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다룬 8부작 일본 드라마 <더 데이스>에서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폭발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
넷플릭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핵발전소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 최첨단 과학기술로 운영되는 청정에너지라고 믿었던 핵발전소가 사실은 물을 끓여 그 증기로 전기를 만드는 단순한 '증기 발전'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핵발전소는 단 한 번의 사고로 모든 생명과 그 생명들의 삶의 터전을 완전히 파괴하며, 사고 없이 운영한다 해도 처분할 곳이 없어 쌓아놓기만 하는 고준위 핵폐기물까지 만들어 내는 끔찍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우리나라 핵발전소가 지나치게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어, 언제 사고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이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단지 핵발전소 인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의 몸에서 삼중수소가 검출되고, 암에 걸린 사람들이 존재함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쓰는 만큼 돈만 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전기가, 사실은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삶을 희생시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깊은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핵발전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가동 중인 핵발전소는 수명이 다하면 문을 닫고, 새로운 핵발전소 건설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대형 핵사고를 겪고도, 정부와 핵산업계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2015년 당시 이미 스물네 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이었음에도 정부는 또다시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며 예정지를 발표했다. 이에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은 너무나 당연했다.
특히 영덕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까지 세 차례나 핵폐기장 건설 시도를 막아낸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먼저 강하게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영덕의 핵발전소 반대 운동은 지역 차원의 저항을 넘어, 전국적인 탈핵 의제로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영덕 주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했다. 장날 자체 홍보물을 나눠주기도 하고, 무기한 1인 릴레이 시위, 해맞이공원 타종식 기습 행동 등의 저항 운동을 이어 나갔다.
2015년 당시 영덕핵발전소찬반주민투표추진위원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영덕군민의 68.3%는 신규 원전 건설 부지 선정에 앞서 주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비록 당시 영덕군수와 영덕군은 주민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영덕군민들은 민간 주도의 주민투표에도 참여 의사를 밝히며 주민주권 실천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회피한 '주민 동의' 절차를 주민 스스로 설계하고 집행해 민주주의를 완성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추진위는 영덕핵발전소가 건설될 경우 영덕군 전역이 반경 30km 방사선비상계획구역에 포함된다며, 영덕의 미래는 영덕군민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후 주민투표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행정자치부,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주민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허위사실 유포, 금품·향응 제공, 관광 보내기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영덕군 역시 주민투표를 위한 선거인단 명부 공개를 거부하며 절차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영덕 주민들은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이 굳은 의지는 전국 각지의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영덕으로 모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선거인단 명부가 제공되지 않자, 영덕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직접 가가호호 방문하며 선거인 명부 동의서 1만 5천 명을 확보하는 등 초밀착 조직화를 통해 주민들의 의지를 모아냈다.
2015년 11월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간 실시된 주민투표에는 총 1만 1209명이 참여해 선거인명부 대비 60.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 결과 신규 핵발전소 건설 반대가 91.7%(1만 274표)에 이르렀다. 정부와 핵산업계가 온갖 술수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 유치를 반대하는 영덕군민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승리는 주민들의 것이었다.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공동의 과제

▲ 부산 기장 고리 원자력발전소 2호기 계속운전이 수명 만료 2년 반 만에 허가됐다.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 계속운전이 허가된 것은 2008년 고리 1호기, 2015년 월성 1호기에 이은 3번째 사례로, 10년만에 나온 계속운전 허가다. 13일 서울 중구 원안위 회의에서 방청에 참여한 환경단체 회원들이 고리 2호기의 수명연장 심사무효를 촉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덕 주민들의 민주적 정당성으로 막아낸 신규 핵발전소 논의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유령처럼 영덕을 맴돌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마련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다시 핵발전소 건설이 거론되고 있다. 내란 사태로 정통성을 상실한 윤석열 정부의 정책적 유산을, 이재명 정부가 다른 분야에서는 개혁을 서두르면서도 유독 핵발전 정책만은 그대로 계승하려는 듯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 영덕에서 다시 떠오르는 신규 핵발전소와 고리 2호기 수명 연장에서 드러난 여러 가지 일들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후쿠시마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민주주의 절차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권리를 어디까지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2015년 영덕 주민들이 보여준 저항과 참여는 그 자체로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취였다. 주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절차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존중받아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며, 국가가 지켜야 할 책임의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핵발전 확대,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 주민 의견 묵살은 모두 동일한 문제를 가리킨다.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치는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진정한 신념이라면, 지금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영덕 주민들이 지난 10년 동안 스스로 지켜온 민주적 결정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일, 그리고 원안위의 위법적·졸속 결정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더 나아가, 핵발전에 의존하지 않고도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은 현 정부가 반드시 져야 할 책임이다.
영덕에서 시작된 주민들의 거대한 용기와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기본을 세워야 한다. 주민의 생명과 안전이 국가의 에너지 전략보다 앞서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확고한 원칙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며,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공동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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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에 유령처럼 맴도는 말들... 윤석열 정부 유산 계승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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