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섭식장애연구컨소시엄(CoRe-ED)에 제안한 한국-호주 연구 프로젝트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단체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호주의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연구자 로지엘 엘윈, 호주 정신질환 당사자 인권운동가 사이먼 카털과 함께 두 국가가 '당사자 지식'을 인정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를 컨소시엄에 제안하기도 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혁신'이라는 신용과 국가적 문맹
한국 보건·기술 정책의 거의 모든 모순을 관통하는 핵심은, 오늘날 글로벌 기술정치에서 '혁신(innovation)'이라는 언어가 더 이상 기술적 개념이 아니라 금융적 언설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혁신은 이제 어떤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구에게 어떤 효과를 내는지, 어떤 위해를 유발하는지와 무관하게 통용되는 일종의 신용(credit) 언어다.
미셸 페어(Michel Feher)의 지적처럼, 기업은 더 이상 상품을 판매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용자산으로 관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기업이 확보해야 하는 것은 시장 점유율이나 임상 근거가 아니라, 자신이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평판의 연쇄다. 투자자 브리핑, 국회 토론회 스폰서십, 정부 발표문, 언론 인터뷰, 전문가 패널, 컨퍼런스가 서로를 인용하며 하나의 거대한 자기증식적 신용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혁신은 검증을 통과하는 실재가 아니라, 검증을 대체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이 신용 체계에서 한국 정부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문해력이 낮은 행위자다.
기술의 실제 작동 구조, 알고리즘의 위험, 보건역학, 데이터의 정치경제, 플랫폼 노동 구조, 돌봄 재분배 효과, 지역·계층 간 접근성의 격차에 대해 최소한의 평가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정부는 기업이 발행한 '혁신 채권(innovation bonds)'을 사실상 조건 없이 구매하는 최대의 신용 수요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기술의 위해와 작동 경로, 악화되는 증상, 불평등의 확대, 삶의 질의 하락을 가장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집단은 공무원도, 기업도, 의사단체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술을 매일 사용하며 몸으로 그 결과를 감식하는 당사자 경험 집단, 즉 사용자들이다. 위험한 추천 알고리즘이 어떻게 절제·자책·체중 집착을 강화하는지, 접근성이 높아진 척하며 실제로는 취약성을 어떻게 심화시키는지, 앱의 인터페이스가 어떤 행동 패턴을 유도하는지, 원격의료가 어떤 환자에게 돌봄의 공백을 만드는지에 대한 지식은 피해·위험·기능의 축적된 관찰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감정적 서사가 아니라 정밀한 역학적 데이터이며, 기술 정책을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해상도 높은 판단 체계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 지식을 제도화하지 않았고, 당사자 경험을 정책 근거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혁신이 가져오는 위해와 불평등을 감정할 체계도 구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은 기업이 만들어낸 '혁신' 언어를 국가 정책의 언어로 그대로 받아쓰는 세계적으로 드문 정부가 되었고, 혁신을 승인하면서도 그 혁신이 낳는 사회적 결과에 대한 정책적 책임(accountability) 역시 사실상 방기해왔다.
책임 구조의 재설계와 '주권적 이용자'
국가가 특정 기술이나 플랫폼에 공공 기능을 위임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위임된 책임이다. 원격의료든, 새벽배송 기반 생활 인프라든, 디지털 멘탈헬스 앱이든, 한 번 '허용'하고 '도입'한 이상 국가는 그 기술이 만들어낸 사회적·임상적·경제적·데이터적 결과에 대해 정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사후 보고의 의무다. 기업이 자본시장에서 신용을 얻기 위해 연례보고서를 쓰고, 시민단체가 기금과 신뢰를 위해 임팩트 리포트를 작성하듯이, 이제 정부도 자신이 집행한 정책과 도입한 기술의 총합을 시민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제출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상투적인 백서나 자화자찬식 홍보가 아니라, 자신이 행사한 공권력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책임 보고다. 나는 그것을 국가 책임 보고서(National Accountability Report)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 책임 보고서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가 이 정책과 기술을 도입한 결과, 이만큼의 이익과 이만큼의 위해가 발생했고, 그 피해와 비용은 이런 방식으로 분배되었다"라는 문장에 증거를 붙여 공개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정책 도입의 근거와 전제, 예상했던 효과와 위험, 실제로 관측된 건강 지표와 악화·누적 위해, 지역·성별·연령별 불평등의 변화, 국민과 돌봄·플랫폼 노동자에게 전가된 비용, 데이터와 프라이버시 침해, 실패로 판명된 선택과 그 교정 조치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책과 기술의 결과를 매일 자기 몸과 생활세계에서 감식해 온 당사자 경험 집단의 평가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국가는 공적 신용(public credit)을 먹고 사는 존재다. 시민의 생명과 건강, 안전, 데이터, 시간과 세대를 담보로 정책을 집행한다면, 그 담보를 어떻게 사용했고 어디까지 실패했는지, 시민에게 정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이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평가 주체와 새로운 언어일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소비자(consumer)'가 아니라 '주권적 이용자(Sovereign Users)'라 부르고자 한다. 한국어에서 '소비자'라는 말은 여전히 상품과 서비스, 가격과 품질의 언어에 묶여 있다. 국가 정책과 공공 기술을 감정하고 신용등급을 매기는 주체를 가리키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약하다.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다르다. 우리는 기술과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놓인 사용자이자, 그 결과를 몸으로 감식하는 포렌식 평가 계급이다.

▲호주 정신질환 당사자 인권운동가 사이먼 카털의 응원 메시지 최근 호주 퀸즐랜드주 정신질환 당사자 단체의 '상위 대표기구(peak body)'인 Mental Health Lived Experience Peak Queensland의 대표를 맡기도 한 사이먼 카털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섭식장애 치료 및 지원 정책 마련을 촉구하는 국가 청원에 대한 응원 메시지 요청에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한민국은 2008년 UN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한 국가이며, 이는 한국 정부가 당사자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당사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며 질적으로 우수한 정신보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그 지원은 당사자들에 의해 설계되고 실제로 운영되기까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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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최대의 섭식장애 단체 Butterfly Foundation의 응원 메시지 호주 최대의 섭식장애 자선단체인 Butterfly Foundation은 두 딸이 거식증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아야 했던 어머니 클레어 미들턴(Claire Middleton)이 2002년 설립한 단체로, 지난 20여 년 동안 호주의 섭식장애 정책·지원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온 가장 영향력 있는 상위 대표기구(peak body)다. 재단은 국가 차원의 24/7 헬프라인과 상담 서비스를 운영하며, 학교·지역사회 기반 예방 교육, 가족 및 케어러 지원, 의료진 교육을 전국적으로 제공해 왔다. 또한 정부 정책 자문, 연구 지원, 데이터 구축, 법·제도 개선을 주도하며, 섭식장애와 신체이미지 문제를 공중보건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주권적 이용자'의 권한은 대표성(representation)에 있지 않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발언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미 집행된 정책과 기술의 결과를 우리가 직접 평가(evaluation)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어떤 기술이 증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알고리즘이 어떤 집단에게 어떤 위험을 집중시키는지, 어떤 의사결정이 불평등을 어떻게 심화시키는지에 대한 가장 정밀한 지식은, 그 충격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 있다.
세계는 이미 이 방향으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환자와 당사자가 AI 의료 윤리 강령과 기술 지침의 공동 저자로 참여하고, 의료기기 데이터 접근권 운동은 "환자는 소비자가 아니라 기술의 공동 설계자"라는 말을 실천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국과 호주에서는 당사자 단체가 국가 전략을 사전 검토하며 사실상 비토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술 포렌식 영역에서는, 자본시장과 규제기관보다 먼저 사용자와 내부자의 관찰이 기업의 '혁신'이 실제로 어떤 허구적 신용 구조 위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평가 권력은 전문가 테이블에서 점점 사용자 테이블로, 더 정확히 말하면 영향을 받는 이들의 몸과 언어로 이동 중이다.
한국은 아직 그 변화의 문턱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섭식장애 치료 및 지원 공백은 그 사실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새로운 이름을 발명하고 새로운 책임 구조를 요구하는 일에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정책과 기술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이제 우리가 감정하고 평가하겠다"고 선언한다.
혁신이라는 말 하나로 모든 실패를 덮고 면죄부를 발급받던 시대는 끝나야 한다. 한국 사회는 그 전환점 위에 서 있으며, 그 전환을 감식하고 기록할 새로운 포렌식 평가 계급이 이미 이곳에서,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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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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