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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출산 아래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곳

    백제와 신라, 고려의 양식이 모두 어우어진 사찰터, 강진 월남사지

    등록 2025.11.23 15:03수정 2025.11.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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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 기온이 급전직하한 모양이다. 창문을 타고 넘는 차가운 기가 금세 방 안을 채웠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나그네 신세다.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했다. 비도 오지 않는 날씨인데 우비까지 둘렀다. 훌륭한 방한 대비가 될 것이다. 10월 27일, 내 오토바이는 좀 더 아래로 달릴 예정이다.

    군산항을 끼고 도는 산업도로를 달린다. 거대한 사일로들이 길과 바다 사이에 가득하다.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을 사람들 또한 대단함을 느낀다. 길은 곧 바다를 만났다.


    군산에서 고군산열도를 거쳐 변산반도까지 이어지는 바닷길. 새만금 방조제 길을 달린다. 차가워진 날씨는 바람과 함께였다. 제법 중량의 오토바이 덩치도 바람에 밀렸다. 잠시 한눈을 팔면 차선이 절로 바뀌었다. 원래 핸들 쥔 손엔 힘을 빼야 하나 어쩔 수 없이 손아귀가 무거워진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이 요동 땅에서 느꼈을 정도의 감정일까. 막막함과 더불어 장쾌한 기분에 가슴이 살짝 조여 온다. 바다 위를 달리는 현대문명의 혜택이 자연이 준 혜택에 못지않은 듯도 하다. 새만금과 얽힌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있음을 알지만, 지금은 저 먼 수평선에 마음을 둘 수 있을 뿐이다.

    새만금방조제길. 우리나라에 이렇게 거침없이 오토바이로 달려볼 수 있는 길은 드물다. 마치 바다위를 나는 듯이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과속은 금물이다.
    ▲새만금방조제길. 우리나라에 이렇게 거침없이 오토바이로 달려볼 수 있는 길은 드물다. 마치 바다위를 나는 듯이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과속은 금물이다. 이병철

    변산반도를 내륙으로 돌고, 고창을 거친 길은 무안쯤에서 다시 바다를 건넜다. 신안군 압해도. 바다를 건널 땐 섬인 줄 알았는데, 섬 안에 드니 섬인 줄 모르겠다. 인간의 인지능력이라는 것이 어쩔 땐 참 초라하다. 하루가 길지 않아 머물지 못하고 다시 바다와 강을 건너고 도시를 지났다.

    월출산 아래 월남사지

    남녘답게 붉은 흙이 들판에 가득할 때쯤 강진 월출산 언저리에 닿았다. 북에서 동으로, 다시 남으로 반 바퀴를 둘러 내려오며 흘끔흘끔 산의 얼굴을 보았다. 참으로 잘생긴 산이다. 마치 빛날 화(華) 자가 붉은 대지를 뚫고 우뚝 선 듯도 했다. 가히 명산이라 할 만하다. 이미 국립공원이다.


    월출산. 국립공원 월출산을 월남사지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빙 둘러 사방에서 봐도 참 잘생긴 산이다.
    ▲월출산. 국립공원 월출산을 월남사지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빙 둘러 사방에서 봐도 참 잘생긴 산이다. 이병철

    늦은 오후의 연노랑 빛이 산과 들에 가득하다. 드디어 월출산 아래 월남사지(月南寺址)와 생애 첫 만남을 시작한다.

    북쪽 월출산이 산자락 아래 넓게 내어준 품에 절터가 있었다. 그 땅의 기세는 동쪽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절터 남쪽으로도 높은 산(수암산, 424m)이 있지만, 시야가 막힐 만큼 좁지 않다. 그래서인지 늦은 오후에도 절터에는 해가 가득했다.


    주차장은 절터보다 한 단 아래다. 채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우선 보이는 것은 잎이 푸른 소나무 한 그루와 아직 고고한 석탑 한 기였다. 걸음을 재촉해 단 위로 올라섰다. 월출산 아래 펼쳐진 대지는 가벼운 경사가 있으나 모나지 않아 순하게 뻗었다. 사방이 적당히 막히고 뚫려, 욕심을 낸다면 한 나라의 도성이 들어선다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실제 도성까지는 아니지만, 한때 이곳도 수도권이었을 때가 있었다. 13세기 후반, 삼별초 무리들이 진도를 거점으로 그들만의 왕을 세웠을 때 인근 해남과 강진은 모두 그 영향력 아래였다. 절터에서 진도의 왕성인 용장성의 그것과 닮은 막새기와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전 대몽항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그랬다. 이곳 강진과 서남해안은 강화도 정부의 생명줄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세곡이 지나는 길목이자 산출지였기 때문이다. 이 생명줄 하나는 고려가 버틴 40여 년의 원동력이었다. 불교 사찰이 지역의 중심이었던 당시 사회상에 비추면 그 과정에서 월남사가 어떤 역할을 했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생명줄은 곧 고통의 통로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평안을 위해 누군가의 짐이 더 무거워지는, 늘 반복되는 역사의 구조다. 왕조의 생명줄을 이어주는 백성의 고통은 차라리 몽고병을 찾아갈 만큼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대한 힘의 논리 아래 묵묵히 하루를 견뎌내는 것은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몫인가 싶어 씁쓸해진다. 하지만, 그 희생을 통해 이렇듯 우리의 역사가 남았으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강진 월남사지. 절 마당에는 동편으로 탑 한기가, 중심 영역에 복원된 금당건물이 서 있다. 탑은 백제계 양식으로 유명하다.
    ▲강진 월남사지. 절 마당에는 동편으로 탑 한기가, 중심 영역에 복원된 금당건물이 서 있다. 탑은 백제계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병철

    복토를 하고, 그 위에 주춧돌을 이은 절터로 눈을 돌린다. 내가 가진 얄팍한 지식과 시각, 두 발에 의존해 월남사 가람배치를 읽어본다. 소나무 한 그루와 탑과, 복원된 금당 외 텅 빈 듯 보이는 절터에, 열 지어 전각이 들어서고, 기와지붕이 중첩되며 월출산 능선의 흐름을 닮아간다.

    금당과 탑을 둘러싼 긴 회랑은 끊어지듯 이어져 안과 밖을 구분한다. 절의 중심 영역을 회랑으로 두르는 고대 사찰의 엄격성은, 이곳이 정해진 것으로부터 자유를 외친 선종 사찰이었음에도 지켜졌다. 그러나, 파격은 조용히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옆으로 긴 장방형의 금당이 이곳에선 정면과 측면이 똑같은 3칸짜리 정방형이다. 목탑의 1층을 연상시켰을 그 평면은, 한가운데에 부처님을 모실 최적의 구조였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다시 와 볼 수 있을까

    최대한의 고증을 거쳐 복원(2023년)했다는 지금의 금당을 둘러본다. 정면을 모두 창살문으로 처리했는데, 차라리 벽으로 마감하고 가운데 큰 나무문을 내었으면 어떨까 싶다. 금당터를 발굴할 때 백제 때 와당과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절의 연원을 훨씬 깊게 추정케 하는 증거다. 파격은 다시 석탑으로 이어진다. 원래 지금의 탑 한 기만이 서 있던 절터였으나, 발굴 결과 그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탑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동서 쌍탑 구조인데, 신라 때 유행했던 양식이 고려까지 이어진 모습에 학자들은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더 나아가 눈길을 끄는 것이 보물로 지정된 월남사지 3층 석탑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범으로 하는 백제계 양식의 탑이다. 아무리 백제의 강역이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서 가장 먼 이곳 땅이다. 그 땅에 수백 년 뒤 살던 사람들이 아직 그 역사를 기억하고 그 미의식을 면면히 이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인근 민가에서 발견되었다는 또 다른 탑의 지붕돌(옥개석)은 놀랍게도 신라 양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절터의 가람에는 백제식 탑과 신라식 탑이 나란히, 혹은 시차를 두고 공존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백제의 옛터 위에 신라의 양식이 섞이고, 그 위에 다시 고려의 기질이 덮인 이 독특한 배치는 월남사란 곳이 삼국과 고려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된 용광로였음을 짐작게 한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진각국사 혜심의 비(보물)가 비각 아래 묵직하게 서 있다. 비록 비신은 깨지고 마모되어 잘 알아볼 수 없으나, 비를 이고 있는 귀부(거북받침)는 입에 물고 있는 커다란 여의주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 장대하고 역동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진각국사탑비. 고려 진각국사 혜감 선사의 탑비로, 월남사지 서쪽 한 켠에 서 있다. 비신은 많이 상했지만 그 내용은 다행히 전한다고 한다.
    ▲진각국사탑비. 고려 진각국사 혜감 선사의 탑비로, 월남사지 서쪽 한 켠에 서 있다. 비신은 많이 상했지만 그 내용은 다행히 전한다고 한다. 이병철
    귀부의 발톱. 고려시대는 전 시대에 비해 조형미가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비석 받침인 귀부를 보고 있으면 밤마다 이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감탄한다.
    ▲귀부의 발톱. 고려시대는 전 시대에 비해 조형미가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비석 받침인 귀부를 보고 있으면 밤마다 이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감탄한다. 이병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월남사지는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나온다. 해서 본격적인 발굴조사 전까지는 그것이 통설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와당까지 출토된 까닭으로 절의 기원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물론 절을 크게 중창한 이는 진각국사였고, 고려의 왕실과 당시의 최씨 무신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특히, 진각국사에 대한 집권자 최우(?~1249년)의 관심은 각별했다. 진각국사의 와병이 깊음을 듣고 강화 천도의 와중에도 어의를 보내 살피게 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진각국사의 입적 몇 년 전부터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다. 혹 국사의 병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외침에 신음할 고려 백성의 고통이 느껴졌을 것이고, 이를 막지 못할 무신정권하 조정이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한의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영원하길 빌었을 월남사에서 국사는 무엇을 빌었을까. 월출산 위로 떠오른 달은 월남사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들판에도 똑같이 비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빛처럼 고려 백성 한 명 한 명이 모두 평안하길 빌지 않았을까.

    절의 중심영역 바깥으로 겹겹이 강당과 승방이 있었다고 한다. 저 위 월출산에서 보면 금당은 암술이요, 쌍탑은 수술이며, 겹겹의 전각은 꽃잎이 되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꽃은 곧 간절한 기원이요 민중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단 한순간도 평안치 못했을 이 땅의 민중에게 오늘 상상 속의 꽃을 바쳐본다.

    떠나는 순간에는 늘 이곳에 다시 와 볼 수 있을까 아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내가 다시 집을 나설 용기를 줄 것이요, 기꺼이 나그네가 되게 해 줄 것이다. 고마운 아쉬움이다. 아침에 덧입은 우비를 벗었다. 이 땅의 남쪽 끝에 서니 매서운 바람이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 #역사기행 #민중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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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국내여행을 다니는 중년의 직장인입니다. 글로써 세상과 교감하는 방법을 배우며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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