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조지섬의 러시아 트리니티 성당 최남단 남극의 성당에서 어머니의 쾌차를 빌었다(2025.11.)
오영식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기지 시간으로 다음 날 새벽, 아들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화면에는 낯선 백발의 할머니가 누워 있었고, 곁에서 아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빠! 할머니!"
"……"
어머니가 힘겹게 말씀하셨다.
"누구야…?"
아들이 할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빠요. 할머니 아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야. 영식이."
어머니는 힘겹게 따라 말했다.
"영식이? …영식이야?"
하지만 여전히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는지, 이름만 더듬더듬 따라 말하실 뿐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간신히 참고 어머니에게 내 이름을 반복해 불러 드렸다.
"엄마… 조금만 참아. 나 금방 갈게…"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나는 곁에 없었지만, 그래도 딸과 손자 곁에서 마지막을 맞으셨다고 했다. 그 사실을 듣는 순간 서러움과 죄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임종 소식은 곧바로 대장님과 대원들에게 알려졌고, 조리 대원과 여러 대원들은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며 분향소를 차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대장님께 조용히 사양 의사를 전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온 내게, 홀어머니까지 하나뿐인 아들도 없는 곳에서 쓸쓸히 떠나가셨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역만리 남극에서 분향소 앞에 서면 오열을 넘어 정신적으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임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으니, 여기에서는 분향소를 마련하지 말아 달라고 조심스레 부탁드렸다. 그러나 예의가 아니라며 대장님과 대원들은 1층 식당에 조용히 분향소를 마련한 뒤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찾아와 인사드리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따뜻한 마음조차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고마움을 알면서도 도저히 그 자리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아 극구 거부했고, 결국 방문을 걸어 잠갔다. 내 마음으로는 아직 어머니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내 안에서는 어머니가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마음속에 머물러 계신 듯하다.
지난 3일 어머니 발인 날, 한국의 지인이 장례식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어머니 관 옆에서 상주 표시를 단 채 서 있는 열두 살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나 역시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고 상주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내 아들에게만큼은 그런 아픔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는데, 어린 아들이 혼자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손이 떨리고 가슴이 조여올 정도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앞 일을 알 수 없는 월동대의 현실
내가 기지생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신문 기사를 쓰면 가끔 이런 댓글들이 달린다.
"우리 세금으로 연봉도 많이 받으면서 맨날 놀기만 하냐?"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면 남극 세종기지 대원들은 맛있는 음식만 먹고 크게 고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매일 일하는 것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독도나 대청도 같은 외딴섬에서 근무하는 군인과 경찰도 겪기 어려운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다.
하나뿐인 아들이 홀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 17일 기준으로 예정대로라면 오는 12월 초에 인계인수를 마치고 12월 13일에 남극을 떠난다. 12월 20일에 인천공항에 귀국하는 일정이다. 월동대원에게 귀국이 허락되는 날은,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아 있다.

▲남극행 전세기 칠레 푼타아레나스와 남극을 오가는 전세기는 11월부터 3월까지만 운항한다(2024.12.)
오영식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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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기과학 연구원,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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