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독립군' 포스터.
블루필름웍스
광풍(狂風). 글자 그대로 '미치광이 바람'입니다. 합리적인 이성이, 건강한 상식이, 올바른 가치가 자리 잡을 수 없는 흐름이 이어지면 그것이 바로 광풍입니다. 1950년대 냉전기 미국의 매카시 광풍이 그랬고, 400년 전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이 그랬고, 꼬박 1년 전 윤석열 일당의 내란 광풍이 그랬습니다. 피해자의 숫자가 많고, 세상이 주목해야만 광풍이 아닙니다. 미처 느끼지 못할 만큼 불어대는 작은 바람이라도 그냥 내버려두면 걷잡을 수 없는 돌풍이 되고, 태풍으로 몸을 비틀어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광풍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부터 한국 사회의 어느 모퉁이에서 작은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한 독립군의 삶을 기록한 독립 다큐 영화 한 편을 봤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나왔고, 함께 영화를 본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정신적으로 위축된 채 스스로 자기검열을 해야 했습니다.
최근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광복절인 8월 15일 서울하키협회 임원들과 하키 선수 학생들, 학부모들 십여 명은 영화 '독립군 : 끝나지 않은 전쟁'을 함께 봤습니다. 평생에 걸쳐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지냈던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것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충분히 교육적 의미가 있으리라는 판단이었겠지요.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난 뒤 많은 이들이 가슴의 울림을 느꼈습니다. 82년 전 10월 25일은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의 변두리 도시에서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날이었고, 105년 전 10월 26일은 그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항일무장투쟁 역사의 굵은 획을 그어낸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영화는 5만 명 남짓의 관객만 영화관을 찾아서 보고, 여느 비상업영화의 숙명처럼, 며칠 만에 스크린을 모두 내주고 말았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의 삶을 접한 중고등학생들은 그 드물디드문 5만 명 중의 30여 명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극장을 찾았건, 엄마·아빠의 권유에 의해서였건 그 기특함을 충분히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새로 회장을 선출한 서울하키협회는 10월 18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이 영화를 관람한 임원들을 해임시켰습니다. 사유는 '정치적 중립 위반'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보편적 상식이 흔들리고, 우리 시대가 추구하며 확인해온 역사적 가치의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2년 전 집권하자마자 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비뚤어진 역사관, 국가관을 드러냈던 이들은 이미 내란 세력, 반국가 세력, 헌법파괴 세력으로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 명백한 상식적 가치를 서울시 소속 서울시체육회 산하 한 종목단체에서 뒤바꾸려 했다는 사실 앞에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서울시하키협회가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을 가르치기는커녕 최소한의 상식과 이성도 부정하는 행위를 버젓이 저질렀음에도 세상은 잠잠합니다. 체육계 출신인 임오경 의원이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대한체육회를 상대로 이에 대해 한마디 질의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헤프닝 또는 사소한 문제라고 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서 철거되느니 마느니 하는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나와야 정색해서 분노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이를 기억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그에 대한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불이익받는 게 용인되는 사회라면, 앞으로 더 많은 분야에서 더욱 본질적인 가치를 야금야금 내줘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국가관과 역사관의 왜곡과 혼동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상식과 합리의 가치가 좌우 다툼의 영역으로 내몰리는 결과일 것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진리와 상식이 표류하는 시대에서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면서 눈치 보기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듯 철 지난 이념 편향적 역사 인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서울하키협회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홍범도기념사업회 역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스스로 성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폼나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언론의 카메라가 달려드는 일에만 나서는 동안 발밑은 서서히 무너질지 모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공유하기
여전한 홍범도 죽이기 광풍... 그보다 더 참담한 건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