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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들은 어머니의 임종 소식

상주로 서 있는 열두 살 아들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다

등록 2025.11.17 16:35수정 2025.11.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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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아들과 자동차 세계여행을 하다 갑자기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대에 선발된 아빠, 2024년 12월부터 약 1년간 남극기지에서 대기과학 연구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 지난 기사 '1년째 가족과 생이별... 이런 걸 먹고 버팁니다'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남극으로 오기 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홀어머니께 인사 한마디도 드리지 못한 채 조용히 훌쩍 떠나왔다. 이혼 후 아들을 혼자 키워왔지만, 가까운 곳에 사시던 어머니에게 기대지 않으려 애쓰며 지냈다. 어머니는 두 살 터울 누나의 문제를 떠안으며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가셨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차라리 내가 어머니와 거리를 두는 게 낫겠다 싶어 먼저 연락을 끊은 채 살아왔다.


홀어머니를 완전히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극으로 떠나기 전 그래도 어머니께 전화 한 통은 드려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나왔다. 상황이 조금 안정되면 다시 연락해 어머니를 모실 생각이었다.

남극에 들어온 뒤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이곳의 생활을 보여주려고 매주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신문 기사도 꾸준히 썼다. 그리고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워, 기지를 떠나기 전 책을 쓰자고 마음먹은 뒤에는 매일 원고를 써 내려갔다.

어머니의 63번째 생신날 어머니는 손자를 끔찍이 사랑하셨다(2019.3.)
▲어머니의 63번째 생신날 어머니는 손자를 끔찍이 사랑하셨다(2019.3.) 오영식

나는 어려서부터 주변 가족들이 하나둘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경험을 했다. 열두 살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할머니도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돌아가셨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역시 일찍 떠나, 결국 내게 남은 가족은 어머니와 누나 둘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아직 어린 아들이 아빠를 충분히 기억하기도 전에, 나를 잃는 아픔을 겪게 될까 늘 두려웠다. 나는 세종기지를 떠나기 전, 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글로 남겨 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나는 38차 월동연구대 대기과학 연구원으로서의 임무뿐 아니라 연구반장 역할도 맡았고, 주기적으로 발행해야 하는 세종기지 웹진 '눈나라 얼음나라'의 편집장이기도 했다. 한 달에 두 편 정도 언론사에 기사를 썼고, 매주 유튜브에 영상 한 편을 올리며 바쁘게 지냈다. 그런 일정 속에서도 아들에게 남길 글을 꾸준히 써나갔고 17일 내 책 <남극에서 쓴 아빠의 일기>(하움출판사)가 출간되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병환 소식

그 원고를 최종 수정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없는 1년 동안 아들을 챙기고 있는 전처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어머니 건강 문제로 통화 좀 했으면 해서…"

나는 또 누나 문제로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으신 건가 싶어 퉁명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아마 누나 때문일 거야.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그게 아니고… 어머니 많이 아프셔. 당신 올 때까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 못 했는데, 이러면 당신 마음에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아서…"

순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
"폐암이셔… 치료 받으면서 잘 버티셨는데 얼마 전 호스피스 병원으로 전원하셨대."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엊그제부터 많이 안 좋으신지 섬망 증세도 생기고, 병원에서 이제 준비하라고 했나 봐… 언니한테."

가족사진 어머니를 설득해 아들, 딸, 손자와 함께 점프샷을 찍었다(2021.9.)
▲가족사진 어머니를 설득해 아들, 딸, 손자와 함께 점프샷을 찍었다(2021.9.) 오영식

내가 한국을 떠난 뒤,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폐암 진단을 받으셨고 그동안 조용히 대학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이어오셨다고 했다. 그때도 어머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완치되길 바라며 내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병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면서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이었다.

기지 시각 새벽 4시 무렵이었다. 통신실 당직이라 비몽사몽 깨어 있던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갔다. 내 책에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원망 섞인 이야기들이 더 많았고, 다른 모자처럼 애정 어린 추억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눈물이 이유도 모르게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뒤, 나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전화를 걸어 어머니와 통화를 시도했다.

"엄마…"
"…누구야? 누구세요?"

"엄마, 나 영식이."
"…누구야?"

어머니는 어눌한 말투로 대답했고, 끝내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때가 10월 말.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서는 최소 11월이 되어야 칠레로 나가는 전세기가 뜨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 간부회의에서 대장님과 총무님께 상황을 말씀드렸다.

"대장님,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곧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뜻밖의 비보에 대장님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으셨다.

"아니… 왜?"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여기 오고 나서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저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대요…"
"충격이 크겠네… 마음 잘 추스르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하게."

그게 전부였다. 남극기지 대장이 부모님이 위독한 대원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진심 어린 위로뿐이었다.

킹조지섬의 러시아 트리니티 성당 최남단 남극의 성당에서 어머니의 쾌차를 빌었다(2025.11.)
▲킹조지섬의 러시아 트리니티 성당 최남단 남극의 성당에서 어머니의 쾌차를 빌었다(2025.11.) 오영식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기지 시간으로 다음 날 새벽, 아들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휴대폰 화면에는 낯선 백발의 할머니가 누워 있었고, 곁에서 아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빠! 할머니!"
"……"

어머니가 힘겹게 말씀하셨다.

"누구야…?"

아들이 할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빠요. 할머니 아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야. 영식이."

어머니는 힘겹게 따라 말했다.

"영식이? …영식이야?"

하지만 여전히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는지, 이름만 더듬더듬 따라 말하실 뿐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간신히 참고 어머니에게 내 이름을 반복해 불러 드렸다.

"엄마… 조금만 참아. 나 금방 갈게…"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나는 곁에 없었지만, 그래도 딸과 손자 곁에서 마지막을 맞으셨다고 했다. 그 사실을 듣는 순간 서러움과 죄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임종 소식은 곧바로 대장님과 대원들에게 알려졌고, 조리 대원과 여러 대원들은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며 분향소를 차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대장님께 조용히 사양 의사를 전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온 내게, 홀어머니까지 하나뿐인 아들도 없는 곳에서 쓸쓸히 떠나가셨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역만리 남극에서 분향소 앞에 서면 오열을 넘어 정신적으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임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으니, 여기에서는 분향소를 마련하지 말아 달라고 조심스레 부탁드렸다. 그러나 예의가 아니라며 대장님과 대원들은 1층 식당에 조용히 분향소를 마련한 뒤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찾아와 인사드리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따뜻한 마음조차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고마움을 알면서도 도저히 그 자리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아 극구 거부했고, 결국 방문을 걸어 잠갔다. 내 마음으로는 아직 어머니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내 안에서는 어머니가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마음속에 머물러 계신 듯하다.

지난 3일 어머니 발인 날, 한국의 지인이 장례식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어머니 관 옆에서 상주 표시를 단 채 서 있는 열두 살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나 역시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고 상주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내 아들에게만큼은 그런 아픔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는데, 어린 아들이 혼자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손이 떨리고 가슴이 조여올 정도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앞 일을 알 수 없는 월동대의 현실

내가 기지생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신문 기사를 쓰면 가끔 이런 댓글들이 달린다.

"우리 세금으로 연봉도 많이 받으면서 맨날 놀기만 하냐?"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면 남극 세종기지 대원들은 맛있는 음식만 먹고 크게 고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매일 일하는 것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독도나 대청도 같은 외딴섬에서 근무하는 군인과 경찰도 겪기 어려운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다.

하나뿐인 아들이 홀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 17일 기준으로 예정대로라면 오는 12월 초에 인계인수를 마치고 12월 13일에 남극을 떠난다. 12월 20일에 인천공항에 귀국하는 일정이다. 월동대원에게 귀국이 허락되는 날은,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아 있다.

남극행 전세기 칠레 푼타아레나스와 남극을 오가는 전세기는 11월부터 3월까지만 운항한다(2024.12.)
▲남극행 전세기 칠레 푼타아레나스와 남극을 오가는 전세기는 11월부터 3월까지만 운항한다(2024.12.) 오영식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블로그(“아들 손잡고 세계여행”)와 유튜브 채널(“오씨튜브”)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남극 #세종기지 #월동연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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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기과학 연구원,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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