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5.11.29 15:19수정 2025.11.29 15:19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주말(11월 23일~25일), 가족들과 속초에 다녀왔다. 날씨가 푸근해서 늦가을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이틀 내내 흐린 날씨 탓에 별을 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서로 마주 보고 함께 웃을 수 있어서 그저 좋았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분주함이 아니라 '쉼'이었다. 1년 내내 각자 일터에서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그저 숙소에서 푹 쉬고 맑은 공기를 쐬는 걸로 의견이 모였다.
예전에 우리 가족은 '하루에 발자국을 얼마나 남겼느냐'로 여행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곤 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숙소를 나서서 더 이상 발 디딜 힘이 없을 때까지 돌아다니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식사하고, 근처를 산책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이 한결 가뿐했다. '쉰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월요일 아침, 딸이 말했다.
"그래도 속초까지 왔는데 숙소에만 있자니 심심해요."
이리저리 검색하던 딸이 국립 산악박물관을 찾아냈다. 산에 오르는 건 싫지만, 실내에 마련된 암벽 등반 체험관이 궁금하다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월요일이었다. 예전에 진도에 가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날이 궂어 박물관에 가려고 했는데 마침 월요일로 휴관이라 도저히 갈 곳이 없어 차로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갔었다.
딸은 아쉬운 마음을 살짝 눌러 놓고 다른 곳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시립박물관도 도서관도 월요일에는 모두 문을 닫는다고 했다. 겨울 성수기를 앞두고 숙소 지하에 있던 오락 시설까지도 수리 중이어서 말 그대로 숨만 쉬고 잠만 자야 할 판이었다. 딸은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눈에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재빠르게 놀리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자생식물원이 있대요! 1년 365일 개방이래요."
남편이 딸의 밝아진 얼굴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가자!"
주소: 속초시 노학동 1000-56
연락처: 033-639-2928
이용시간: 09:00 ~ 18:00
휴무일: 연중개방
입장료: 무료
식물원에 도착해 보니 입장료뿐 아니라 주차도 무료였다. 제1, 제2 주차장으로 나뉘어 있고 대형주차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여유롭게 주차할 수 있었다. 입구에 화장실이 있어 산책길을 가볍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설악자생식물원 그림지도 식물원 입구 안내판에 그려놓은 그림지도로 산책로를 정하면 편리하다.
김효숙
동서로 나뉘는 산책로 입구에 있는 그림지도를 보니 1시간 반 코스라고 적혀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점심이 늦을까 걱정하다가, "배고프면 더 맛있지" 하며 산책로로 들어섰다.
우리는 미로 공원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예전에 제주에서 봤던 미로처럼 높은 담길을 상상했는데, 걸으면서 서로 얼굴이 보일 정도로 낮은 덤불로 만든 미로였다. 아이들이 놀기에 딱 좋은 수준이었다.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남편과 나는 딸과 다른 길로 출발했지만 금세 마주치고는 깔깔 웃었다. 나올 때는 내가 앞장섰다가 몇 미터 가지고 못하고 막힌 길에 닿았다.
"역시 나는 길치인가 보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딸이 앞장서 걸었다. 아빠를 닮아 길눈이 밝은 녀석은 금방 출구에 도착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식물원 구경에 나섰다. 미로 앞쪽으로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나무 데크길로 이어진 산책로가 나왔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유모차를 탄 아이도 함께 걸을 수 있을 만큼 완만하고 안전했다. 가을이 깊어 겨울 문턱에 들어선 탓인지 꽃은 잘 보이지 않고, 단풍도 다 졌지만, 날씨가 포근해 걷기엔 좋았다. 곳곳에 긴 의자가 있어 걷다가 뻐근해지면 쉬어가기 좋았다.
돌다리가 보였다. 커다란 돌 틈새에는 물고기 떼가 이리저리 헤엄치며 눈길을 끌었다. 돌다리 중간중간 넓적한 돌이 옆으로 붙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실수로 밀치거나 물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설계가 마음에 쏙 들었다.
다리를 건너니 척산 족욕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알림판에 쓰여 있었다. 뱃속 알람이 자꾸 울어대서 다음 기회에 가기로 했다. 길을 돌려 나오는데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먼저 건너가라고 보조 돌덩이로 슬며시 옮겨가는데 내 앞을 지나던 이가 웃으며 말했다.

▲배려하는 돌다리 건너편에서 오는 이를 피하거나 급하게 가야 하는 이를 먼저 보낼 수 있는 배려의 돌다리
김효숙
"어머, 우리는 그거 없어도 두 사람이 같이 지날 수 있는데. 그렇죠?"
"그럼요, 하하. 충분하죠."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여유를 가지고 서로 배려하니 얼굴을 붉힐 일도 언성을 높일 일도 없었다.
멀리 알록달록한 풍선 같은 게 보여 가까이 가니 알록달록한 색깔의 그늘막이 달린 긴 의자가 모여 있었다. 그 앞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뛰놀았다.
잔디밭 앞쪽에는 메타세쿼이아가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섰다. 생각보다 나무가 적었지만 쭉쭉 뻗은 나뭇길이 어린 시절 신작로처럼 넓게 뻗어 있었다. 줄기 아랫부분에 빨강과 초록으로 띠를 두르고 있어 크리스마스트리가 생각났다. 별거 아니었지만, 재미난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메타세쿼이아 길 크리스마스 준비로 빨강 초록 옷을 입은 나무들
김효숙
잔디 앞에 사방댐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에는 물이 그득했다. 물이 흐려서 속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커다란 물고기가 뻐끔거리며 연못을 헤엄칠 때마다 사람들의 눈길이 모이곤 했다. 연못 위로 시원스레 펼쳐진 하늘에는 여기저기 구름이 걸쳐 있어 그 사이로 해가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물가를 따라 걷다 보니 언덕 위로 유리 건물이 나타났다. '온실'이었다. 입구에는 크고 작은 선인장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에서 키우기 어려운 녀석들이 제 위용을 뽐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서인지 포인세티아 잎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10미터 남짓 아담한 공간이지만 따뜻하고 아늑해서 사람 마음을 느긋하게 해주었다. 나가는 길, 문가에 핀 동백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동백꽃을 보면 진짜 겨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 겨울엔 너무 춥지 않고 눈사태도 산불도 일어나질 않기를' 하고 간절히 바랐다.
산책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물레방아가 보였다. 물길은 잘 뚫어 놓았지만, 물이 말라 물레방아가 멈춰 있었다. 물소리가 더해졌다면 조금 더 운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며 물레방아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위쪽을 바라보니 우리가 출발했던 입구가 보였다.
어른 걸음으로 5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연못가 의자에 앉았다, 식물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곳곳에서 쉬어가도 한 시간 반이면 너끈하다. 부담 없이 가볍게 걷고 싶을 때 찾으면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속초 자생식물원은 화려하진 않지만 조용하고 넉넉했다. 비싼 입장권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복잡한 동선에 길을 일을 염려도 없다. 그저 걷고, 보고, 깔깔거리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쁘게만 살아온 우리가 잠시 멈춰 함께 걷고, 함께 웃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도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다. 잠시 내려놓고 걸어보자. 기대를 내려놓으면 갑갑했던 일상에서 세상 편하게 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설악산자생식물원 안내
"수많은 식물과 동물이 서식해 온 자연의 보고 설악산, 그 설악산에서 자생하는 희귀식물 122만 종을 한데 모아 둔 곳이다. 각양각색 야생화가 피어나는 수생식물원, 희귀식물이 자라는 암석원, 아이들이 뛰놀기 좋은 미로원, 사계절 모두 방문하기 좋은 장소로 해설이 필요하면 숲해설가의 해설도 들을 수 있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축약해 놓은 곳이 바로 '설악산(속초) 자생식물원'이다. 설악산에서만 볼 수 있는 자생식물들과 희귀 식물들을 둘러보며 가벼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우리 모두는 푸른 지구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함께 손잡고 살아갈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글을 씁니다.
공유하기
연중개방하는 속초의 식물원, 화려하진 않지만 훌륭하네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