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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앞둔 양심수, 기적적으로 살려낸 어머니들

민가협 40주년 특별기획 : 민주와 인권을 향한 40년, 어머니의 위대한 여정 ②

등록 2025.11.14 13:39수정 2025.11.1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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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유학생사건 재심 무죄 판결 2020년 2월 14일 서울중앙법원은 구미유학생사건의 관련자들에게 35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안기부에 의한 불법체포, 강제구금에 의한 강압 수사를 인정했다. 2021년 7월에 대법원은 무죄를 최종 확정했다.
▲구미유학생사건 재심 무죄 판결 2020년 2월 14일 서울중앙법원은 구미유학생사건의 관련자들에게 35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안기부에 의한 불법체포, 강제구금에 의한 강압 수사를 인정했다. 2021년 7월에 대법원은 무죄를 최종 확정했다. 김성만

나는 1985년에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됐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어서 대법원에서도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3년 6개월의 사형수 생활 끝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고, 13년 2개월간 복역한 후 석방됐다. 2016년에 재심을 신청해 1·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고,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나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재미교포의 소개로 헝가리와 동독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해서 통일문제를 토론한 일이 '간첩죄'로 조작됐다. 안기부의 극심한 고문을 통해서도 간첩 행위라고 할 만한 내용이 나온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이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까지 하려고 했던 것은 내가 집필해서 운동권에 배포한 '예함(예속과 함성)' 팸플릿 때문이었다. '예함'의 내용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압을 지원한 미국의 역할을 폭로하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해 민족자주운동을 일으키자는 간곡한 호소였다. '예함'은 1980년대에 들불처럼 일어난 반미 민족자주운동의 발화점이 됐다. 이 점이 독재정권의 괘씸죄에 걸려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천형(天刑)과도 같았던 간첩 죄

지금과 달리 그때는 사형집행이 수시로 행해졌다. 내가 서울구치소에 입소한 후 1년 동안 두 번의 사형집행이 있었고, 7명의 국가보안법 사형수에게 형이 집행됐다. 사형이 확정된 후 나의 집행 대기 순번은 3번이었다. 사형집행은 사전 예고 없이 행해졌다. 언제 느닷없이 방으로 교도관들이 들이닥쳐 끌어낼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하루하루 목숨이 이어지는 불안한 나날이었다.

간첩죄는 당시에는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었다. 친척들이 우리 집과 일체 연락과 왕래를 끊었고, 밤에는 집으로 돌멩이가 날아들어 유리창을 깨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그때의 심정을 기독교 신문에 다음과 같이 쓰셨다.

"대문 앞을 쓸려고 해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 해가 뜨기 전이나 깜깜한 밤에 쓸어야 했다. 시장을 다녀도 몰래 다녀야 했고, 버스를 타러 갈 때나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 때도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했다. 주변 이웃들의 '간첩 가족'이란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깜깜한 밤하늘만 쳐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황량한 들판에 내버려진 것 같은 심정으로 살던 우리 가족에게 누구 하나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 오는 사람이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며 힘겹게 살아가시던 어머니는 '민가협에 가면 위축된 어깨가 펴지고 숨을 편히 쉴 수 있다'고 하셨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아들 주장이 학생들 주장과 다른 게 뭐가 있느냐? 북한대사관에 가서 민족문제를 토론하다니 얼마나 용기 있는 아들이냐?'라고 격려해 주셨다고 한다.


두들겨 맞고 징벌방에 갇혔다는 소식에 달려온 어머니들

아들의 석방을 호소하는 어머니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아들 김성만의 석방을 호소하는 최인화 어머니. 그 곁에 선 이들은 구미유학생사건으로 무기형을 받은 황대권씨와 강용주씨의 어머니들이다.
▲아들의 석방을 호소하는 어머니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아들 김성만의 석방을 호소하는 최인화 어머니. 그 곁에 선 이들은 구미유학생사건으로 무기형을 받은 황대권씨와 강용주씨의 어머니들이다. 김성만

내가 직접적으로 민가협 어머니들의 굳건한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 1986년 9월이었다. 당시 서울구치소에서 양심수를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전두환 정권이 서울아시안게임 기간에 교도소 규율을 엄히 단속하라고 교정국에 지시한 직후 교도관들이 트집을 잡아서 양심수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나흘 전에 사형이 확정된 나는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감방문을 나섰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두 명의 교도관에게 끌려오는 학생이 고통스러워하며 울고 있었다. 한 교도관이 팔을 비틀어 뒤로 꺾어 올리고 있었고, 다른 교도관은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팔도 놓고, 머리채도 놓으라고 했다. 반응이 없자 머리채 잡은 손을 직접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교도관은 사형수가 항상 차고 있는 수갑을 낚아채서 바닥에 쓰러뜨린 뒤 수갑을 당겨서 복도에서 내 몸을 질질 끌고 갔다. 수갑은 예리한 금속이기에 내 양 손목에서는 바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들은 나를 징벌방으로 데려간 후 내 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은 다음 집어넣었다. 잠시 후 학생들이 계속 끌려오면서 징벌방은 금세 다 채워졌다. 배식하는 소지가 사동에 남아 있는 학생들이 폭력 사태에 항의하며 단식에 들어갔다고 알려주었다. 징벌방에 끌려온 양심수들도 모두 단식에 들어갔다. 나도 단식에 동참했다. 다음 날 오전 구치소 측은 징벌방에 있는 양심수를 한 사람씩 불러내 환방시켰다. 하지만 나는 끝내 부르지 않았다.

"간첩? 그래 나도 간첩이니까 잡아넣어라!"

나는 외롭게 징벌방에 갇혀 며칠 동안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항의 단식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우선 배고픔을 참는 것이 커다란 고통이었다. 그리고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등 뒤에 포승줄 묶음이 있어서 등이 배겨 누울 수가 없었다. 수갑을 차고 있으니 엎드려 잘 수도 없었다. 며칠 밤을 밤새도록 벽에 기대 있으니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낮인지 밤인지 비몽사몽간이었다. 손목의 피는 멎었으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수갑이 상처를 자극하면서 수없이 양 손목을 쓰라리게 했다.

어머니는 징벌방에 끌려갔던 양심수 중 나만 면회가 안 되자 민가협에 알렸다. 다음 날 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이 구치소를 항의 방문했다. 구치소장은 이번 사태에 대해 나를 지칭하며 '좌익최고수'가 기획하고 선동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했다. 구치소 측은 이렇게 핑계를 대려고 나만 환방 조치에서 제외한 것이다.

폭력 사태 진상을 이미 잘 아는 어머니들은 '폭력 사태에 책임을 져야지 용공 조작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느냐'라고 강력히 항의하셨다. 소장이 '당신들이 간첩을 두둔하느냐, 당신들도 간첩과 한패냐'라고 하자 민가협 회장이던 임기란 어머니가 '그래, 나도 간첩이니까 나도 잡아넣어라'라고 소리치셨다. 환방 조치 약속을 못 받은 어머니들은 철수하지 않았고 밤에도 구치소 앞에서 투쟁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들은 당시 지명도가 매우 높았던 박찬종 국회의원을 대동하고 다시 서울구치소장을 만났다. 어머니들의 거듭된 항의에 소장도 환방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중에 면회를 오신 어머니로부터 어떻게 해서 내가 환방됐는지 듣고 나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굳세게 싸우셔서 고통에서 풀어주신 은혜, 간첩 죄명인데도 학생들과 다름없이 보살펴 주신 은혜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집회장을 울음바다로 만든 어머니의 구명 호소

연세대 졸업식에 함께 한 모자 1981년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김성만씨
▲연세대 졸업식에 함께 한 모자 1981년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김성만씨 김성만

독재정권 치하에서 어머니가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지할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하나님이었고, 또 하나는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서울구치소로 와서 나를 면회한 다음 민가협으로 향하셨다. 어머니는 나의 구명을 호소하는 유인물 한 뭉치를 옆에 끼고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민가협 문을 나설 때면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결의로 가득 찼다고 하셨다.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 촉구 집회 때 어머니에게 연단에 올라가서 말할 기회를 만들어줬다. 하지만 평생 집에서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가 무슨 말을 잘하실 수 있었을까? 청중들에게 성만이가 살아나게 도와달라고, 사형수로 집행당할 처지에 있는데 결코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하다가 설명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우시기만 했다. 그렇게 울며 연단에서 내려가실 때 함께 있던 청중들도 모두 함께 울어 집회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면회 오셔서 불쌍한 아들을 바라보고는 늘 눈물을 보이시며 괴로워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가족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내가 죽는 거야 내가 자초했다고 볼 수 있지만,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사형선고 이상의 고통이었다. 내가 소내 생활을 하며 이런 연유로 힘들어하는 것을 아는 한 교화위원이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 말은 어느 잡지에서 읽은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박종철 아버지가 김세진 어머니를 그렇게 부러워한단다. 세진이 어머니는 세진이가 보고 싶으면 아들 무덤에 가서 실컷 울 수 있지만, 박종철 아버지는 종철이가 보고 싶어도 치안본부가 종철이 시신을 없애버려서 어디 가서 울 데가 없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너의 어머니는 살아있는 너를 만나러 오니 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만남이냐?"

그 말을 듣고 나는 더는 슬퍼하지 않았다. 면회 시간이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세상에서 더없이 소중한 시간임을 깨달았다. 나는 면회 시간에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며 살았다.

고우영 만화에 등장한 "김성만을 죽이지 말라"

민가협 어머니들은 곳곳의 집회 현장을 다니면서 사형수를 살려야 한다고 외치셨다. 집회마다 사형수를 살리자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각종 신문과 잡지 인터뷰를 어머니께 주선하며 나의 억울한 사정을 널리 홍보하게 해주셨다. 민가협 어머니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내 절박한 사정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나갔다. 그러던 한날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당시 신문을 잘 읽지 않는 재소자들도 스포츠 신문만은 챙겨서 보았다. 그중에서도 고우영 작가의 만화가 실리던 <일간스포츠>를 많이 구독했다. 대다수가 고우영 만화를 보기 위해 <일간스포츠>를 본다고 했다. 그만큼 고우영 만화가 사회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의 만화 내용이 폭정을 일삼는 관리에게 한 의인이 항의하다가 옥에 갇혀 죽게 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음 한 컷에 의인이 아니라 "김성만을 죽이지 말라는 소리가 시중에 드높은데"라는 지문이 슬쩍 등장했다. 그러고는 만화는 바로 본래 내용으로 돌아갔다. 고우영 작가가 자신의 만화에 그런 대목을 집어넣을 만큼 민가협 어머니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민가협 덕분에 꺼져 가는 목숨을 구하다

이러한 사회적 울림은 나의 감형에 대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굳은 의지를 만들어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1로3김(1盧3金)'이 1988년 11월에 5공화국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 '5공청산' 문제를 협의하는 중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 그 시기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5공청산 최종 협의안에 동의했으나 김대중 총재는 합의를 거부했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이 그날 밤 김대중 총재에게 밀사를 보내 '어떻게 하면 합의를 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대중 총재는 그 자리에서 두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나의 감형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두 가지 조건 중 나의 감형만을 수용했고, 김대중 총재가 동의함으로써 '1로3김'의 5공청산 합의가 최종 타결됐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감형됐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견결한 투쟁으로 양심수 석방과 인권신장을 이루어내셨다. 그렇게 투쟁하시면서 사형 집행을 앞둔 양심수를 살려내는 기적도 만들어내셨다.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던 나는 어머니들의 구명운동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늘보다 높은 민가협 어머니들의 은혜에 더없는 감사함을 느끼며, 나는 오늘까지도 어머니들께 깊은 존경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구미유학생사건의 김성만 구미유학생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던 김성만씨는 민가협 어머니들의 구명 운동으로 무기로 감형됐고, 35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구미유학생사건의 김성만 구미유학생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던 김성만씨는 민가협 어머니들의 구명 운동으로 무기로 감형됐고, 35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성만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 주요 내용 및 일정]

● 사진전 '엄마들의 보랏빛 꿈' : 11월 13~21일(인사동 아지트미술관)
● 심포지엄 '민주와 인권을 향한 40년, 어머니의 위대한 여정' : 11월 27일(금) 오후 2시 국회의원 회관 8간담회실
● 특별헌정공연 '어머니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12월 13일(토) 오후 4시 한양대 올림픽체육관
● 사진집 '엄마의 보랏빛 꿈' : 11월 5일 발간(인터넷서점 판매 중)
● 기념도서 '민가협 40년, 그 보랏빛 여정' : 12월 초 발간 예정
● 미니다큐 '민가협을 기억하다'(총 20편) : 민가협 40주년 유튜브 채널 민가협40년 - YouTube에 공개
● 민가협 관련 자료는 온라인기록관 민가협 40년 기록관에서 볼 수 있으며,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 내용은 홈페이지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민가협 40주년 헌정공연 제작 후원 https://www.socialfunch.org/mkh40
● 문의 : 안영민 상임운영위원장(010-8010-7013), 이병인 사무국장(010-3786-3535)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성만씨는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1년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1983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1983~84년 헝가리, 동독 대사관을 방문해 민족문제를 토론한 이유로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됐다. 1986년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고 사형수로 지내다 어머니와 민가협의 구명운동 덕분에 1988년 무기로 감형된 뒤 1998년 8.15 때 석방됐다.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2021년 재심을 통해 36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다.
#민가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김성만 #양심수 #구미유학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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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2월 창립된 민주화실천기족협의회(민가협)의 40주년을 맞아 민가협의 활동과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한시적인 조직입니다. 12월 13일 민가협 40주년 특별 헌정 공연 '어머니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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