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칼놀음'에 30만 명 희생, 또다른 칼바람까지 맞은 이곳

[공동기획] 지워지지 않는 민간인 학살의 역사, 끝나지 않는 아픔 (5)

등록 2025.11.24 11:46수정 2025.11.2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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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진 대한민국. 7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영암, 충남 태안, 경남 함양 등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혹은 한국군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과와 추모, 용서 없이 75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낸 채 살아오고 있다. 이에 낭주신문·태안신문·주간함양은 공동취재팀을 구성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을 가진 대전 골령골과, 여순사건의 아픔이 서린 전남 여수·순천, 4·3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평화공원, 그리고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찾아 민간인 학살 피해지역의 실상과 피해자 유족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말]
 난징대학살희생자 기념관 내에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탑이 서 있다.
난징대학살희생자 기념관 내에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탑이 서 있다. 주간함양

화가 났다. 치가 떨렸다. 아직도 땅속에 발굴되지 못한 수많은 희생자들이 그대로 묻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메여왔다. 난징대학살 희생자 기념관 밖에 놓인 자갈 하나하나가 마치 억울한 사연을 안고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담은 듯 보였다.

30만 명. 일본군의 만행으로 단 두 달 만에 참혹하게 희생된 중국 남경(난징)에서 벌어진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다. 중국 난징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던 일제강점기 중이었던 1937년 12월 대참사가 벌어진 곳이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당시 중화민국 수도 난징을 점령한 뒤, 난징과 그 주변으로 피신한 중국군 패잔병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단 두 달 동안 자행한 대규모 민간인·비전투원 학살과 광범한 성폭력·방화·약탈한 사건이다.

 난징대학살희생자기념관 내에 전시돼 있는 일본군 두 장교의 ‘백인 베기 초기록’ 기사와 두 자루의 일본도
난징대학살희생자기념관 내에 전시돼 있는 일본군 두 장교의 ‘백인 베기 초기록’ 기사와 두 자루의 일본도 주간함양

30만 명의 억울한 죽음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관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장면이 있다. 일본도를 손에 지팡이처럼 받치고 뿌듯한 듯 미소를 짓는 두 일본군의 얼굴. 그리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보도한 일본 언론. 난징대학살 희생자 기념관 내에는 이들 일본군 장교들의 '백인 베기 초기록'이라는 도쿄 일일신문의 난징대학살 초기인 1937년 12월 13일자 신문기사와 함께 일본군 두 장교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도 두 자루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의 수많은 전시공간 중 칼 두 자루와 함께 신문기사가 걸린 이곳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분노를 사고 있다.

당시 일본 일일신문에 실린 이 신문기사의 제목은 '백인 베기 초기록', 부제는 '무카이(向井) 106-105 노다(野田), 양 소위 연장전'이라고 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인간성을 말살됐고 잔혹하게 일본도로 사람의 목을 베는 참수하는 '놀이'처럼 여겼다.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이라는 특이한 경쟁을 시작한 이례적인 카타키류 부대의 용사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츠요시"로 시작하는 기사는 "두 소위는 10일간 자금산 공략전에서 106대 105라는 기록을 만들고 10일 정오에 서로의 칼날을 지닌 일본도를 한 손에 쥐고 만났다. 노다 왈 '이봐, 난 105명인데 너는?', 무카이 왈 '난 106명이다!' 두 소위는 서로 웃더니 결국 어디까지 누가 먼저 100명을 베었는지 묻지 않기로 하고 '이건 비겼다. 하지만 150명은 어떤가?' 하여 일치단결해 10일 이내에 150명을 참수하기 시작했다. 11일 낮에 중산릉이 내려다보이는 자금산에서 패전병 사냥에 한창이던 무카이 소위가 100인 참수에서 무승부의 결말을 위해 (중략) 두 사람은 100명을 넘기면 원래 서로의 칼을 내기로 하였다더라"고 적혀 있다.

이 두 일본군 장교는 결국 이 기사가 난징전범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채택돼 결국 사형됐다.


 난징군사법원에서 열린 난징전범재판의 증인들과 증언들
난징군사법원에서 열린 난징전범재판의 증인들과 증언들 주간함양

이곳을 지나자 20여 명의 얼굴들이 내걸린 공간이 나왔다. 이곳은 난징군사법원에서 열린 난징전범재판의 증인들과 증언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의 증언으로 난징대학살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참혹한 실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태안군 내에서도 1000여 명이 넘는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가운데 현재 이원면 집단희생사건에 대한 1심 공판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내년 1월 15일 선고를 앞두고 있는 이원면 집단희생사건의 경우에도 수많은 증인과 증언이 있었기에 진실규명이 가능했고,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국가 손해배상도 가능했다. 진실이 살아있는 한 억울함 죽음은 앞으로도 없어야 할 것이다.

 난징대학 전경. 이곳에는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연구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만 취재진이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난징대학 전경. 이곳에는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연구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만 취재진이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간함양

중국을 핏빛으로 물들게 한 문화대혁명

"우리는 난징에서 살고 있는 3·4세 후손들이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족보를 모두 불태워 조상의 뿌리를 알 수 없습니다. 이곳 난징은 30만 명이 희생된 아픈 땅이지만 문화혁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문화혁명과 관련한 유적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문화혁명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난징대학살의 아픔을 간직한 중국 난징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칼바람을 피해갔을까.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시작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홍위병을 동원해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을 타파한다며 전국적 혼돈과 파괴를 초래한 사건이다. 1969년 공식적으로 종료가 선언됐지만 사실상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시점을 실제적인 문화대혁명의 종료로 보고 있다. 이를 '십년 대동란'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 실패로 권위가 약화된 마오쩌둥이 학생과 민중을 동원해 권력 재부상을 꾀한 권력투쟁 성격이 강했다. 문화대혁명은 표현과 달리 자국의 문화를 자국민들의 손으로 멸절시키려 한 대규모 반달리즘(vandalism, 훼손행위)으로 평가된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내에서는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이 고전 저작을 불태우고 명승고적을 파괴하며, 사람들을 잡아 심판·처벌하고 지도기관을 파괴했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는 등 사회 전반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대량학살도 일어났다. 베이징의 '붉은 8월'을 시작으로 광시대학살, 내몽골사건, 광동대학살 등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망자는 수십만에서 2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1981년 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의 과오로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새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실수'이자 '심각한 재난'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국 내 전국적으로 단행된 혁명인 만큼 난징대학살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난징 지역도 마우쩌둥의 칼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대학살이 벌어진 지 30년도 채 안된 시점인 만큼 난징시민들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의 경우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족보를 불태우며 그 근간마저 무너져버리는 아픔을 겪었다.

이로 인해 난징은 직접적인 연관성보다는 난징대학살 등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중국 내 반일·반제국주의 정서와 결합해 마오쩌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난징 시민들은 문화대혁명 시기 사회적 혼란과 이념적 억압을 경험했다. 난징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활동 무대 중 하나였으나, 전국적 차원의 운동인 만큼 난징만의 특수성은 크지 않다.

중국 난징에서 취재팀의 안내와 통역을 맡은 김아무개 씨는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난징도 그 피해를 피해가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는데 문화대혁명 피해를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유적지는 없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면서 "다만 족보도 다 태우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뿌리를 잃게 되는 간접적인 피해는 있다"고 말했다.

공동취재팀(태안신문 김동이 기자, 낭주신문 장정안·박준영 기자, 주간함양 임아연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주간함양에도 실렸습니다.
#공동기획_지워지지 #않는 #민간인 #학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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