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시간 세월호와 함께 살아온 세희씨는 진도를 통해 이태원을 본다.
박정원
하나의 참사는 또 다른 참사를 상기시킨다. 반복되는 죽음 앞에 기시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 높이는데, 10월 29일의 이태원은 4월 16일의 세월호와 그렇게 연결된다. 나는 한강 작가의 질문을 떠올린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그러니까 세월호가 이태원을 도울 수 있는가.
배가 가라앉자 진도는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그 가운데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세희(가명)씨는 아주 오랫동안 참사를 앓아 왔다. 그런데 그는 어쩐지 지속된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했다. '나는 왜 내가 겪지 않은 일로 이토록 괴로운 걸까.' 제 마음에 구멍을 뚫는 생각을 떨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마침내 세희씨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언어'였다. 자신 역시 세월호와 함께 긴 시간을 살아온 생존자라는 사실을 그는 우연한 계기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까지 겪은 일들에 대해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세희씨는 진도를 통해 이태원을 본다. 반대로 나는 이태원을 통해 진도를 본다. 참사 공간을 배와 골목으로 국한한다면,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을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나 무력함만을 느끼기엔 아직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세희씨는 줄곧 절제된 언어로 인터뷰에 임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 해야 하는 이야기를 선택하는 사람이고, 말하지 않으면 어느새 지워지고 마는 주변부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세희씨는 지역민으로서 생존자로서 간직한 기억을 신중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른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에 대해 통감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재발방지'라는 추상적인 구호를 곱씹었다.
더 이상 재난 참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비극은 매번 뜻하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차적인 피해가 이어지지 않도록 막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고통을 나눠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진도에서 맞닥뜨린 이태원 참사
상민: "전라남도 진도에서 나고 자라신 거죠?"
세희: "네, 20살에 서울로 올라와 살다가 올해 초에 진도로 다시 돌아왔어요."
상민: "어디서 어떻게 참사 소식을 접했나요?"
세희: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 휴가를 받아 이태원 참사 전날 진도에 내려왔어요. 너무 피곤해 일찍 잠에 들었어요. 일어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로 몇 명이 죽었다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내가 지금 들은 게 맞나?
거실에서 걱정스럽게 연락을 돌리시더라고요. 서울 사는 친척들이나 지인들한테 거기 간 사람 있냐 다 괜찮냐 물어보고. 저는 잠결에 어벙벙한데 뉴스를 보니까 정말로 참사가 일어난 거예요. 초기에는 그 현장이 여과 없이 노출됐잖아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상민: "그때 세월호 참사가 바로 연상되셨던 거예요?"
세희: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제 또래잖아요. '거기에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제까지 징조도 보이지 않다가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일어나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세월호가 거쳤던 과정이랑 똑같잖아요.
그날 저는 하필 진도에 있었고요. 세월호 참사 때도 '괜찮냐' 이런 메시지를 많이 받았거든요. 이번에도 제가 서울에 있는 줄 아는 친구들이 '혹시 너 거기 갔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경험적인 측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았어요."
상민: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차이가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세희: "세월호는 바다에 떠 있는 고립된 공간이잖아요. 가라앉는 모습이 담긴 영상은 있지만, 희생자분들 숨이 꺼져가는 순간에 대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접한 적은 없잖아요. 그런데 이태원은 워낙 개방되어 있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보니까 영상이든 사진이든 참사 이미지가 끊임없이 확산되었던 것 같아요."
상민: "그게 많이 괴로우셨겠어요."
세희: "일주일 동안 그 이미지가 떠나지 않더라고요. 한 번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당시 긴급 상담 통화 같은 게 있었는데, 회사에서 전화 걸고 막 울면서 이야기했죠. 세월호 참사는 진상 규명 약속하기 까지도 오래 걸렸고, 사실 지금도 명확히 해결되고 있지 않잖아요. 이태원 참사도 똑같겠구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또 되풀이하는구나."
상민: "잠깐 휴가 다녀오는 동안 일이 있었던 거네요."
세희: "어머니께서는 제가 진도에 있어 다행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서울에 있었으면 걱정했을 것 같다고. 알고 보니까 그날 이태원에 갔다가 사고 직전에 다른 데로 이동했거나 아니면 이태원 가려고 했는데 못 갔다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어른으로서 져야만 하는 책임
상민: "주변 사람들과는 어떻게 대화 나눴나요?"
세희: "회사에서 울고 있으니까 상사가 '왜 우냐'고 물었어요. '참사 때문에 그렇다'고 하니까 밖에 나가더니 제 사수랑 따로 이야기하는 게 들리더라고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같은 키워드가 들렸어요. 그분들은 30대 40대니까 그 세대가 겪은 참사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 다음에 용산에 사는 회사 동료가 있었는데, 그 동료한테도 물어봤어요. 참사 당일에 혹시 갔냐, 지금 괜찮냐고. '안 갔는데 참사 일어난 게 너무 슬프다'고 하더라고요. 자는데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그랬대요.
그래서 힘들면 이러이러한 곳에 연락해 보거나 언제든 나한테 연락하라고 이야기했어요. 지금 사는 집에서 지내기 힘들면 지낼 수 있는 곳 알아봐 주겠다고도 하고. 참사가 일어난 데서 계속 사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상민: "긴급 상담 통화로 전화했을 때는 어떤 이야기를 하셨어요?"
세희: "이태원 참사를 접하니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막 올라오는 것 같다고 했어요.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은 절망이에요. 사건이 반복되고 있는데 막지 못했고, 내 세대가 죽기도 했고, 또 누구도 책임 지지 않아서 슬펐어요.
상담사분이 '어른으로서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예전에 상담 치료를 받을 때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른이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맥락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두 번의 참사를 겪으면서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슬프게도."
상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세희: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하면 조금 화가 났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지금 그런 감정을 느낄 게 아니라 나가서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어른들이 책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죠. 오히려 회피하는 모습만 많이 보이고.
그런데 이태원 참사 때는 그 미안하다는 말도 결국 책임을 인정하겠다는 말로 들렸어요. 참사라는 게 넓게 보면 '사회 전체의 책임'이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안도가 되었던 것 같아요."
상민: "8년의 간격이 존재하잖아요. 세희씨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는 입장에서 어떠세요?"
세희: "저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게 어른이면 나는 어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때는 일단 너무 괴로워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세월호가 인양되지 못하는 모습을 청소년 시기 내내 봤어요. 저희 고등학교 바로 앞에 유가족 베이스캠프가 있었는데, 그분들이 먹고 자는 걸 매일 보고, 뉴스 취재도 계속 와서 지쳤어요.
사실 작년까지도 나는 어른이 될 수 없고,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작년이 세월호 참사 10주기였잖아요. 그때 희생되신 분들보다 제 나이가 훨씬 많아졌으니까요. 이제는 어른이 된 만큼, 더 이상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상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세희: "상담을 마지막으로 받는 날이었어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섬 전체 분위기가 무거웠어요"

▲ 올해 4월 진도군청 앞에 걸린 현수막
세희
상민: "세월호 참사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자세히 물어보고 싶어요."
세희: "고등학교 1학년 때 눈을 뜰 때마다 사망자 수가 늘어났어요. 공설운동장 위로 취재 헬기가 떴다 내렸다 했고요. 저뿐만 아니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 전부 괴로워했어요. 돌아보면 적절한 심리 상담이나 지원을 못 받은 거죠.
그 상태로 방치된 채 미디어에서는 자극적으로 취재하려고 했어요. 진도라는 지역도, 세월호라는 참사도,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기보다 왜곡된 이미지로 접하다 보니까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어요.
그때 섬 전체 분위기가 엄청나게 무거웠어요. 급식실에 TV가 있었는데 뉴스가 들릴 때마다 갑자기 조용해져요. 고등학교 급식실이 원래 왁자지껄하잖아요. 조용한 상태로 반 년 있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때는 많이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싫어서, 아예 그 참사로부터 나를 딱 떼어내고 어디 가두고 싶은 느낌이었어요."
상민: "피해 지역으로서 진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못 들어본 것 같네요."
세희: "맞아요. 상담 치료할 때마다 왜 나는 내가 겪지 않은 일로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해야하는지 묻곤 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보았던
선생님께서 저에게 그 사건을 오래 겪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생존자라고 생각해요. 되게 오랜 시간 사건을 겪은 거죠. 2014년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무도 '너는 뭐다' 이름 붙여주지 않았어요. 당시 청소년으로서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어요."
참사 이후 사회가 방치한 것들
상민: "최근 참사 당시 이태원 참사 구조에 참여했던 소방대원의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어요."
세희: "저는 사회가 참사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되게 안타까웠죠. 참사 이후에 남겨진 생존자들이 사실 굉장히 많잖아요. 물론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겨진 생존자들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상민: "참사 이후에 그 골목을 방문한 건 작년이 처음이었나요?"
세희: "네. 이태원에는 채식 음식점이 많고, 한강진역 근처에 공연장이 있어서 참사 이전에는 몇 번 갔어요. 그런데 이후에는 가기 싫어서 안 간 게 아니라 일도 바쁘고 당시 살던 동네에서 교통이 애매하더라고요. 을씨년스러워서 안 간다 이런 이유는 전혀 아니었어요.
이태원 공간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굉장히 커요. 저도 세월호 참사 때문에 한 번 죽어버린 지역에 살고 있으니까, 그 분위기를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참사가 일어난 지역에 많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참사를 없었던 일처럼 여길 수 있으니까요. 삼풍백화점 무너진 자리에 아크로비스타가 들어섰잖아요. 추모비도 사건이 있었던 자리로부터 굉장히 먼 데 떨어져 있고요."
상민: "따로 추모와 관련된 활동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세희: "너무 바빠서 무언가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주 7일 야근할 때였어요. 그래도 길거리에서 유가족분들이 서명 받거나 리본 나눠주실 때 지나친 적은 없어요. 올해 5·18 때 광주에 가서도 그랬는데, 참사가 너무 많아서 어떤 유가족 부스에 들렀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나네요."
상민: "진도에서 벗어나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어떠셨어요?"
세희: "일단 도시가 조금 복잡하다. 서울에 살면서 나는 항상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이태원에 언제 처음 갔더라? 어떻게 보면 서울의 이방인들이 모인 지역이잖아요. 해외 음식점도 많고, 이슬람 모스크도 있고, 성소수자 클럽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저랑 그 공간이 많이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상민: "진도에 대한 마음은 지금 어떠세요?"
세희: "예전에는 엄청 벗어나고 싶었어요. 사실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은 다 살던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해요. 나중에는 서울이 번잡해서 다시 진도에 왔는데 의외로 괜찮더라고요. 그런데 곧 저는 또 다른 계획이 있어서 진도에서 나갈 예정이에요. 지금은 나쁘지 않아요."
상민: "참사 이후 사회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세요?"
세희: "이태원 참사 이후 제주항공 참사가 있었잖아요. 다들 이태원 참사나 세월호 참사나 제주항공 참사나 같은 시간선 안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슬펐던 게 사람들이 사회적 참사로부터 일상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능숙하게 실천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나쁜 일이 아닌데, 그 능숙함이 슬펐어요.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가 이런 참사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아요. 사회가 정말 나아진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학습'한 것이기도 하잖아요. 이제는 참사가 일상화된 느낌이에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뒤 공연장에 가면 '압박이 일어날 경우 앞으로 팔을 껴안으라'는 안내가 나와요. 예전에는 그런 안내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딜 가나 있더라고요."
회복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 참사 이후 세희씨는 이태원에 일부러 놀러오곤 했다.
세희
상민: "회복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세희: "사실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참사 희생자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게 트라우마로 남는 거겠죠. 그래서 참사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정말로 다시 그 참사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 그리고 그 상처가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납득 가능한 방향으로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민: "스스로 트라우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세요?"
세희: "지금은 괴로운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비상계엄이 지난 2024년 12월 3일에 있었잖아요. 그 사건을 겪고 '내 기억은 12월 3일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깨달았어요. 트라우마라는 게 그렇구나, 그 날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거구나.
이태원 참사나 제주항공 참사도 날짜로 불리잖아요. 예전엔 '왜 굳이 날짜로 부를까?' 했는데, 이제는 이해돼요. 그날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참사를 기억한다는 건 그 날짜에 머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상민: "회복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거겠죠?"
세희: "회복 불가능한 상처와 같이 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상처가 다시 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난 상처를 방치하면 곪잖아요. 새살이 차오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습윤밴드를 붙일지, 소금을 뿌려 덧나게 할지는 사회가 그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사회가 참사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피해자를 위로할 수도 있고, 반대로 두 번 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상민: "상담 외에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세희: "저는 사회 공동체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차 가해를 하지 않고, 적절히 지원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 그게 좋은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그 상처를 마주해야 하잖아요. 좋은 공동체가 있어야 사람들이 상처를 편하게 직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강진에서 집회를 할 때, 제주 항공 참사에 대한 묵념으로 발언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태원 참사에서 지인을 잃으신 분도 연단에 올라와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참사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나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매체를 통해 듣는 것이랑 면대면의 현장에서 듣는 것은 또 다르잖아요.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일도 결국 그 사람이 고통을 잊고 상처를 어느 정도 아물게 하는 데 필요한 일이니까요."
상민: "그런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세희: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그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 너무 옅어진 것 같아요. 무안 공항은 지금도 계속 폐쇄된 상태예요. 그런데 저는 이제 출국할 일이 있으면 진도에서 인천으로 가야 해요. 공항이 없으니까요.
'만약 참사가 인천공항에서 일어났으면 사람들은 지금과 똑같이 반응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인천공항이 계속 폐쇄됐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거예요. 인천공항에 유가족들이 텐트를 치고 있다면 언론이 매일 찾아오고, 대통령도 매일 동향을 보고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무안이라서 안 오는 걸까..."
상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세희: "이태원 참사도 강남에서 발생했다면 똑같은 얘기가 나왔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상민: "강남이라면 어땠을까요?"
세희: "강남이면 집값 떨어진다고 맞불 집회를 열지 않았을까요?"
상민: "아까 날짜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매년 돌아오는 날짜가 몇 개 있을 것 같아요."
세희: "4월 16일이랑 10월 29일, 12월 29일 제주항공 참사 그리고 5월 18일. 올해는 12월 3일을 기억할 것 같아요. 그런 날짜들이 돌아오네요."
지역을 둘러싼 낙인과 기억
상민: "지역에서는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세희: "지역 주민도 참사를 오래 겪은 피해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동시에 목격자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주목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서 추모를 기획하는 것도 좋아요. 지역 주민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꼭 이야기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상민: "세월호 참사 당시 어떤 도움이 있었으면 하세요?"
세희: "기본적으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했어야 해요. 특히 청소년들, 그 참사를 겪은 또래들을 위해서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참사 지역이나 참사 피해자들에게 낙인을 찍지 않는 거예요.
저도 조금 고민했어요. 성인이 된 뒤 내가 진도 출신이라고 밝히면, '사람들이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다행히 제가 만난 사람들은 무례하게 굴지 않았는데, 대신 그 참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안전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얘기합시다', '불편하면 멈춰도 됩니다' 같은 합의가 되어 있는 공간이요. 그런데 그런 자리를 마련해도 사실 올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잖아요. 어떻게 퍼뜨릴까 고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상민: "지역을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낙인 또한 염려가 되네요."
세희: "대학교에 갈 때, 호남 출신이라고 말하면 어떤 일을 겪게 될까 걱정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그건 참사에 대한 낙인과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결국 같은 맥락에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문제는 참 어렵죠.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예요. 그 책임의 소재를 생각해 보면 '이태원'이라는 지역 이름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는 낙인이 참 빨리 찍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참사가 일어난 뒤에 '이태원엔 가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왜 가면 안 되는 걸까요? 그곳에 가서 추모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상민: "또 특별히 어렵거나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뭐가 떠오르세요?"
세희: "고통스러운 마음이 있는데, 그게 왜 고통스러운 건지 몰랐어요. 작년에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됐어요. 그게 사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PTSD였다는 걸요. 그전에는 그냥 뭔가 불안하고 답답하고 그랬어요. 이유를 정확히 모르니까 '왜 이렇게 힘들지?'라는 생각만 계속 들었죠.
일부러 세월호 이야기를 피하려고도 했고요. 사실 지금도 어떤 부분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해요. 너무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스스로 도려내 버리잖아요. 그런 식으로 사라진 부분도 있고, 또 기억은 나지만 말로 꺼내지 못하는 부분도 많아요."
상민: "말로 꺼낼 수 없는 이유는 뭐예요?"
세희 : "아직도 그 기억에 어떤 설명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걸 말로 꺼냈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기억하고는 있지만, 아직 말로는 꺼내지 못한 기억들이 있어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주해야

▲ 세희씨가 촬영한 진도의 바다
세희
상민: "참사를 기억한다는 건 얼마간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세희: "맞아요. 그 고통을 다들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세월호를 기억하겠다는 말이 계속 있잖아요. 사실 저는 재작년까지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말을 잘 못했어요. 방어 기제가 오래 발동해서 세월호 관련된 건 잘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이렇게 기억을 회피하는 사람이 저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으로 돌아오잖아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똑바로 직시했는지 생각해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고. 그 참사의 고통에 남겨진 사람은 정말 일부인 것 같고요."
상민: "그럼 지금은 어떻게 직시하고 계세요?"
세희: "저도 사실 아직 완벽하게 직시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마주해야 하는 일이라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언제든 또 다른 참사를 겪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 불안이 커서 작년에는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집에 있을 때는 '천장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들곤 했어요.
요즘에는 비행기 탈 때도 조마조마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그 불안의 근원은 사회적 참사로부터 생긴 트라우마였어요.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잖아요. 이 문제를 직시해야만 더 이상 그 고통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민: "당장에는 회피하는 게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
세희: "개인마다 다른 것 같아요. 2년 전에 저한테 직시해야 한다고 하면 못할 것 같거든요.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치유되었다고 느끼는 포인트도 다 다를 수밖에 없고요. 트라우마도 다양한 방향성이 있잖아요. 참사의 기억으로부터 살아가는 방법은 모두가 똑같지 않다고 생각해요."
상민: "스스로 이전에 비해 달라졌구나 느끼는 포인트가 있으세요?"
세희: "예전에는 세월호 관련된 뉴스를 너무 괴로워서 안 읽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읽어요.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읽게 된 것 같기도 해요. 다시 안 일어나게 하려면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겠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진짜 최근의 일이에요."
상민: "이태원 참사가 그렇게 작용할 수도 있겠네요. 희망을 본 순간도 있을까요?"
세희: "작년 12월 집회에 나갔거든요. 나갈까 말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도 불안도가 높은 상태였거든요. 사람이 엄청 많은데 사고 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하고. 그날 엄청 복잡했잖아요. 그런데 그 공간에서는 내가 쓰러지면 누가 구해 줄 것 같더라고요.
왠지 근거가 있어요. 응원봉을 들고 '여기 나가는 길 없어요', '저쪽으로 가세요'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그냥 한 거잖아요. 우리가 사회적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상민: "탄핵 광장을 돌아보며 또 기억하는 풍경이 있을까요?
세희: "저도 발언을 두 번인가 했거든요. 계속 참사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항상 진도에서 왔다고 알려요. 청소년 때 나는 세월호를 겪었다. 그런데 진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안 하고 살았거든요. 이태원 참사가 계기가 되었던 게 맞는 것 같아요. 또래들이 계속 죽으니까."
상민: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듣고 싶어요.
세희: "참사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고민을 해야 한다. 여러 측면으로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겪고 있는 위치에서. 저도 이태원 이야기를 할 때 꼭 세월호를 묶어서 이야기해요. 제가 그 참사에 대해서 의미 부여하는 방식이 예전에 겪은 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거든요.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는 것이 있을 거고, 그런 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이제 더는 참사를 반복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원래도 안 됐지만 정말 이렇게 둬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이 참사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한때 낙인을 염려해 지명을 명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나는 그 취지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끝내 동의하지 못했다. 이름을 모르고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참사의 여파는 지역 사회에 크게 미친다. 그곳에 뿌리 내린 각자의 마음 깊숙이까지 스민다.
언젠가 세희씨는 언론에 익히 알려진 '팽목항'이 '진도항'으로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 행정 과정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런 변화에 양가감정을 느꼈다. 낙인을 고려하면 쇄신이 필요한데, 그건 자칫 망각의 일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의 사정도 비슷하다.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던 지구촌 축제는 3년째 중단 중이다. 전환을 모색해야 하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루어지면 곤란하다. 두 번째 인터뷰가 예정된 날, 세희씨는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었다. "그럼 그냥 이태원에서 만날까요?" 그렇게 지역에서 함께 케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었다.
세희씨의 표현 중 가장 아팠던 건 '방치'다. 국가도 사회도 남겨진 사람들을 내버려둔다.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개인의 불안만이 가중되고 있다. 이때 세희씨는 책임에 대해 언급한다. 나는 그 뜻을 '내버려두지 않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스스로 생존자라는 사실을 자각한 그가 지고자 하는 책임이란 그런 절박함에서 나온다.
그동안 하지 못한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입에 올리며, 세희씨는 관련 기사를 읽고 발언에 나서는 방식으로 세월호를 다시 겪고자 한다. 힘껏 벗어나고 싶었던 고통의 자리로 기꺼이 돌아간다. '나는 왜 내가 겪지 않은 일로 이토록 괴로운 걸까.' 그에게 그런 의문이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세희씨는 이제 저마다 무언가 겪고 있는 위치에서 참사를 고민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그는 진도를 통해 이태원을 보고, 반대로 나는 이태원을 통해 진도를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내버려두지 않고 연결되기를 희망하며.
글 : 이상민
* 이 활동은 재단법인 숲과나눔의 2025 풀씨 사업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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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고민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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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겪은 진도 청년, 이태원 참사 후 깨달은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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