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 왼쪽부터 김형식, 류금수, 사회자(박만순), 육철식
충북역사문화연대
육철식(1932년생)과 같이 자취하던 최석기는 종이 위에다가 낙서를 했다. '소련에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계급도 없는 사회에서 잘살고 있으며, 이북도 그렇고. 그런데 돈 없는 사람은 이북에 살면 공부도 다 무료로 시켜 주고, 소련 유학도 그렇게 시켜 준다. 그리고 평양에는 아름다운 곳이 얼마나 많으냐'라는 내용이었다.
공부에 목말라 있던 육철식에게 최석기의 낙서는 이상향이자 강렬한 현실적 욕구였다. 그게 계기가 되어 그는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1948년 10월 경이었다.
북한에서 사법상을 지낸 이승엽이 그에게 '이영식'이라는 가명을 지어 주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2개월 반 동안 진행된 교육과 훈련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오전에는 군사학과 정치학 등의 이론 교육이, 오후에는 군사 훈련이, 저녁에는 구락부 활동과 자아비판 시간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육철식의 증언이다.
"낮에는 육박전 전술을 하구. 여기 총으로다가 찔러하는 36개 동작이 있어. 그거 하구, 그러구 인제 폭파, 그 다음에 뭐 거기 지형학, 정치학, 뭐 별 과목이 다 있었는데 주로 오전 중에는 과목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하고 ~ 저녁 먹구서는 구락부에 나가요. 구락부가 있어가지고 구락부에서는 음악 틀어놓고, 춤 같은 거 가르쳐주고~, 남자 여자 춤도 춰요. 그라구서 인저 돌아오면 비판시간이 있어."
육철식은 강동정치학원 교육기간 중 박헌영을 만났다. 박헌영으로부터 '꼬마 혁명가'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강동정치학원 수료 후 회령군관학교를 거쳐 남한 빨치산으로 배치되었다. 그렇다면 강동정치학원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인가?
강동정치학원은 1947년 9월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에 세워졌다. 남로당은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강경투쟁으로 전술을 전환하게 된다. 1946년 9월 철도 총파업, 10월 추수봉기가 그것이다. 미군정은 남로당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가하게 되고 좌익은 남한의 정치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결과 박헌영과 남로당 주요 간부가 월북을 하게 된다.
박헌영은 남로당 중간간부의 정치사상교육과 남로당 출신의 정치적 집결체로서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실질적 책임자는 북한 사법상을 맡게 되는 이승엽이다.
2개월 반 과정의 군사반과 6개월 과정의 정치반으로 구성되는데, 초기에는 남로당 중간간부 정치교육과 유격대원 양성소의 목적을 갖게 된다. 하지만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남한 내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이 전개되고, 유격대원 양성소로서의 기능이 강화된다.
위와 같은 강동정치학원의 기능으로 인해 류금수와 육철식은 교육·훈련 수료 후 각각 충북여성동맹과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었다.
형무소, 월북, 빨치산... 좌익에게 강요된 세 가지 길

▲빨치산 육철식이 쓴 책 <빨치산> 표지
육철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좌익에게 강요된 세 가지 길이 있었다. 형무소에 가거나 월북하거나 빨치산이 되는 것이었다. 육철식처럼 강동정치학원을 나온 후 빨치산이 된 경우도 있지만 북한의 다른 유격부대(대성정치학교, 평양정치학원 등) 교육을 이수한 후 빨치산으로 남파된 경우도 있다. 또한 여순사건 가담자들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이동하면서 각 지역 지방 좌익들과 합류해 빨치산 부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문화동 출신의 윤아무개는 해방 후 청주로 이사했다. 1946년 12월 남로당에 가입해 충북도당 청년부장을 맡았다. 더불어 충북민전 실무자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7년 5월 3일자로 소백산지구유격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전향해서 동지들을 검거하는데 경찰에 협조했다. 특히 서병두 암살사건의 범인 최시동을 검거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윤아무개의 활동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최시동(1924년생)이었다. 윤아무개와 같은 마을 출신의 최시동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46년 1월 21일 월북해서 김일성대학교에 속한 빨치산유격조(?)에 입교했다.
군사교육을 마친 그는 태백산지구유격조의 빨치산지도책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빨치산 충북지역책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전창식, '서병두 암살사건 ①', <월간충청> 1976년 12월호)
하지만 윤아무개와 최시동이 맡은 빨치산의 직위와 활동은 불분명하다. 1946년~1948년 초까지 충북지역에서 조직적인 빨치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충북지역 빨치산 활동은 충주·제천 지역의 월악산과 보은 속리산, 영동 일대에서만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최시동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신장식이다. 충북 청원군 강서면 원평리 출신의 신장식은 충북지역 빨치산 활동의 맥을 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형무소, 월북, 빨치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좌익들의 선택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