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왔다가는 불행, 어떻게 맞이해야할까

[김성호의 독서만세 290] 이꽃님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등록 2025.11.26 15:30수정 2025.11.2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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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내게도 있었다. 그런 계절이. 더없이 가까워서 삶 전체를 반으로 똑 잘라 나누어줄 수 있겠다 싶었던 친구를 한 순간에 잃은 때가 있었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친구의 집이 조금 먼 동네로, 그러니까 초등학생은 감히 홀로 오갈 수 없는 거리로 이사를 가면서였다. 아버지의 이직 때문이라고 했다. 이직도, 이사도, 전학도 세상에 흔한 것이지만, 친구를 잃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어렸고, 대처할 수 없었다.

더 심각한 일도 있었다. 이후 사귄 가까웠던 친구가 병에 걸렸다고 했다. 백혈병이었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동네 공터에 나가면 늘 있던 친구였다. 공과 글러브, 방망이만 가지고도 우리는 몇 시간이고 어울리며 던지고 치고 잡고 달리고는 했다. 그런 친구가 어느 날부터인가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끝끝내 돌아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루는 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문병을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친구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머리를 빡빡 민 내 친구는 헤 하고 웃기만 했다. 그것이 영영 마지막일 줄은 알지 못했다. 나는 또 한 번 친구를 잃었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내 의사를 묻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내 중요한 것을 망가뜨리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사라진다. 돌이켜보면 그런 악독한 계절이 내게도 있었다.

모든 것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질 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책 표지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책 표지 문학동네

열여섯 고등학생 하지오에겐 삶이 가혹하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온 아이다. 어머니 혼자 저를 키운단 게 무언가 이상하단 걸 알아챘을 무렵, 지오는 유도를 시작했다. 어머니를 지키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믿어서였다. 무엇이든 업어치고 메칠 수 있게 되면 아버지가 없어도 될 테니까.

아버지가 없는 것이 지오의 의지가 아니었듯, 아버지와의 삶도 지오의 뜻은 아니었다. 그건 차가운 계절이 끝나고 뜨거운 계절이 다가오듯,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다. 어느 식사 자리, 아무렇지 않게 전학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선택지는 없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을 앓고 있었고, 그 전까진 살아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제가 보내질 예정이라 했다. 그렇게 지오는 생전 가본 적 없는 낯선 동네 경상북도 정주군 번영읍으로 가게 된다.

책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는 시골마을로 전학 온 지오와 그곳에서 만난 독특한 아이 유찬의 이야기다. 지오와 유찬의 시선으로 번갈아 펼쳐지는 소설은, 두 아이가 서로를 제 안에 들이는 과정이자 불완전했던 삶을 충실하게 메워가는 이야기다. 제 온 세계였던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단 사실을 안 지오다. 살아있는 줄도 몰랐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해소할 길 없는 분노가 쌓인다. 잔뜩 흔들린 탄산음료처럼 누가 뚜껑만 따 주면 바로 터져 나올 듯 불안하다.


유찬의 삶에 지오가 들어온 건 운명이라 해야 할까. 매 모의고사마다 전국구에서 경쟁하는 수재 유찬은 학교와 지역 전체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유찬의 세계는 삭막하기만 하다. 5년 전 유찬에게 닥친 사고 때문이다. 유찬을 데리고 정주에 정착한 유찬의 부모가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때는 추운 겨울, 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부모가 유찬을 감싼 덕에 유찬만 겨우 살아남았지만, 끝내 부모는 불 난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유찬은 그로부터 할머니와 함께 둘이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갖는 일


소설은 지오와 유찬 사이를 오가며 두 아이가 서로에게 의미를 갖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건 판타지적 설정이다. 유찬은 사고 이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꽤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실제로 품는 마음을 안다는 건 마냥 좋기만 한 일이 아니다.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겉과 속이 다른 태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그를 어찌 할 수 없으니 어린 마음이 멍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찬의 능력은 놀랍게도 지오의 곁에선 발휘되지 않는다. 지오가 곁에 있으면 유찬은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지오는 지오대로 제게 다가와주는 유찬에게 마음이 열린다. 서로가 조금씩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며 서로가 가진 고통을 나누는 과정이 여느 관계처럼 자연스럽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는 풋풋한 성장소설이다. 성장이라 하면 자라서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일 텐데, 지오와 유찬 모두가 저마다 마주한 원치 않는 변화 앞에 대응하는 법을 배워간다. 제 멋대로 닥쳐오는 불행은 어찌할 수 없다지만, 대응만큼은 내 몫이란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하고 응원하는 마음만 있다면

지오와 유찬 모두가 제 삶을 헤집어 놓은 불행에 용서로써 대응한다. 그렇게 제 삶을 주도하는 법을 배워간다. 기억은 편의적이다. 한때는 간절했던 순간조차 지나치고 나면 흐릿해지기 일쑤다. 오늘의 내가 어느 순간 뚝 떨어진 것이 아닐 텐데도,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지난 시간을 충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 순간의 결정들이, 또 그 결정을 통한 성장이 우리의 오늘을 이루었을 것임에도.

가만 보면 우리의 내면은 마치 매미와 같은 불완전 탈바꿈 하는 동물들이 그러하듯, 어느 한 순간 성큼성큼 훌쩍 커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지오와 유찬이 서로를 통해 다른 누구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듯이, 저마다의 어려움을 당해내는 법을 익힘으로써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다.

지오와 유찬의 앞길에도 이제까지와 같은 고통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또 다른 상실이, 아픔과 좌절이 닥쳐올지 모른다. 여전히 제 의사 따윈 고려하지 않고서 삶 전체를 망가뜨릴 듯 달려들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앞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 있다면, 용서하고 응원하며 지지하려는 마음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으리라고 이 착한 소설이 이야기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이꽃님 (지은이),
문학동네, 2023


#여름을한입베어물었더니 #문학동네 #이꽃잎 #한국소설 #김성호의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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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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