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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 가는 길에 보이는 바다, 그곳에 이순신이 있었다

경남 창원 웅천읍성과 제포, 웅포 해전의 바다를 찾아

등록 2025.11.23 14:29수정 2025.11.24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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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산세가 웅장하다. 그래서 '웅산'이라 불렀을까? 불모산과 위아래로 나란한 봉우리다. 바다 가까이에서 우뚝 솟아올랐으니, 웅천읍성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높고 험준한 산들이 사방으로 뻗어 땅을 가르고, 공간을 나눴다. 서쪽은 안민고개를 지나 장복산에 잇닿은 산세가 진해와 창원을 갈랐고, 동쪽은 굴암산을 잇대어 김해와 웅천으로 나뉘었다. 그 한가운데서 웅산과 불모산이 남북으로 장성처럼 막아서서, 동과 서를 완전하게 갈라쳤다.


웅천현(1872년_지방지도_부분) 웅천 전체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맨 위에 熊巖(웅암)이라는 지명이 '곰메'이고, 중간의 北川(북천-동천)이 '곰내'다. 네모난 웅천읍성에 4대 문이 또렷하고, 동헌과 객사가 그려져 있다. 바다 쪽으로 왼쪽부터 古右水營(고우수영)과 齊浦鎭(제포진) 자리가 '제포왜관'이고, 外南山倭城(외남산왜성-웅천왜성) 자리가 웅포만이다. 그 아래로 안골포까지 표현되었다.
▲웅천현(1872년_지방지도_부분) 웅천 전체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맨 위에 熊巖(웅암)이라는 지명이 '곰메'이고, 중간의 北川(북천-동천)이 '곰내'다. 네모난 웅천읍성에 4대 문이 또렷하고, 동헌과 객사가 그려져 있다. 바다 쪽으로 왼쪽부터 古右水營(고우수영)과 齊浦鎭(제포진) 자리가 '제포왜관'이고, 外南山倭城(외남산왜성-웅천왜성) 자리가 웅포만이다. 그 아래로 안골포까지 표현되었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웅산 꼭대기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곰 모양 바위가 있다. 그래서 '곰메'라 불렀고, 한자로는 熊山(웅산)이 되었다. 곰메에서 발원한 동천이 읍성 동쪽으로 흘러 웅포로 빠져나가니 '곰내'가 되었다. 이 역시 한자로 熊川(웅천)이다. 그러니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곰의 기상이 이 작은 분지를 가득 채운 셈이다. 일찍이 웅천은 근동의 중심지였다.

제포만 세종대왕의 삼포개항(1426) 때 왜구에 문을 연 제포만. 괴정마을 앞바다다. 잔잔한 바다가 천혜의 항구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제포만 세종대왕의 삼포개항(1426) 때 왜구에 문을 연 제포만. 괴정마을 앞바다다. 잔잔한 바다가 천혜의 항구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이영천

조선 초에는 제포와 웅포가 본고장이었다. 대마도 정벌 후, 흉포한 왜구에게 세종대왕이 펼친 햇볕정책이 삼포개항(1426)이다. 그때 개항한 세 항구 중 하나가 제포다. 이곳에 왜관을 두어 무역을 허락 함으로써 극심한 왜구의 노략질을 제어하려 했다. 제포와 웅포는 마치 쌍둥이 같은 포구였다.

마산만은 러시아가, 진해만은 일본이 노린 바다였다. 러일전쟁 결과로 둘 다 일본 차지가 되었고, 한미한 진해에 군항이 들어섰다.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의 진해가, 장복산 아래에서 군사도시로 거듭났다. 진해로 들어온 마지막 철도역이 바다로 통한다는 '통해역'이다. 일제의 주도로 성장한 진해가, 거꾸로 웅천을 쇠락으로 밀어 넣었다.

삼포개항

11월 초, 제포 앞바다에 서니 짭조름한 내음이 먼저 인사를 건네온다. 제포진성이 있었던 제덕마을 앞바다는 이제 메워져 농토가 되었다. 진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왜관이 있었던 괴정마을 앞바다도 절반이 메워져 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수풀만 무성한 왜관 터로 인해, 공사 중이던 도로의 삽날이 멈춰 서 있다. 삼포왜란 당시 피로 물들었다는 해안선은 바다로 한참 밀려나 있다. 파도가 느리게 몸을 굽혀 바위에 부딪히고, 그 소리에서 오래전 이곳을 드나들던 왜의 무역선 그림자가 묻어난다.

600년 전, 세종은 괴정마을 앞바다를 열어 왜구에게 무역을 허락했다. 먼바다를 건너온 왜인들이 이 포구에 닻을 내렸고, 조선의 곡식과 면포를 사서 다시 바다 건너 돌아갔을 것이다. 이 작은 포구는 그때 이미 국제무역항이었다.


제포왜관 터 괴정마을 뒷산의 구릉성 경사지의 수풀에 갇힌 왜관 터. 사진 오른쪽 안내판만이, 이곳이 활발한 무역이 이뤄지던 왜관 터였음을 보여준다.
▲제포왜관 터 괴정마을 뒷산의 구릉성 경사지의 수풀에 갇힌 왜관 터. 사진 오른쪽 안내판만이, 이곳이 활발한 무역이 이뤄지던 왜관 터였음을 보여준다. 이영천

잡초만 무성한 옛 왜관 터를 천천히 살핀다. 수풀에 가려 흔적마저 희미하지만,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그러나 이 터가 평화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삼포왜란(1510)의 칼과 불길이 뒤엉켜, 100년 교류의 역사가 피로 얼룩지기도 했다.

왜구의 삶은 거칠었다. 그래서일까, 초기 제한되던 왜인이 100년 사이 5천여 명으로 불어난다. 해적은 물론 불법 무역도 횡행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이 왜인 수를 제한하고 무역을 통제한다.

제포왜관 명문기와 기와 편에 大明正德八年春造(대명정덕팔년춘조-1513년)라는 글자가 명확하다. 2019년 3월, 도로를 공사하던 중 건물 흔적과 그릇, 기와편이 쏟아졌다. 이 기와편으로 제포왜관 터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제포왜관 명문기와 기와 편에 大明正德八年春造(대명정덕팔년춘조-1513년)라는 글자가 명확하다. 2019년 3월, 도로를 공사하던 중 건물 흔적과 그릇, 기와편이 쏟아졌다. 이 기와편으로 제포왜관 터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창원시청

제포왜관 규모가 가장 컸으니, 왜구 저항도 그만큼 강했다. 대마도주와 사전 모의라도 한 듯 동시에 도발이 이뤄진다. 제포가 화염에 휩싸이고 조선 백성이 학살당한다. 조선군의 진압에, 왜인이 거의 몰살되고서야 난이 잦아든다.

피로 물들었다는 제포가 맑고 잔잔하다. 그때를 회상하듯 바람에 밀린 갈매기가 빙글 돌며 날아간다. 그래서인지 바다 내음이 유난히 웅숭깊다. 잔잔히 일렁이는 파랑은, 그때 아우성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웅천읍성

보드라운 햇살이 내려앉은 고을이 아늑하다. 그리 넓지 않은 길을 지나자 돌로 쌓은 탄탄한 성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웅천읍성이다.

동헌과 객사 터 왼쪽 고등학교 자리가 웅천읍성의 동헌, 오른쪽 '곰내유치원' 자리가 객사 터다. 아름드리 나무가 읍성의 오랜 역사를 친절히 설명하고, 멀리 웅산 꼭대기에 곰바위가 살짝 보인다.
▲동헌과 객사 터 왼쪽 고등학교 자리가 웅천읍성의 동헌, 오른쪽 '곰내유치원' 자리가 객사 터다. 아름드리 나무가 읍성의 오랜 역사를 친절히 설명하고, 멀리 웅산 꼭대기에 곰바위가 살짝 보인다. 이영천

성벽은 높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저 세월을 견뎌낸 돌들이 정연하게 쌓여 묵직하다. 관아 자리엔 고등학교가, 객사 터는 유치원이 차지했다. 이름도 어여쁜 '곰내유치원'이다. 북쪽 성벽은 사라졌고, 남쪽과 서쪽 성벽은 드문드문 흔적만 남았다. 남문 터에 서니 시장으로 번성했을 읍성이 그려진다.

왜의 사신은 동래부사가 맞았으나, 무역으로 활로를 찾으려는 대마도 왜구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제포왜관의 몸집이 커진 이유다. 이에 왜관을 통제·관리할 필요성과 시급성이 대두한다. 1437년 세종의 명령으로 읍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둘레 1.1km에 불과하지만 맡은 역할마저 가벼운 건 아니었다.

웅천읍성 복원된 읍성의 동문과 동쪽 성벽. 동문 옹성과 그 앞의 넓고 깊은 해자가 가지런하다. 성벽이 높거나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더 튼실해 보인다.
▲웅천읍성 복원된 읍성의 동문과 동쪽 성벽. 동문 옹성과 그 앞의 넓고 깊은 해자가 가지런하다. 성벽이 높거나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더 튼실해 보인다. 이영천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었다. 제포왜관 때문에 쌓은 읍성은, 무역과 방어의 최전선이었다. 동문을 중심으로 동쪽 성벽이 복원되었다. 문루에 오르니 성안을 바삐 오갔을 왜관 상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문을 드나드는 조선 관리와 군졸들도 잰걸음이다.

임진년, 이 성을 점령한 왜군이, 웅포 아래 남산에 왜성을 쌓았다. 모름지기 그때 웅천읍성이 헐리지 않았을까? 웅포 건너 안골포와 진해 쪽 명동에도 왜성을 쌓았으니, 왜가 이 지역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때 웅천읍은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 북소리, 함성, 아비규환, 포격과 화살 날아가는 소리.

동문(견룡문) 읍성 동문인 견룡문(見龍門)의 문루와 옹성. 강직한 직선의 성벽이 완고해 보이고, 멀리 웅산의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섰다.
▲동문(견룡문) 읍성 동문인 견룡문(見龍門)의 문루와 옹성. 강직한 직선의 성벽이 완고해 보이고, 멀리 웅산의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섰다. 이영천

문루에서 보는 성벽이 강한 직선이다. 멀리 돌출된 치성은 마치 용맹한 장수 같다. 무참하게 침략해 오는 왜를 격퇴하는 자세다. 읍성 밖 산 너머로 진해만이 양양하다. 왜군이 이 바다를 차지하려 덤빈 이유가 짐작된다. 잔잔한 바다와 포구, 내륙으로 이어지는 큰길과 분지가 이룬 평야. 이를 어찌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왜로 통하는 바다 아니던가?

성곽 밖엔 깊은 해자가 가지런하다. 넓이는 물론 조교를 두어 방어력을 높이려 한 의도가 돋보인다. 성벽과 해자에 쌓인 돌이 예사롭지 않다. 수많은 발길과 비바람을 견디며, 웅천의 역사와 백성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돌들이다.

성벽을 어루만져본다.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웅천읍성이다. 성곽이 지켜낸 이 고장의 아득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누구에게라도 들려줄 듯 의젓하다.

웅포 해전

임진년부터 조선 바다는 전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산진성 공격으로 촉발된 왜의 침공은 한양을 지나 평양과 함경도에 이르렀고, 조선은 속절없이 무너질 듯 보였다. 하지만 바다는 달랐다. 거기에 이순신이 있었다.

웅포만 좁던 웅포만의 남쪽이 다시 메워져 더 좁아졌다.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이 이 해협을 오가며, 왜군을 공격했다. 웅천왜성 오르는 남산 중턱에서 가덕도 방향으로 바라 본 모습이다.
▲웅포만 좁던 웅포만의 남쪽이 다시 메워져 더 좁아졌다.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이 이 해협을 오가며, 왜군을 공격했다. 웅천왜성 오르는 남산 중턱에서 가덕도 방향으로 바라 본 모습이다. 이영천

웅포 해전은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읍성 쪽으로 파고든 둥근 웅포 만에서 벌어졌다. 평양을 되찾은 뒤 내려진 왕의 조급한 명령은, 부산포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기꺼이 진군한다. 다만 배후를 정리해 두어야 했다. 부산포 공격 전초전이다. 웅포 왜성에 생쥐처럼 웅크린 왜군을 먼저 소탕해야 했다.

이순신은 이미 옥포·사천·당포·한산도·안골포 등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며 남해안을 완전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점차 압박을 느낀 왜는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웅포 앞바다는 조류가 세고 바닷길이 좁아 대형 함대가 움직이기에 불편한 곳이다. 이순신은 안골포에서처럼 그 점 또한 역이용한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바깥 바다에 배치해 적의 퇴로를 차단한다. 좁은 바다에 적을 가두려는 전술이다. 이어 천자총통이 장착된 판옥선 두어 척으로 좁은 웅포만을 들쑤신다.

웅천왜성 웅천의 남산이다. 산 꼭대기에 웅천왜성의 성벽이 남아 있다. 수풀이 우거져 접근이 쉽지 않았다. 사진 오른쪽이 메워져 도시화가 진행 중인 웅포만이다.
▲웅천왜성 웅천의 남산이다. 산 꼭대기에 웅천왜성의 성벽이 남아 있다. 수풀이 우거져 접근이 쉽지 않았다. 사진 오른쪽이 메워져 도시화가 진행 중인 웅포만이다. 국립진주박물관

판옥선이 들고나며 대포로 왜성과 왜선에 포격을 가한다. 승군을 상륙시켜 벌인 백병전이 무려 5차례다. 왜선 절반을 격침 시킨다. 무수한 왜군이 수장된다. 대승이다. 이 승리로 남해안 제해권이 더욱 굳건해진다. 왜군은 육상 진격에 필요한 보급로가 끊겨 궁지에 내몰린다.

웅포 해전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이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하나의 사례다. 바다를 이해하고, 조류와 지형을 읽고,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해내는 전술적 감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전투였다.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승리가 아닌 지혜의 승리였다.

웅포만 1593년 2월부터 3월까지, 1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왜의 함선과 왜성을 공격했던 웅포만. 이제는 많이 메워져 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웅포만 1593년 2월부터 3월까지, 1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왜의 함선과 왜성을 공격했던 웅포만. 이제는 많이 메워져 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이영천

웅포는 이젠 절반 가까이 메워져 도시가 되었다. 상전벽해다. 남겨진 웅포의 맑은 물을 보며 그날의 전장을 그려 본다. 포성이 울리고, 물보라가 일었다. 왜성에서 총탄이 날아들어도, 판옥선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적선에 불이 옮겨붙는 순간, 진퇴양난에 빠진 왜군이 우왕좌왕한다. 이 바다는 그토록 침착한 지략가가 위대한 승리를 일궈낸 전장 터다.

반쯤 메워진 웅포의 모습이 어딘지 어색하다. 그러나 질문에는 무게가 실렸다. 곰바위처럼, 하늘을 향해 포효한 조선 수군의 지략과 기상을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올곧게 잇고 있는가?
#웅천읍성 #제포 #웅포 #삼포개항 #웅포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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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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