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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하나 까딱 않고 김장 김치 받아먹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은살남] 은퇴한 베이비붐세대의 김장철 풍경

등록 2025.11.29 15:01수정 2025.11.2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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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급격한 고령화와 충분치 않은 노후대비는 노후생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55년생, 은퇴 후 전업 살림을 하는 남편으로서의 제 삶이 다른 퇴직자와 은퇴자들에게 타산지석과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합니다.[기자말]

 김장에 넣을 쪽파를 다듬고 있다.
김장에 넣을 쪽파를 다듬고 있다. 이혁진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은 아내가 정한다

아침부터 아내가 지시한 대로 무를 깨끗이 씻고 쪽파와 갓을 다듬어 놓았다. 간 마늘, 새우젓밥풀, 고춧가루 등도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사실 김장 준비는 전날부터 했다. 주문한 절임 배추가 도착하고 시장에서 김장 재료 몇 가지를 미리 사두었다.


무가 채칼에 썰리는 것이 다르다. 무채가 채칼 밑에서 경쾌하게 나온다. 채 썰고 남은 꽁지 무는 달고 맛있다. 이를 알면 살림을 조금 배웠다는 소리를 듣는다. 곁에서 아내가 무채는 따로 용기에 조금 담아두라고 한다. 김장과 별도로 나중에 '무밥'을 할 요량이다.

대야에 무채와 쪽파 등 각종 재료를 넣고 고루 비비기 시작했다. 김치소 모양과 색깔을 보고 간을 본 아내가 내게도 맛을 보라 한다. 솔직히 잘 모르지만 양념향이 좋다. 김치소를 배추에 넣는 작업부터는 아내가 등장한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배춧잎과 줄기 사이사이에 속을 바른다고 할까. 무조건 많이 넣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굴을 넣은 김치와 그렇지 않은 것을 각기 다른 김치통에 담고, 냉장고 안에서 배치도 다르게 한다. 아내와 나의 합작으로 두어 시간 만에 김장이 완성됐다. 용기에 김장을 담고 뚜껑을 닫는 순간 뿌듯하다. 아마 주부들이 느끼는 만족감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이후 마무리 작업은 내 몫, 김장하는 데 동원한 그릇들을 정리하고 주변을 깨끗이 청소했다.

 김장 무를 채칼로 썰었다.
김장 무를 채칼로 썰었다. 이혁진

 다듬어 놓은 갓, 쪽파와 함께 김치소의 핵심 재료이다.
다듬어 놓은 갓, 쪽파와 함께 김치소의 핵심 재료이다. 이혁진

 무채를 고춧가루로 물들이고 있다.
무채를 고춧가루로 물들이고 있다. 이혁진

남자들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처음 김장할 때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몸 쓰는 일을 주로 도왔다. 그러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김장 재료와 용기를 작업대 앞으로 제때 잘 가져다 놓아야 한다. 김치통에 김장이 담기면 담기는 대로 김치냉장고 앞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아내한테 김장하는 걸 도왔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 집 먹을 김장은 20kg 절임배추면 충분하다. 과거 김장할 때는 식구당 몇 십 포기를 담갔다. 지금은 세 식구 김장도 부담스럽다. 아내와 둘이 만드는 김장은 오랜만에 손발을 맞춰보는 시간이다. 아내 머릿속에 작업 순서가 들어있고 나는 그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면 김장이 완성된다.


남자 동창들 모임에서도 '김장'이 화제

사실 올해 우리 집 김장은 약간 더 추우면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 전 아내가 갑자기 김장 운을 뗐다. 김장 시기를 이것저것 저울질하고 있었다. "덤비면 금방 김장이 된다"는 건 살림 초보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김장 작업은 찌개나 반찬 한두 개를 만들거나 단순히 설거지하는 수준이 아니다.


요령도 필요하다. 아무리 김장이 먹고 싶어도 먼저 아내에게 김장을 하자고 말하면 눈치가 없는 것이다. 아내에게서 "김장 할까"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인내심 갖고 기다리는 게 좋다. 김장하기 좋은 날은 비로소 아내가 잡는다. 이게 우리 집 김장철 일상의 한 장면이다.

 김치소를 버무리고 있다. 힘 쓰는 작업은 주로 내가 한다.
김치소를 버무리고 있다. 힘 쓰는 작업은 주로 내가 한다. 이혁진
 배춧잎에 넣을 김치소 양념이 완성됐다.
배춧잎에 넣을 김치소 양념이 완성됐다. 이혁진
 아내가 배춧잎 사이사이에 김치소를 넣고 있다.
아내가 배춧잎 사이사이에 김치소를 넣고 있다. 이혁진

김장철이지만 예전과 달리 직접 김치를 만드는 가정이 줄고 있다. 우리 집만 해도 김장 양이 엄청 줄었다. 딱히 도와줄 사람도 없고, 김장이 힘들고 귀찮은 것이다. 이제는 만들어도 소량을 담그거나 아예 김치를 사 먹기도 한다. 그러나 김장 때 제대로 만든 김치를 맛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은퇴 후 살림을 배우면서 김장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김장에 동참하는 사람이 드물 거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집안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도 김장 때만은 협조하는 모양이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받아먹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한 고교 동창은 김장에 대비해 몇 달 전부터 마늘을 까고 김장에 쓸 고춧가루를 준비한다고 했다. 그런 친구들은 아내에게 칭찬받는다. 자녀들에게도 격려와 응원을 받는다고 한다. 김장이 힘들기는 해도, 가족을 모처럼 화목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주 친구들 모임에서 한 친구가 "우리 집 어제 김장했어"라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도 김장을 서두를 것이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화제에 오르지 않던 이야기다. 이를 보면 요즘 베이비붐 세대는 번거로운 김장 문화에 공감하고 협조하는 세련된 구석이 있다. '은살남'(은퇴 후 살림하는 남자) 입장에서 환영하는 바이다.

우리 집이 김장을 하는 이유는 특히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김장을 굳이 고집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게 김장의 맛과 추억을 드리는 것도 우리 부부가 챙겨야 할 일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형이 오랜만에 김장을 갖다 주고 이산가족 단체에서도 나눔 김장을 보내왔다. 올 한 해는 풍성한 김장으로 마무리했다. 올 겨울에는 다양한 김치 손맛을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60대 이상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
#김장 #배추 #무 #베이비붐세대 #김장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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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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