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타이베이의 일요일,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사진관을 차렸다

이주노동자의 삶, 자화상에 담긴 희로애락

등록 2025.11.21 10:14수정 2025.11.21 10:15
0
원고료로 응원
대만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공식적으로 노동시장에 편입된 지 30여 년이 흘렀다. 제조업과 어업 그리고 돌봄 노동까지 사회의 밑바닥을 떠받쳐왔지만, 그들의 노동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남아 있다.

2025년 기준, 대만의 이주노동자 수는 약 83만 명으로,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는 약 25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주돌봄노동자의 경우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해 한 달에 하루의 휴일 보장을 위해 아직도 싸우고 있다. 돌봄 노동의 경우 가정에서 고용주와 함께 생활하며 노동하고 근무 시간이 불명확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휴일 보장은 물론 근무 시간 명시 또한 큰 문제로 작용한다.

Covenants Watch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돌봄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80%가 넘는 노동자가 근로계약서에 하루 근무시간이 명시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이는 법정 휴일 보장뿐 아니라 24시간 지속되는 근무 조건 전반의 불투명성을 보여준다.

일요일은 그래서 대만의 이주노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의 중심지, 중산북로에 가면 이주노동자들이 일요일이면 삼삼오오 모이는 원원 빌딩이 있다. 원원 빌딩을 중심으로 일대는 일요일이면 리틀 마닐라라 불리는 거리로 변신한다. 거리엔 필리핀 음식과 화장품, 옷을 파는 노점이 들어서고 골목골목 평일엔 평범했던 상점들이 필리핀 노동자를 위한 노래방, 클럽으로 바뀐다. 공원에서 생일 파티를 하고 노래와 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는 일요일의 한복판에 나는 일일 사진관을 차리기로 했다.

원원 빌딩 전경 타이베이 중산북로에 위치한 원원 빌딩의 모습
▲원원 빌딩 전경 타이베이 중산북로에 위치한 원원 빌딩의 모습 정민식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질문은 간단했다.

How are you? (하우 아 유)

처음 영어를 배우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떠오르는 문장일 만큼, 영어권 국가는 물론 다양한 언어 문화권에서 쓰이는 질문이다. 자주 쓰이는 만큼 '하우 아 유'(How are you)에 대한 답도 정형화되어 버린 것도 사실인데, 한국인이라면 응당 'I'm fine, thank you and you?'를 떠올릴 것이다.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대만의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원원 빌딩 내 빈 상점을 하루 빌려 사진관을 차린 이유다.


원원 빌딩 일일 사진관 원원 빌딩 내 빈 상점을 빌려 차린 일일 사진관의 모습
▲원원 빌딩 일일 사진관 원원 빌딩 내 빈 상점을 빌려 차린 일일 사진관의 모습 정민식

대만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에 종사하기 위해 여러 이유로 대만에 건너와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 대만에서의 삶이 어떤지 들어볼 기회도, 물어주는 사람도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우 아 유'라는 질문은 지나가는 인사처럼 건네지지만 그에 대한 답을 차분히 정리하고 솔직한 마음을 나눌 기회도 쉽게 지나가 버린다. 그렇게 지나갔을 수많은 '하우 아 유' 뒤에 남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답을 적을 수 있는 종이와 펜, 그리고 답을 적을 때의 감정을 담아 자화상을 찍을 수 있게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했다. 우리 삶이 희로애락의 집합체인 것처럼 답변에도 정답은 없다는 안내를 했다. 지금의 솔직한 감정일 수도 있고, 질문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사진관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제일 먼저 종이에 마음을 적어 내려간 사람은 9년째 대만에서 일하고 있는 마야(Maya) 씨였다. 언어도, 거리도 낯설었던 처음의 두려움을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마야(Maya)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마야(Maya) 씨의 모습.
▲마야(Maya)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마야(Maya) 씨의 모습. 정민식

"처음에는 많은 것이 어렵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어 두려웠어요. 하지만 두 아이의 미래를 위해 강해져야 했습니다(At first here is difficult. I'm scared because far away from my family. But I need to be strong for the future of my two children)."

9년 동안 아이 둘의 미래를 위해 버텨온 마음은 카메라 앞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마야 씨는 동시에 대만에서 만난 따뜻한 인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고용주가 좋은 분이고 저를 가족처럼 대해줘서 정말 감사해요(I am very thankful, my employer is good and they treat me like family)."

다른 참가자 재스틴(Jastine) 씨는 이렇게 썼다.

"'엄마, 난 잘 지내요' 말하기는 정말 쉬워요. 하지만 영상통화를 끄고 나면, 너무 그리워서 눈물이 그냥 흐르죠('Mom, I'm doing okay' words that are easy to say. but when the camera turns off, your tears will just fall because you miss them so much)."

재스틴(Jastine)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재스틴(Jastine) 씨의 모습.
▲재스틴(Jastine)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재스틴(Jastine) 씨의 모습. 정민식

영상통화가 끝난 뒤에야 쏟아지는 눈물과 다시 시작되는 하루, 그리고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가족의 얼굴. 그 하루하루가 답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이들, 그 중 캐롤(Carol) 씨는 1997년에 대만에 도착해 지금까지의 긴 세월을 이렇게 돌아봤다.

"해외에 있으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겪게 돼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디느냐는 본인에게 달렸죠(Here abroad, you will experience both bad and good. It's up to you how you handle yourself)."

캐롤(Carol)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캐롤(Carol) 씨의 모습.
▲캐롤(Carol)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캐롤(Carol) 씨의 모습. 정민식

그 시간 동안 그는 땅을 마련해 집을 짓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언젠가 필리핀으로 돌아갈 때, 나는 성공한 모습일 것"이라는 그의 마지막 문장에는 열심히 달려온 자신을 향한 믿음과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담겨 있었다.

가족을 위해 대만에 왔지만, 이곳을 '두 번째 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지아넬린(Jeanelyn) 씨는 싱글맘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대만에 오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고된 노동 속에서 버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가족을 위한 꿈 하나로 버텨냈다고 적었다. 계속되는 우울과 불안 속에서 하나뿐인 남동생을 잃었던 시기엔 "더는 일어설 힘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의 어려움을 헤아린 고용주의 배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대만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생계의 공간을 넘어 마음을 추스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대만에서 번 돈으로 자녀가 상위권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사실을 큰 자랑으로 적으며 이렇게 답변을 마쳤다.

"대만을 사랑해요. 나의 두 번째 고향이자, 안전한 집. 이 나라는 가족을 위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줬어요(I love Taiwan, my second home, my safe home. This country helped me realize my dreams for my family)."

반면 에밀리(Emely) 씨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용 변경 속에서 '6년째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삶'을 털어놓았다. 그는 대만에서 이미 17명의 고용주를 거쳐야 했고, 그 사이에 결혼 생활도 무너져 싱글맘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했다.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가 없는 현실 속에서 그는 하루하루 버티며 자신을 지탱해 왔다. '강해져야 한다'는 그의 짧은 말 뒤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는 싱글맘이 되었어요. 그래도 삶은 계속되죠. 저는 강해져야만 해요(I became a single mom. but still, life goes on. I need to be strong)."

에밀리(Emely)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에밀리(Emely) 씨의 모습.
▲에밀리(Emely)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에밀리(Emely) 씨의 모습. 정민식

그러나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원 빌딩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스스로의 공간을 일궈낸 이도 있었다. 카르멜리타(Carmelita) 씨는 대만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매일의 노동 속에서 조금씩 쌓여가는 성취감을 느낀다고 했다.

새벽부터 준비해 손님을 맞이하고, 남은 시간에는 온라인 판매까지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삶. 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대만에서 번 돈으로 미래의 안전망을 만들고, 언젠가 자신의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주노동자로 사는 건 힘들어요. 하지만 언젠가 저축한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투자하고 있어요(It's hard to be an OFW. but I invest my hard-earned money so that someday I can go home with savings)."

카르멜리타(Carmelita)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카르멜리타(Carmelita) 씨의 모습.
▲카르멜리타(Carmelita)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카르멜리타(Carmelita) 씨의 모습. 정민식

대만에서 결혼해 작은 농사를 짓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답변도 있었다. 또 다른 이는 "힘들어도 가족을 위해 괜찮은 척하는 삶"을, 또 다른 누군가는 "그래도 이제는 잘 적응했고, 즐기며 살고 있다"는 답변을 남겼다.

종이 위에 적힌 '하우 아 유'의 답은 모두 달랐지만 가족을 위해 떠나온 시간 그리고 대만에 와서 겪은 고됨과 행복, 살아내기 위해 서로 다르게 선택해 온 방식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담겨 있었다. 어떤 이는 새로 뿌리를 내려 삶을 다시 만들었고, 어떤 이는 여전히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자화상을 찍는 그들의 표정에는 종이에 적힌 글보다 많은 흔적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한편, 1990년대 시작된 대만의 이주노동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살인적 브로커 비용, 장시간 노동 등 구조적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거리 투쟁으로 확장되었다. 그 흐름을 조직적으로 묶어낸 것이 MENT(Migrant Empowerment Network in Taiwan)이다.

제조업, 간병, 어선, 가사 노동 등 서로 다른 조건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가 모여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MENT는 대만 이주노동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네트워크가 2년마다 주최하는 이주노동자대회는 올해 12월에 열릴 예정이다. 이 대회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대만 사회가 보지 못했거나 보려 하지 않았던 노동 현실을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정치적 공간이자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을 조직하는 실질적 운동의 장이다.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지탱한다.

2023년 대만 이주노동자대회 이주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이 정부를 향해 제도 개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3년 대만 이주노동자대회 이주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이 정부를 향해 제도 개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민식

2023년 대만 이주노동자대회 이주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이 정부를 향해 제도 개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3년 대만 이주노동자대회 이주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이 정부를 향해 제도 개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민식

자화상의 표정들이 보여주듯, 그들의 삶은 고될지언정 단단했다. 서로 다른 말들 속에서 시오라(Xiora) 씨의 문장이 유난히 긴 여운을 남겼다.

"가끔은 행복하고 가끔은 외로워요 집만 한 곳은 없죠(SOMETIMES HAPPY, SOMETIMES LONELY. THERE'S NO PLACE LIKE HOME)."

시오라(Xiora)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시오라(Xiora) 씨의 모습.
▲시오라(Xiora) 씨의 자화상과 글 '하우 아 유'라는 간단한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자화상과 글로 기록한 이주노동자 시오라(Xiora) 씨의 모습. 정민식


덧붙이는 글 따갈로그어 답변의 번역은 Julia가 맡았습니다.
#대만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대회 #타이베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해안도로 곳곳에 나타나는 '경고'... 강릉 바다가 위험하다 해안도로 곳곳에 나타나는 '경고'... 강릉 바다가 위험하다
  2. 2 '평택' 밑으로는 인재 못 간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딨나 '평택' 밑으로는 인재 못 간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딨나
  3. 3 황혼 육아 고단함 날린, 며느리의 뜻밖의 선물 황혼 육아 고단함 날린, 며느리의 뜻밖의 선물
  4. 4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해?" 판사 제자에게 묻고 싶은 말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해?" 판사 제자에게 묻고 싶은 말
  5. 5 박찬대 40.5%, 박남춘 9.8%, 김교흥 5.4%...박찬대, 유정복에 오차밖 우세 박찬대 40.5%, 박남춘 9.8%, 김교흥 5.4%...박찬대, 유정복에 오차밖 우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