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혼 초 김선택 권미혁 부부
민청련동지회
아내를 위해 '내조'한 민주적 남편
미혁은 건강이 안 좋아 결혼 초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동안 여성운동에 몰두하느라 몸을 돌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쉴 틈이 없이 활동에 매진했고 결국 그 바람에 첫 애를 임신했으나 유산을 했고, 그 유산 후유증에 오래 시달렸다.
선택은 선택대로 신혼 초에 전민련 창립식이 있어, 민통련을 정리하고 새로운 단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민련은 창립된 지 3달이 채 되지 않아 89년 4월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정부당국으로부터 된서리를 맡게 된다. 문익환 목사뿐만 아니라 전민련 간부 이부영, 이재오, 김근태 등이 모두 구속되어 전민련이 기능마비 상태에 빠졌다. 김선택은 이번에도 이창복 공동대표를 모시고 장준영, 권형택 등과 함께 전민련을 지키고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선택은 모교 후배 김기설의 투신 항거와 그에 뒤이은 유서대필사건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운동권'의 뒤치다꺼리 전담요원 역할을 했다. 선택의 이러한 남 뒷바라지 잘하는 기질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아내 권미혁이 여성운동가 할당의 일환으로 민주당 비례대표에 나가게 되었다. 선택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정치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여서 미혁의 정계 진출을 적극 응원했다.
당시 국회의원 비례대표는 중앙에서 후보자의 당선 가능성 번호를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자끼리 경선하여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투표에 의해 순번이 정해지는 방식이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미혁은 11번을 받아 당선안정권 내에 들었다. 이 과정에서 선택의 헌신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마침내 2016년 5월 미혁은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입성했다.
선택의 뒷바라지 대상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백송을 지극히 사랑하여 묘목을 들여다 정성껏 가꾸었다. 그리고 자란 묘목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무 뒷바라지까지 해준 선택이었다.
발병, 헌신적 간호 속에 세상을 떠나다
평생 남을 위한 일만 하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일까. 선택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2016년 무렵 꽃가루 알러지가 심해서 천안의 한 병원에 갔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미혁이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서울대병원에 예약을 해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상태가 심각하다.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병명이 대동맥류라고 하는데 뇌동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어 그 약한 부분이 터지면 즉사할 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다. 게다가 선택은 세 군데나 대동맥류가 생겨 있었고, 모두 70% 이상이 막혀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8월에 날을 잡아 18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선택은 중환자실을 나와 의식을 회복하고, 통원치료를 하며 몇 달간 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다.
그런데 몇 달 후 심한 장출혈로 병원에 재입원했다. 응급조치를 받아 겨우 장출혈이 치료되자 이번엔 폐렴이 찾아왔다. 결국 선택은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고, 병원에서는 치료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내 미혁은 선택이 좀 더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고향 근처의 병원으로 옮기고, 직접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간호했다. 이때 선택의 선후배 동지인 김재승, 장준영, 정경연, 노재익, 서경미 또한 매일 선택의 곁을 지키며 호전을 빌었다.
한때는 상태가 호전되어서 미혁이 선택을 휠체어에 태우고 문익환 목사 자택에 개관한 '문익환 통일의 집'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민청련 동지 장영달, 이명식을 본 선택은 하염없이 울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동지들을 보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러나 운명은 결국 평생 남을 위해 뒷바라지 해온 선택을 뒷바라지 해주지 않았다. 2020년 9월 18일, 선택은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운명했다. 선택의 유해는 문익환, 김근태, 김병곤 등 민주화운동의 선배들이 묻혀 있는 마석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문익환 목사님 묘소 바로 옆에 있는 선택의 묘 앞에는 함세웅 신부님이 친필로 쓴 '맑은 영혼 김선택'이라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김선택 묘. 문익환 목사 묘 옆이다.
민청련동지회
맑은 영혼, 김선택
김선택 한 번도 관직에 앉아본 적이 없이 순수 재야의 길을 걸었다. 항상 원칙을 중시했고, 운동이 지향하는 철학을 삶의 마지막까지 견지하려고 했다. 그 철학의 핵심은 '민주주의'였다. 그래서 아내 미혁이 바라보는 남편 김선택은 '모든 면에서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일방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고 늘 대화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선택은 아이를 무척 좋아해서 아이를 여럿 낳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혁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자, 미혁이 상처 받을까봐 일체 그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선택은 소를 키우는 농부처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새벽형 인간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새벽 3, 4시면 일어나 주위 사람을 두들겨 깨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부지런함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아기 같은 심성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맑은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 심성을 다스리는 공부도 많이 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불경을 사경하고, 경전을 읽고 공부했다. 그래서 선택이 평생 친형님처럼 모시고 의지했던 장준영은 선택을 "좋은 친구이면서 좋은 스승 같은 사람, 내 잘못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면서도 때로 야단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택은 주변의 선후배들에게 사랑과 아낌을 듬뿍 받은 사람이었다. 순천향병원 입원 기간 3년 반 동안 매일 빠짐없이 누군가가 선택을 병문안 왔다. 친지도 있었지만 주로 선후배 동료들이었다. 이해찬 전 장관, 박원순 시장도 면회를 왔고,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경우 2번이나 면회를 왔다. 그래서 가족들은 가슴으로 느꼈다.
'내 동생, 우리 오빠가 정말 잘 살았구나'.
| 민청련두꺼비열전 1부를 마칩니다 |
|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 민청련 두꺼비들 김근태, 이을호, 김병곤, 백완승, 이범영, 박혜숙, 박문숙, 최민화, 김선택 9인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이로써 민청련두꺼비열전 1부를 마칩니다. 아직도 민주의 제단에 바쳐진 많은 무명의 영혼들이 있습니다. 더 잘 준비해서 2부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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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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