이 기억되는 건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슬하: "음악 씬에서 만난 사람들이 위로가 됐던 건 이유가 있을까요?"
현민: "소위 '정상 소셜'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거쳐온 삶의 궤적도 그렇거든요. 좋은 부모님 아래서 초중고 무탈하게 나와 4년제 대학 들어가 취업하고. 정상 소셜의 범위에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인데, 사실 기질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은 거죠. 제가 비주류적인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정상 소셜의 사람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반면 인디씬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게 너무 평범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어디 가서 기후운동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맨날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 나가서 피켓 들고 서 있고요. 감수성이 달랐죠.
제가 '별거는 아닌데 이런 일이 있어서 너무 힘들었어'라고 털어놓으면, '그게 어떻게 별거가 아니냐'고 답이 돌아오고.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제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다양한 사람 중 한 명이 된다는 점이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언니를 마주하는 시간
슬하: "현민씨에게는 음악 씬이 무척 안전한 공간으로 느껴지겠어요. 혹시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현민: "이것도 채화 언니랑 관련이 있긴 한데요. 둘 다 음악을 좋아해서 같이 밴드를 해보자고 했었어요. 저는 기타, 언니는 베이스. 그래서 악기를 사서 같이 배우고 그랬어요. 그러다 언니가 사라지니까 '같이 하기로 했던 밴드를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어떤 소명처럼 느꼈던 것도 같아요.
그렇게 시작한 게 향우회라는 밴드인데요. '방향성 있는 폭발과 그 폭발들 사이의 연대'라는 슬로건으로 활동하는 여성펑크밴드예요. 여성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향우회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저는 무대에 직접 서지는 않고, 기획 및 디자인 등의 역할을 맡고 있어요. 향우회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람들이 저희 음악에 공감해 주면 저도 거기서 힘을 얻곤 해요."
최근에 'The Panic Tool'이란 앨범을 냈는데요. 누구나 '패닉', 즉 감정의 재난을 겪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이겨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데, 음악도 그런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든 앨범이에요.
사람들이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듣는 것처럼, 너무 화가 나거나 삶을 놓고 싶을 때 이 노래를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감정의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도구로서의 음악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사람,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요.
이번 핼러윈에는 공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데요. 이태원 참사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위로하고, 같이 서로의 고통을 보듬는 자리가 매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너무 무겁기만 하기보다는 조금은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갈수록 이태원과 핼러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당연히 웃고 떠들면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추모의 방식을 고민해 보고 싶어요."
슬하: "멋진 공연이 될 것 같아요. 그 외 3주기를 어떻게 맞아야겠다는 계획이 또 있을까요?"
현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아직 현장에는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하는데도 계속 눈물이 나는데, 가면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요. 다만 언니 수목장한 곳은 가보고 싶어요."
슬하: "이유가 있을까요?"
현민: "원래 사람이 죽으면 기일마다 가잖아요. 저도 당연히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간 거라서요. 이제는 스스로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한번 가봐야겠더라고요. 무섭긴 하지만요. 그래도 납골당이 아니라 나무니까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요?"

▲ 지난 10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공연장 ACS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3주기 추모공연 포스터. 현민 씨는 이 공연의 공동기획으로 참여했다.
배현민
핑크빛으로 물들던 날
나는 어지러워 숨도 쉴 수 없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니
너는 신기룬가 아님 무지갠가
(중략)
너는 들꽃처럼 살아갔지
스러지네 오필리아
- 향우회, '오필리아' 중 -
현민씨는 조금씩 마주할 용기를 내고 있다. 올해 3주기에는 채화씨가 잠든 수목장에 가보려 한다. 이 인터뷰도 그런 용기의 일환이었다.
사람들이 묵을 공간을 디자인하고 동료들이 설 무대를 기획하던 현민씨는, 이제 채화씨를 마주하는 자신의 마음도 꾸려나가려 한다.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나 무지개가 아닌 분명 숨 쉬고 있던 채화씨를 열심히도 기억하며.
글 : 이슬하
* 이 활동은 재단법인 숲과나눔의 2025 풀씨 사업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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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고민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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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잊을까봐 무서웠어요" 3년 만에 털어놓은 그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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