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희 감독의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 컷
작업장 봄
11월 말, 서울로봇고 학생들은 교실 대신 극장으로 향했다. 9월이면 수시가 끝나고, 온 나라의 관심은 자연스레 수능을 앞둔 고3으로 모인다. 그 즈음, 또 다른 19살 아이들은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현장실습을 준비한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고3 중 약 18%가 직업계고 학생이지만, 익숙한 '고3'의 이미지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이들의 이름과 표정은 쉽게 지워진다.
나는 직업계고에서 33년을 보내며, 많은 아이들이 시험능력주의의 그늘에서 상처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직업계고 출신 작가들이 쓴 책이나 직업계고를 다룬 영화를 일부러 챙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직업계고 출신이 쓴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직접 사서 읽는다. 이란희 감독의 신작 <3학년 2학기>도 그런 이유로 찾아본 작품이다(관련기사 :
"왜 우린 뉴스에 안 나오죠?" 9월만 되면 맴도는 고3 아이의 질문 https://omn.kr/2ffp8).
클릭만 남은 노동인권 교육
대부분의 교육청은 노동인권교육 활성화 조례를 통해 직업계고 재학생에게 학기당 2시간 이상 노동인권 교육을 실시한다. 더하여, 3학년 2학기 현장실습 나가기 전에 한국고용노동교육원 주관의 산업안전보건 사이버 교육을 최소 12시간 이상 이수하게 된다.
이처럼 노동인권 교육은 제도적으로 의무화되어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실효성은 떨어진다. 학기당 2시간 노동인권 교육은 예산 문제 등으로 전체 학년 학생들을 한꺼번에 모아 재미없는 특강을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장실습 전 사이버 교육도 형식적으로 흐른다. 교육 당국은 "12시간 사이버 교육 이수율이 90%"라고 발표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이들이 화면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일 뿐이다. 부당한 지시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길렀다는 뜻은 아니다.
교육이 클릭으로 대체되는 사이, 아이들은 생존을 위한 선택에 내몰린다. 12시간의 클릭만으로는 부당한 상황에서 '아니요'라고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실습 중 사고를 겪고도 어디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주저앉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제도 바깥의 빈틈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하게 된다. 그 빈틈에서 흔들리는 학생들의 감정을 먼저 이해하고 보듬는 것, 그것이 학교가 해야 할 진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교육적 결단
영화를 본 뒤 이 작품을 수업과 연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학년 2학기>는 주인공 창우와 동료들의 일상을 따라가며, 19살 청소년에게 현실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교실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전달되지 않는 내용들이 영화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우리 학교 취업담당 부서에서는 영화가 너무 현실적이라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꺼릴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나는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두려움보다 준비가 커진다고 설명했다. 우려와 설득이 이어진 끝에, 2주 동안 세 차례 회의를 거쳐 영화 관람을 '창의적 체험활동' 프로그램으로 정식 편성했다.
논의는 길었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학생이 현실을 더 잘 알아야 한 걸음 더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대안 없이 '클릭 교육'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불편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더 책임 있는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극장이 된 교실, 함께 본 현실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과 배우들 노동인권 교육을 위해 극장을 찾은 서울로봇고 학생들 앞에선 감독과 배우들. 무대인사에서 이란희 감독(왼쪽)이 19살 청소년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성훈
지난 26일, 점심을 먹은 학생들은 삼삼오오 극장으로 향했다. 실무사를 포함한 전체 교원 90여 명 중 70여 명이 함께했다. 3분의 2가 넘는 교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 수업이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 우리 학교 전체의 교육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은 잠시 서울로봇고의 또 다른 교실이 되었다. 담당부장은 '영화 속 회사와 우리 학교 학생들이 취업하는 곳은 다소 다르다'고 먼저 설명하며, 교육적 효과를 높이려 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의 짧은 무대인사가 있었다. 이란희 감독은 "19세 이후의 세상은 열려 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각자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짧게 인사를 전했다. 점수와 스펙으로 서열화된 아이들에게, '비교 대신 각자의 삶'을 강조한 이 한 마디는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두 갈래의 표정, 그러나 닿아 있는 마음
영화가 끝난 뒤 학생들의 조용한 박수가 터졌다. 학생들의 표정은 두 가지로 갈렸다. '견딜 만하다'는 쪽과 '갑자기 두려워졌다'는 쪽이다.
현장실습 중에 학교로 돌아온 3학년 김현수(가명)는 "내가 경험한 현장실습 환경은 이 영화보다 나았지만, 배운 것과 다른 업무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를 미리 봤더라면 좀 더 단단하게 준비했을 것 같다"며 "후배들은 이런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실습 현장의 환경이 괜찮더라도,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실제 업무 사이의 간극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2학년 정주성(가명)은 "사회에 처음 나가는 실습생에게 어른들이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창우가 혼자 끙끙 앓는 모습이 답답했는데, 나라면 선생님이나 친구한테라도 말할 것 같다"고 했다. 이 바람은, 지금의 현장이 '따뜻한 어른'을 충분히 만나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전제를 함께 품고 있다.
1학년 박서연(가명)은 "처음엔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끝까지 보니까 오히려 준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현실을 아예 모르는 것보다 알고 가는 게 낫다"고 말했다.
같은 반 이동현(가명)은 "영화 속 회사는 심했지만, 우리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비슷한 일이 있긴 있더라"며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니까 너무 겁먹진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여전하다.
네 학생의 반응은 달랐지만, 그 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현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걸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자기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화 한 편이 공포를 키우는 대신, '준비할 수 있다'는 감각과 서로에게 기대도 된다는 신호를 동시에 건넨 셈이다.

▲기념촬영 영화 관람 전, 노동인권교육을 위해 극장을 찾은 서울로봇고 학생들이 <3학년 2학기>의 이란희 감독 및 배우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오서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우는 노동인권 감수성
이 영화는 법 조항을 외우게 하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의 불안과 기쁨, 좌절과 희망을 따라가며 노동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런 교육 방식이야말로 학교가 지향하는 참여·배려·소통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교는 이번 상영을 시작으로, 매년 현장실습 전 직업계고 청소년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 연극을 정례적으로 감상할 계획이다. 실습을 앞둔 학생들이 영화나 연극 속에서 미리 두려움을 경험하고, 교사와 친구들과 함께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교실에서 시험 점수로 줄 세우는 대신, 극장과 무대에서 서로의 감정과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노동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더 효과적인 수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교육은 아이들을 점수로 나누는 대신, 각자 안에 있는 결을 따라 성장하도록 돕는 기반이 된다. 물속에서 헤엄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물고기처럼, 각자의 환경과 재능에 맞는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다.
존엄을 세우는 공동체의 시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물고기에게 나무 오르기를 요구해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스스로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왔다. 이제는 취업률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로의 진출률'이라는 새로운 지표로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근로계약서 작성 여부, 안전교육 이수와 실천, 노동시간과 휴게 시간, 기숙사·식사 등 기본 생활여건을 함께 살피는 지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 전체가 청소년들의 성장 경로에 책임감을 갖게 된다.
최근 학생인권조례가 흔들리며 청소년 기본권이라는 첫 번째 방파제가 약해지고 있다. 우리 학교는 영화라는 교육적 실천을 통해 학생 노동인권이라는 두 번째 방파제를 쌓고 있다. 이런 시도들이 일부 학교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제도와 정책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방파제는 튼튼해질 것이다.
학생인권과 노동인권은 따로 서 있지 않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존중받는 하루를 살 때, 어른들의 사회도 함께 바뀐다. 서울로봇고의 이 작은 실험이 다른 직업계고로 퍼져나가고, 우리 사회 공동체가 이를 정책과 제도로 굳건히 지켜나가길. 그래서 모든 19살이 각자의 속도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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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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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담당부서는 꺼린 영화, 그걸 본 고교생들의 공통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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