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자산과 화폐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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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자산 혹은 디지털화폐를 두고 기싸움이 한참이다.
정부, 중앙은행, 금융지주, 정보통신 대기업 등 다양한 주체들이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나라마다 해석도 상이하고, 처방전도 다르다. 자산(asset)인지, 화폐(money)인지 경계도 모호하고 쓰임새도 제각각이다. 전문가들도 의견이 갈린다.
용어도 낯설고 내용도 어려워서 핵심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처럼, 겉에 드러난 모습보다 안에 감춰진 내용이 많을 것이다. 본질을 꿰뚫어 보려면 이유와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유를 알면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언론과 지면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토대로,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진짜 속내를 파헤쳐보자.
미국의 의도는 쉽게 읽힌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하 SC)을 기축통화로 만들어 달러 패권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 질서를 따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찌감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이하 CBDC)로 자국의 통화체계를 하나로 묶는 작업에 착수했다.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국제 거래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디지털 위안화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원화 기반 SC 발행을 서두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국제적 흐름에 조응한 디지털 기반의 통화질서 구축 ②달러 기반 SC의 범람으로부터 통화 주권 수호 ③SC 시장 활성화를 통한 재정 유연성 확보다. 이밖에 타국에 비해 부동산 편중이 유달리 심한 가계 자산 구도를 바꿔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①은 디지털 경제 가속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대응이라 할 수 있다. ②는 달러 기반 SC 유통량이 지나치면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이 작동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통화 주권을 지키기 위함이라 보면 된다. ③은 SC 시장이 활성화할수록 국공채 수요가 늘어날 것이고 따라서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 확보가 수월해진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SC를 반대하진 않으나 코인 발행에 따른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면 은행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SC 흐름에 밀려 말을 아끼고 있지만, SC보다 CBDC를 선호할 것이다. 한국은행이 SC를 꺼리는 이유는 민간 발행업자에 대한 규제와 감독이 쉽지 않고, SC 발행량이 늘어나게 되면 통화 정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상업은행은 사면초가다. SC가 대세가 되면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고객의 예/적금이 인출되고 은행을 통하지 않고도 외화 송금이 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지면 손실이 클 것이 자명하다. 한편, CBDC가 활성화되면 상업은행을 통하지 않고도 중앙은행이 직접 화폐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이 축소되면 수익에 타격을 입게 된다.
어떻게든 은행이 이 흐름에서 배제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한국은 은행 중심 금융제도가 정착된 나라이고, 중앙은행은 상업은행 없이 통화 정책을 펼 수 없다. 그렇다면? 정보통신 대기업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은행 코인이 널리 쓰이려면 강력한 플랫폼을 보유한 업자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 은행과 정보통신 기업 간 짝짓기가 한참인 이유다.
정보통신 대기업(Big tech)이 SC에 관심이 큰 이유는 수수료 때문이다. 지금은 지급결제 과정에서 카드사, 부가사업자(VAN), 대행사(PG) 등에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자체 SC를 발행하면 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게다가 결제 정보가 내부에 고스란히 쌓인다. 정보는 곧 돈이다. 수수료도 절감하고 유용한 고객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게임이다.
주조 차익도 누릴 수 있다. 주조 차익(시뇨리지)이란 화폐 발행액과 수입액 사이의 차이를 말한다. 코인을 발행하고 벌어들인 돈(법화)으로 국공채를 매입해 얻을 수 있는 이자 수익이 대표적이다. SC 발행량이 늘어나면 차익도 불어나는 구조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면 이 기회가 사라지거나 줄어든다. CBDC를 찬성할 이유가 없다.
금융 소비자에겐 어떤 편익이 제공될까. SC가 범용 화폐로 자리 잡으면 해외여행을 가거나 외국에 돈을 보낼 때 또는 해외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환전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빠르고 저렴하게 송금과 결제가 가능하다. CBDC가 발행될 경우, 은행 계좌가 없어도 휴대전화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빈곤층, 노인 등 금융 취약계층의 접근성이 개선된다.
돈이 전자적인 형태로 저장/거래되는, 이른바 화폐의 디지털화(digitization of money)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가상자산과 디지털화폐는 인터넷 공간을 타고 흐르며 화폐 금융 생태계를 재편하는 중이다. 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 이는 기술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좋고 나쁨의 문제나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이 흐름이 사익(私益)을 강화하는 쪽이 아니라 공익(公益)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화폐 담론 어디에도 공익적 가치를 높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화폐 발행권을 두고 금융회사와 민간 업자가 쟁투를 벌이는 모습은 화폐 전환이 '그들만의 잔치'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일은 선수들의 몫이니, 소비자 혹은 시민은 정해진 질서를 따르면 된다는 식이다. '누구를 위한 전환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이 빠져 있다. 이대로 흘러가면 전환의 혜택은 화폐 발행권을 쥔 소수에 돌아갈 것이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숙의(熟議) 과정이 필요하다. 전환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꼭지들은 다음과 같다.
①은행이 누리고 있는 과점적 특혜를 해체하는 장치가 필요함
②권좌의 주인만 바뀌는 왜곡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함
③공익적 가치를 증대할 수 있는 구조와 방식을 만들어야 함
①가상자산 혹은 디지털화폐는 기존 화폐 금융 체계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태동했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금융 위기, 국가부채 증가와 명목화폐의 가치 하락, 금융 권력의 도덕적 해이와 비효율성 등은 새로운 금융 질서의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화폐는 탈중앙화된 금융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막 움트기 시작한 이 화폐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성패(成敗)와 상관없이 문제의식과 지향점은 명확하다. 지금껏 은행들은 금융 권력을 독과점하며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 이를 바로잡아야 할 국가는 은행과 한편이 되어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구조를 방치하고 있으므로 이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꿔 금융 민주주의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행을 필수재라고 생각하지만, 민간 상업은행이 없어도 화폐 금융을 작동시킬 수 있는 길은 존재한다. 신용 창출은 은행만이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따름이다. 디지털화폐로의 전환은 은행이 누려왔던 특혜를 없앨 좋은 기회다. 민간은행의 독과점을 해체할 수 있는 법/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②탈중앙화된 화폐의 등장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정부나 은행의 간섭 없이 개인 간 투명한 거래를 통해 대안적인 화폐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이상은 사라지고, 가상화폐 거래 시장은 검은돈을 세탁하는 장소이거나 시세 차익만을 노리는 투기꾼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가상화폐가 사회경제에 유의미한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가상자산 시장이 활성화되면 돈을 만드는 권능을 가진 이들이 늘어난다. 화폐는 곧 권력이다. 잘못하면 권좌의 주인만 바뀔 뿐,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어쩌면 훨씬 더 고약한 상황이 전개될지 모른다. 민간 발행업자가 꿈꾸는 건 공익의 확장이 아니다. 은행은 체계(system) 안에 있어서 관리가 상대적으로 용이하지만, SC는 밖에 있다. 아무리 촘촘한 규제망에 가두어도 틈새로 일탈할 개연성이 크다.
SC 발행업자가 발행한 코인 만큼의 안전자산을 보유해야 한다는 준칙이 잘 지켜지리라 장담할 수 없다, 사람들이 SC를 '돈'으로 인식하게 되면 코인 발행량을 늘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업자들의 일탈로 SC의 대규모 인출 사태(coin-run)가 일어나면 규제는 한층 강화되고 불신은 증폭될 것이다. 이는 과거로의 회귀, 즉 은행을 다시 권좌에 앉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③디지털화폐가 창출하는 공익적 가치의 으뜸은 소비자 혹은 시민에게 금융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은행 지점을 방문하지 않아도 휴대전화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돈을 보내거나 받을 수 있다. 지급결제 절차가 단순해져서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절약된다. 법정화폐를 믿지 못하는 이에겐 가상자산이 가치를 저장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한국적 맥락에서 디지털화폐가 줄 수 있는 개인적 효능감은 크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금융 기반 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금융 소외를 겪거나 소액 거래에 불편을 느끼는 인구는 많지 않다. 전문가들이 원화 기반 SC의 사용처가 제한적일 것으로 진단하는 이유다. 당장은 달러 기반 SC 등 외국 디지털화폐의 간섭을 배제하고 통화 주권을 지키는 임무가 주요할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은 디지털화폐가 공익적 목적으로 쓰일 수 있는 구조와 방식을 설계하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과 보조금을 디지털화폐로 발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돈이라도,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따라 사회경제에 대한 기여도는 달라진다. 디지털화폐가 투기 시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좋은 쓰임새를 많이 창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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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화폐의 디지털화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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