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이야기'를 붙든 사람, 그가 말하는 '신화'

[서평] 조셉 캠벨이 남긴 질문 <신화의 힘>

등록 2025.11.19 17:10수정 2025.11.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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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는 말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데려온다. 미지에 대한 설렘과 함께, 아직 발을 디딘 적 없는 길 앞에서의 두려움이 겹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자주 '최초'라는 말을 붙이며 안도한다. 최초의 인간, 최초의 발명, 최초의 역사서...

키케로 이후 헤로도토스는 흔히 "최초의 역사가이자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기원전 5세기, 그는 전쟁과 도시, 사람들의 말을 모아 <역사>를 썼다. 그러나 그를 최초로 부르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정말 이야기는 그때 처음 생겨났을까. 기록 이전, 이미 수많은 입과 몸짓과 노랫말이 세계를 설명하고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조셉 캠벨이 등장한다. 신화학자 캠벨은 '최초의 이야기꾼'을 특정 한 사람으로 한정하는 순간, 인류가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어떤 기억이 지워진다고 보았다. 암벽화가 남아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갈 때, 광야의 기억, 사냥의 기억, 천둥 번개의 기억이 한꺼번에 우리를 덮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 어둠 속에서 태초의 신화가 생겨났다. 캠벨에게 태초의 이야기꾼은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경험을 상징으로 빚어낸 존재들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든 '이야기'

신화의 힘 책 표지
▲신화의 힘 책 표지 21세기북스

빌 모이어스는 책 <신화의 힘> 서문에서 캠벨의 마지막 날을 되짚는다. 1987년 10월 30일, 하와이 호놀룰루. 식도암으로 세상과 작별하던 캠벨의 곁에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가 놓여 있었다. 전쟁을 앞둔 왕자 아르주나의 내적 갈등, 의무와 도덕, 삶의 의미를 묻는 이 텍스트는 캠벨이 평생 붙들어 온 질문을 압축한 책이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여전히 '이야기'를 붙들고 있었다. PBS 스튜디오에서 캠벨과 모이어스와 나눈 대담은 그렇게 시작된다. 신화의 본질, 인간 존재의 의미, 현대 사회에서 신화가 갖는 힘을 두고 나눈 긴 대화가 오늘 우리가 읽는 <신화의 힘>이다.

모이어스에게 캠벨은 한 번 만나고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임스퀘어 지하철역 출구, 이웃 비디오 가게 앞, 다시 자연사박물관에서 그는 계속해서 캠벨을 "마주친다".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신화학은 여전히 우리 일상의 풍경 속에서 말을 걸어온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이념도 종교도 없다. 다만 춤을 출 뿐이다."

일본 신도의 신주가 했다는 이 말을 인용하며, 모이어스는 캠벨을 "우주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던 사람"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신화학


캠벨의 신화학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유출(emanation)'이다.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깨달음과 변화가 어떻게 바깥 세계로 흘러가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설명하는 말이다.

영웅의 여정을 떠올려보자. 영웅은 모험 속에서 깊은 통찰을 얻지만, 그것을 혼자 간직한 채 돌아오지 않으면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는다. 귀환 이후, 그 깨달음이 공동체를 위해 쓰일 때 비로소 여정은 원을 이룬다. 캠벨에게 유출은 바로 이 순간, 개인의 변화가 공동의 지혜로 확장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가 말한 "지구의 신화학"은 유출의 확장선 위에 있다. 캠벨에 따르면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화는 부족·민족·국가 단위에서 태어나 그 집단의 질서를 정당화해 왔다. 모티프는 비슷하지만, 사회적 기능에 따라 전혀 다른 윤리와 규범을 떠받친다. 문제는 오늘이다. 더 이상 "어디에 속해 있다"고 말하기 쉬운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과 전쟁, 재난과 질병이 국경을 가볍게 넘어 다니고, 한 지역의 폭력이 지구 전체를 뒤흔든다. 세계는 기술로 긴밀히 연결되었지만,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서사는 여전히 부족하다. 캠벨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다.

그래서 그는 특정 집단의 신화를 넘어, 이 행성 전체를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신화, 곧 지구의 신화학을 말한다. 땅과 공기, 물과 동물을 "우리의 형제요 누이, 어머니"로 부르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그가 꿈꾸는 지구 신화학의 한 장면처럼 읽힌다. "우리는 생명의 피륙을 짜는 자가 아니라,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장은 인간을 자연 위에 선 주인이 아니라, 생명의 직물 속 한 가닥으로 되돌려 놓는다.

지구의 신화학이 공동체를 향한 이야기라면, 캠벨이 말한 천복(天福)은 그 이야기 안에서 각 개인이 걸어야 할 길에 가깝다. 천복은 유행하는 '워라밸'이나 자기계발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머리로 계산하기 전에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방향, 설명하기도 전에 "나는 저기로 가야 한다"고 느끼는 길이다. 천복을 따른다는 것은 그 미세한 신호를 삶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결심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궤도에서 이탈할 때 삶을 잃는다"고 말한다.

빠르고 영리한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 신화라는 단어는 종종 "옛날이야기"나 "황당한 이야기"와 겹쳐 쓰인다. 그러나 캠벨의 시선으로 보면 신화는 이미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언어다. 우리는 여전히 영웅을 갈망하고, 희생양을 찾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 줄 '큰 이야기'를 찾는다.

그 욕망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PBS 스튜디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목소리에 잠시 귀 기울여 보는 것도 좋겠다. 그 대화 속에서 각자의 삶과 맞닿은 작은 태초의 이야기 하나쯤은 질문 과정에서 발견하길 바라면서.

"당신에게 신화는 무엇인가, 당신이 진짜로 살아 있다고 느끼는 자리는 어디인가."

신화의 힘

조지프 캠벨, 빌 모이어스 (지은이), 이윤기 (옮긴이),
21세기북스, 2020


#신화의힘 #조셉캠벨 #김성훈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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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수료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소설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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