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섭식장애 데이터 혁신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는 섭식장애 실태를 파악할 대표성 있는 데이터가 없다. 이번 CoRe-ED 'Next Big Research Idea'에서 우승한 NEDIC-Harvard STRIPED-Relate Malaysia 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데이터 인프라 구축 계획을 제안했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① 문화·지역 맥락에 맞춘 측정 도구 개발, ② 연구 여건이 취약한 국가 연구자들을 위한 물적 지원, ③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글로벌 ED 데이터 대시보드 구축을 목표로 한다. Relate Malaysia의 참여는 글로벌 사우스 연구자가 국제 지식 생산의 중심에 서는 드문 사례이며, 말레이시아의 경험을 세계적 연구·정책 담론과 연결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Relate Malaysia
말레이시아 섭식장애 전국조사(2020):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 병'
말레이시아 전국조사는 싱가포르 연구에서 구축한 온라인 기반 진단 모델을 토대로, 말레이시아 인구 구조에 맞춘 독립적인 조사로 다시 설계된 연구였다. 즉, 싱가포르에서 기술을 시험했다면, 말레이시아에서는 그것을 처음으로 국가 규모에 적용한 셈이다.
2020년 추아 숙닝은 말레이시아 성인·청소년을 대표할 수 있는 표본을 구성하고, 온라인 스크리닝 도구(SWED, EDE-Q short form, SCOFF 등)와 DSM-5 알고리즘을 말레이시아 인구통계 구조(연령×성별×민족)에 맞게 재조정해 진단을 분류했다. 이 작업은 기존 병원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도 '인구 기반 진단'을 가능케 했다.
이 연구는 2022년 <국제섭식장애학회지>에 발표되었으며, 말레이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전국 단위 섭식장애 유병률을 제시했다.
▲ 여성의 32%, 남성의 24%가 섭식장애 위험군(ED-risk group)
▲ 청소년·젊은 성인의 약 14%가 DSM-5 임상적 섭식장애 범주에 해당
▲ 모든 주요 민족 집단에서 폭식·보상행동이 보고됨
▲ 진단군의 극소수만 치료 경험이 있음
이 조사는 단순히 "유병률이 높다"는 사실 이상을 드러냈다. 국가 조사, 병원 통계, 정책 체계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섭식장애가 처음으로 '측정 가능한 현상'으로 국가 통계에 등장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추아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때때로 데이터가 사람을 대신합니다."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오래도록 이름조차 붙지 못했던 고통이 처음으로 숫자라는 언어를 통해 공적 세계로 진입한 순간이었다.
고통을 측정하는 사람, 그리고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
추아 숙닝은 자신을 사회운동가로 부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기술적 전문가(technical expert)"라고 말하며, 연구·정책·공중보건을 연결하는 기술적 경로를 설계하는 일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는 개인적 취향이라기보다, 말레이시아에서 정책적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요구되는 언어의 정치성을 인식한 선택에 가깝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을 드러내는 일이 종종 전문성의 결여로 오해된다. 정책 영역에서는 "정서적 거리"가 요구되고, 전문직 내부에서는 감정의 노출이 곧 취약함으로 읽힌다. 그는 이 긴장을 담담히 인정한다.
"전문가로서의 위치와 정신질환 경험 당사자로서의 개인적 경험을 함께 드러내는 것은, 말레이시아에서는 아직도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이 금기는 개인의 선택을 넘어, 아시아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정서 규범, 가족의 체면, 전문직 위계를 반영한다. 그 속에서 추아는 '경험의 공개'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전략적이어야 하며, 자율성과 안전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문성의 형식: '문제를 푸는 기술'로서의 심리학
추아 숙닝의 인터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그가 심리학을 진단과 치료를 넘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구조(problem-solving architecture)"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는 연구자이자 임상가로 일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데이터·임상 실천을 별개의 영역으로 다루는 기존 체계가 실질적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정신건강 서비스를 확장하려면 기술적 접근(technical approach)이 핵심"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관점은 단순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어떤 언어가 국제기구·정부·학술기관에서 신뢰를 얻는지, 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어디에서 실패하는지를 지켜본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에 가깝다. 추아는 정책의 성패가 "초안(document)이 아니라 집행(execution)과 자원 배분(resource allocation)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신건강 문제는 제도적 의지보다 실행 가능한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가 STRIPED에서 배운 세 가지 원칙과도 연결된다.
① 창의적 사고 — 기존 모델을 단순히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② 광범위한 협업 — 학계·정책·공중보건을 가로지르는 연결을 만들고 ③ 단일 전략만으로는 공중보건 문제를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 접근이다.
추아에게 전문성은 자격이나 직책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를 기술적으로 분해하고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능력에 더 가깝다.
아시아에서의 섭식장애: 서구 진단 체계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
추아 숙닝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지점은 단순하다. 아시아의 섭식장애는 서구 진단 체계가 전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외모 규범과 음식문화가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 정서 표현을 자제하도록 요구하는 규범이 강하며
▲ 가족·학교·종교 공간에서 문제가 노출될 여지가 매우 좁고
▲많은 사례에서 당사자는 우울·불안을 먼저 호소하고, 섭식 문제는 그 뒤에 숨겨진다는 점
에서다.
이는 그가 수행해온 인구수준 조사와 구조적 분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서구의 진단 매뉴얼(예: DSM-5)이 가정하는 대표 증상 — 체중 집착의 명시적 표현, 과도한 체형 평가 발화, 반복적 보상행동의 보고 — 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가족 중심 구조 때문에 가족기반 치료(FBT) 등 서구식 치료 모델이 문화적 적합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문제는 "진단이 틀렸다"가 아니라, 진단이 전제하는 '증상 표현 방식' 자체가 아시아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추아는 '정답을 그대로 옮겨오는 작업'이 아니라, 문화·가족·사회 구조를 고려해 전략을 조정하는 변증적 접근(dialectical approach)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지막 질문: '누가 언어를 만들 것인가'
추아 숙닝은 인터뷰에서 정신건강 분야가 겪는 가장 근본적 문제를 언급했다. 정책, 임상, 연구, 당사자 경험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세계에 거의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는 이 단절이 특히 구조적이다. 전문성의 정의는 협소하고, 특정 형식의 지식만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성과 당사자 경험이 함께 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두 흐름을 통합한 조직이 더 지속가능합니다."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이 말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이상주의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그가 지난 십여 년 동안 말레이시아에서 실제로 부딪친 제도적 현실에서 나온 진단이라는 점에서다.
정신건강을 말할 수 없던 사회에서, '말할 수 있는 방식'을 새로 설계하는 일. 그가 해온 작업은 결국 그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남는 질문은 말레이시아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을 설명할 언어를 갖게 되었을 때,
그 언어를 어떤 제도와 어떤 사회로 확장할 것인가?"
추아 숙닝의 지난 10년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은 그의 연구를 넘어선다. 섭식장애라는 형태의 고통에 대해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무관심한 한국을 포함, 아시아 전반의 공중보건과 정신건강 체계가 다음 단계로 이동하기 위해 반드시 응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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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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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고통을 기록할 수 있는가: 말레이시아 첫 섭식장애 유병률과 데이터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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