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징대학 전경. 이곳에는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연구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만 취재진이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간함양
중국을 핏빛으로 물들게 한 문화대혁명
"우리는 난징에서 살고 있는 3·4세 후손들이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족보를 모두 불태워 조상의 뿌리를 알 수 없습니다. 이곳 난징은 30만 명이 희생된 아픈 땅이지만 문화혁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문화혁명과 관련한 유적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문화혁명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난징대학살의 아픔을 간직한 중국 난징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칼바람을 피해갔을까.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시작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홍위병을 동원해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을 타파한다며 전국적 혼돈과 파괴를 초래한 사건이다. 1969년 공식적으로 종료가 선언됐지만 사실상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시점을 실제적인 문화대혁명의 종료로 보고 있다. 이를 '십년 대동란'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 실패로 권위가 약화된 마오쩌둥이 학생과 민중을 동원해 권력 재부상을 꾀한 권력투쟁 성격이 강했다. 문화대혁명은 표현과 달리 자국의 문화를 자국민들의 손으로 멸절시키려 한 대규모 반달리즘(vandalism, 훼손행위)으로 평가된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내에서는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이 고전 저작을 불태우고 명승고적을 파괴하며, 사람들을 잡아 심판·처벌하고 지도기관을 파괴했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는 등 사회 전반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대량학살도 일어났다. 베이징의 '붉은 8월'을 시작으로 광시대학살, 내몽골사건, 광동대학살 등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망자는 수십만에서 2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1981년 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의 과오로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새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실수'이자 '심각한 재난'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국 내 전국적으로 단행된 혁명인 만큼 난징대학살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난징 지역도 마우쩌둥의 칼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대학살이 벌어진 지 30년도 채 안된 시점인 만큼 난징시민들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의 경우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족보를 불태우며 그 근간마저 무너져버리는 아픔을 겪었다.
이로 인해 난징은 직접적인 연관성보다는 난징대학살 등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중국 내 반일·반제국주의 정서와 결합해 마오쩌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난징 시민들은 문화대혁명 시기 사회적 혼란과 이념적 억압을 경험했다. 난징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활동 무대 중 하나였으나, 전국적 차원의 운동인 만큼 난징만의 특수성은 크지 않다.
중국 난징에서 취재팀의 안내와 통역을 맡은 김아무개 씨는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난징도 그 피해를 피해가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는데 문화대혁명 피해를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유적지는 없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면서 "다만 족보도 다 태우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뿌리를 잃게 되는 간접적인 피해는 있다"고 말했다.
공동취재팀(태안신문 김동이 기자, 낭주신문 장정안·박준영 기자, 주간함양 임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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