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부산진성과 부산포왜성이 있었던, 증산공원 정상에서 바라 본 부산항. 오른쪽 멀리 영도가, 왼쪽 중간에 부산진성공원이 보인다.
이영천
1490년 병선 정박과 수군, 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약 950m 둘레로 증산에 진성을 쌓았다. 이때의 '부산진성'이 부산의 얼굴인 셈이다. 극성부리던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고, 이들의 합법적 교역을 보장하기 위해 설치한 왜관의 관리를 겸하였다. 두모포 왜관까지의 제반 사무를 부산진성에서 관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산진성은 왜구의 약탈 및 왜관의 변천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다.
전반기의 왜관
고려 말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한다. 남해안은 물론 멀리 중국까지 이르렀다. 조선 초에도 마찬가지다. 태종이 왜구 관리 차원에서 교역 장소를 마련한다. 소극적인 왜관이다. 1407년에 부산포와 내이포(진해)에, 1418년에 염포(울산)에 왜관이 설치된다. 1409년 한양에 왜 사신이 머물 동평관을 설치한다. 그랬어도 노략질은 멈추지 않는다.
세종 때(1419) 왜구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한다. 궁지에 몰린 왜구가 간절하다. 합법적인 교역을 요청한다. 이에 전격적으로 3포를 개항(1426)한다. 왜관이 설치된 염포, 제포(진해), 부산포다. 바야흐로 왜관의 시대다.

▲부산진시장(1907)과 부산진성 진시장에서 부산진성공원 쪽을 바라 보고 찍은 사진. 1872년 지방지도에도 그려진 누각이 오른쪽 상단에 보이고, 벌거숭이 산 위로 왜성 흔적이 역력하다.
이영천(자성로지하도_안내판)
초기 부산포 왜관은 부산진성에 붙어 있었다. 진성 밖에 울타리를 치고 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점차 왜관 거류자가 늘어 중종 때 수백 명에 이른다. 군사기지 진성에서 왜구와 같이 생활한다는 게 얼마나 불편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하지만 왜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노략질도 멈추지 않았고, 왜관에서 폭동마저 빈번했다. 1510년 삼포왜란이 대표적이다. 이후 왜관은 이전과 폐지를 거듭하다가, 사량진왜변(1544) 후인 1547년엔 결국 부산포 왜관만 남게 된다. 그랬어도 대규모 침략인 을묘왜변(1555) 등 왜구의 준동은 끝이 없다. 이는 왜관이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런 체제는 그러나 임진왜란 전까지 근근이 유지돼 나간다.
임진왜란 직후 절영도에 임시 왜관이 설치된다. 이때 절영도는 텅 비워진 무인도나 다름없었다. 어업 등 이유로 100호 미만의 소수만 거주했다. 절영도 왜관은 1601년부터 1607년까지 무척 짧은 기간이다. 당근과 채찍처럼 왜관 효용성이 다시 재조명된다.

▲두모포 왜관 터 부산 동구문화원 맞은 편 공원에 작은 비석이, 여기가 두모포 왜관 터였음을 초라하게 알리고 있다.
이영천
1607년 기장 죽성리에서 두모포가 부산진성 아래로 이진 해온다. 이른바 두모포 왜관이다. 1678년 초량으로 이전하기까지 72년간이다. 두모포 왜관에서 후기 왜와의 외교와 무역에 필요한 여러 규정, 왜관의 운영 방침 등이 마련된다.
두모포 왜관은 장소가 협소했다. 아울러 선창의 수심도 얕고, 남풍을 정면으로 받으니 선박 정박에도 부적절했다. 이런 이유로 왜의 이관 요구가 빈번했다. 1673년에서야 이관이 결정되고 3년의 공사를 거쳐 1678년 초량에 왜관이 개설된다. 이때 중심은 동래였고, 초량은 왜와의 교역에만 한정된 한미한 바다였다.
임진왜란 첫 격전지
부산진성 지휘관은 정발 장군이다. 1591년부터, 왜의 침략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군사훈련은 일상이었고, 부족하나마 무기도 보강했다. 부산진도 본 임무 외에 유사시 대응할 체계적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정발 장군 임진왜란 개전과 동시에 전사한 첫 장군이다.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 다대포 첨사 윤흥신 장군의 동상이 부산진역 인근에 있고, 정발 장군 동상은 오히려 초량역 인근에 있다.
이영천
1592년 4월 13일, 절영도로 훈련 나간 정발이 침략해오는 왜를 목격한다. 오륙도 쪽으로 새까맣게 밀려드는 왜선을 보고 가장 먼저 뭘 떠올렸을까? 그의 첫 조치가 주변 군영으로 파발을 보내는 일이었다. 아울러 급히 진성으로 복귀해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춘다.
왜는 처음엔 길을 열어달라 회유한다. 정발이 이를 거부하자, 전투가 시작된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다. 전투 상황이 4월 14일 실록에 자세하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사냥하러 갔다가 (침략하는 왜군을 발견하곤)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려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14일) 새벽에 적이 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를 비 오듯 쏘아댔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적의 무리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정발이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帥(수)' 깃발 아래 남문 문루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정발 장군이 왜군을 향해 활을 쏘고 있다. 그래서 정발 장군을 '흑의장군'이라고도 부른다.
국가유산청
부산진 군사는 많아야 600명이다. 백성까지 합해 2000여 명에 불과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사는 18,700명이다. 새벽 5시부터 12시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 서문과 북문 쪽에서 조총을 앞세워 공격해오는 왜군을 격퇴한다. 활과 총통이 발휘한 위력이다. 그동안의 전투 준비와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다.

▲鄭公壇(정공단)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의 남문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정발 장군과 당시 희생된 군사들을 기리는 '鄭公壇(정공단)'을 두었다.
이영천
이어진 전투에서 서문을 노린 왜의 집중 공격에 정발 장군이 흉탄을 맞아 전사하고 만다. 이후 성문이 뚫려 함락되어 버린다. 작은 성이니 쉽게 점령하리라 예상한 왜는 강한 저항에 적잖이 당황한다. 성안에 살아있는 모든 걸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 잔혹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부산진성에서 장렬히 전사한 정발을 기리기 위해, 남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정공단'을 두어 그를 기리고 있다.
변천하는 부산진성
부산진성을 점령한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1593)을 쌓는다. 부산포 왜성이다. 우리 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더 넓게 터를 잡아 쌓았다. 왜성 특성상 몇 겹의 외성을 두르고, 천수각 중심의 내성을 쌓았을 터다. 1960년 초반까지 부산포 왜성 흔적이 남아 있다가, 1969년 사적 지정 해제 후 급격히 훼철되었다고 전한다.

▲부산진성 서문(金壘關금루관) 지금의 진시장 인근에 있었을 서문이 진성공원에 바짝 붙어 옹색하게 서 있다. 문의 오른쪽에 '이곳이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라는 뜻의 남요인후(南邀咽喉)'가, 왼쪽에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의 서문쇄약(西門鎖?)'이 새겨진 돌기둥이 서있다.
이영천
왜는 부산포 왜성을 임진왜란의 총괄본부로 여겼다. 따라서 무척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도록 구성하였다. 증산 꼭대기와 능선을 길게 이었다. 정상엔 천수각을, 산비탈엔 진지를 두었다. 능선과 계곡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몇 겹으로 성곽을 쌓아 나갔다. 거느린 왜성도 동래, 절영도, 용미산 등이었다. 일본으로 드나드는 관문으로 특별히 중시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게 본성(本城)이다.

▲왜성과 勝嘉亭(승가정) 왜성의 출성(出城)인 자성대의 천수대로 추정되는 경사진 성벽 위에, 부산진성을 쌓은 한참 후에 육우정(1842년)을 짓고 이름을 승가정이라 하였다.
이영천
본성 동쪽 범일천 하구에 해발 36m 구릉이 있다. 왜는 여기에 출성(出城)을 쌓는다. 왜성의 특징인 쌍성 구조다. 이 둘이 마치 어미와 자식 같다며 모성과 자성이라 불렀다. 옛 지도에도 남은 자성대(子城臺) 유래다. 이름 또한 최근까지 그렇게 불렸다.

▲동래부사접왜사도_부산진성 왜의 사신을 맞는 일은 동래부사의 몫이었다. 왜 사신을 맞는 장면을 그린 그림 중 부산진성의 모습이다. 바다 쪽으로 동문과 남문이 보이고 그 왼쪽에 '영가대'가 그려져 있다. 서문과 북문도 보이고 성안 건축물이 세세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왜의 출성을 활용하여 1607년, 부산진성을 다시 쌓는다. 출성 천수각 부근에 장대(將臺)를 짓고, 평지를 네모로 둘러 성을 쌓았다. 둘레 약 2.4㎞의 큰 규모로, 왜란을 교훈 삼아 결정한 성곽으로 보인다. 4대 문을 두었다.

▲영가대 터 경부선 철로 옆의 옛 영가대 터에, 미니어쳐로 영가대를 복원해 놓았다. 영가대 옆이 전투선이 정박하는 선창이었으니, 이 일대가 매립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
이영천
그런 영향인지 자성대가 거부감 없이 우리 삶 속 지명으로 침범해 왔다. 임진왜란의 현재형이다. 심지어 부산항 5부두를 자성대 부두라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이토록 거리낌 없던 부끄러움을, 뜻있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여러 자료에서 지워나가는 중이다.
남아 있는 부산진성의 자취는 초라하다. 왜군의 출성 일대뿐이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자성대로 기억하는 그곳이다. 5백 년이 지났어도 우리 뇌리에 똬리 틀고 있는, 임진왜란의 몹쓸 유산이다. 그 극복과 승계는 그래서 더욱 치열해져야 한다. 새까맣게 침략해오는 적과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렬히 맞서 싸우다 전사한, 정발 장군의 꺾이지 않은 의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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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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