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순천 문화의거리.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앞이다.
이돈삼
순천시 금곡동은 순천 원도심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매곡동과 중앙동, 남내동과 접해있다. 청수골은 상사면과 경계를 이룬다. 난봉산에서 흐르는 물이 맑다고 청수(淸水)마을로 불렸다. 일제강점 때 금곡동(金谷洞)으로 바뀌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이 여기에 있었다. 순천부읍성은 순천의 옛 행정 중심지이면서 방어 거점이었다. 1430년 쌓은 둘레 1025미터, 높이 3.6미터의 석성이었다. 동서남북에 성문을 뒀다. 밖으로 드러낸 적대(敵臺)와 성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 해자도 설치됐다. 성안에 아사(衙舍), 객사, 내아, 형청, 양사재(養士齋), 군기고, 진휼창, 옥사 등 지방행정 주요 시설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도 순천부읍성을 찾았다. 백의종군하던 1597년 4월과 수군 재건에 나선 8월이었다. 이순신은 읍성에서 크고 작은 활과 화살, 화약, 무기를 손에 넣었다.

▲ 금곡동 담장 벽화.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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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열사의 숨결이 밴 금곡동 풍경. 순천의 원도심으로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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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은 일제강점기 도시 개발과 성곽 철폐로 사라졌다. 남문 연자루는 1925년에 없어졌다. 성문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읍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순천향교와 용강서원도 금곡동에 있다.
금곡동은 격동기 순천역사의 주무대였다. 진보 지식인의 항일무대였다. 매산등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개신교 전도의 터전이었다. 근대교육과 의료의 시작지점이었다. 광복 직후엔 10·19여수순천 사건의 격전지였다.
금곡동은 여느 원도심처럼 도로가 좁다. 몇 년 전부터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마을기업을 통해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담장에 벽화도 그려졌다. 한적한 골목을 따라 솔방솔방 걷는 재미가 쏠쏠한 이유다.
지난 11월 29일 오후, 단출한 행사가 이 마을에서 있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옆 서문터정원에서다. '5·18 민주열사 김영철 생가 알림식'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킨 김영철 열사 생가에 표지판을 달고, 알리는 자리다. 열사의 배우자(김순자)와 자녀(김동명, 김연우)도 참석했다.

▲ 김영철 열사의 부인 김순자 여사와 아들 김동명, 딸 김연우 씨. 11월 29일 순천 금곡동에서 열린 ‘5.18 민주열사 김영철 생가 알림식’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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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열사의 묘.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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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1948∼1998) 열사는 광주YWCA와 광천동시민아파트를 거점으로 주민운동을 했다. 5·18민주화운동 때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붙잡혔다. 상무대 헌병대에서 당한 갖은 폭력과 고문 후유증으로 18년 동안 환상과 현실 세계를 덧없이 헤맸다. 지금은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
"순천은 김영철 열사의 숨결이 밴 곳입니다. 금곡동에서 태어났고, 순천중앙교회에서 신협 지도자 교육을 받았습니다. 세광교회는 사랑하는 여인과 혼례를 올린 곳이고, 별량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별량면 무선마을이 처갓집, 별량마산교회는 청년회장으로 활동하며 주민운동을 한 곳입니다."
김 열사 생가 터 찾기에 앞장선 박병섭 (가칭)'김영철 열사를 기리는 순천시민모임' 대표의 말이다. 역사교사로 퇴직한 박 대표는 지역사를 연구하며 청소년 체험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 김영철 열사 생가 터로 연결되는 금곡동 마을 풍경. 순천부읍성 서문터정원에서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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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열사의 생가 터. 순천시 금곡동(서문성터길74)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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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열사는 1948년 순천군 순천읍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함께 '목포모자원'을 거쳐 1955년 광주 인성모자원(영신원)으로 옮겨갔다.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다. 가정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 1968년 10월 승주군 별량면사무소 발령을 받았다.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생활하며 생활비를 아꼈다.
'설익은 아침을 치우고 수덕 쪽으로 추경(秋耕) 지도 출장을 갔다. 청내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출장가는 게 자유분방스러워 자주 나가고 싶다. 지리도 익히고. 군(郡)에서 경찰과 함께 양곡 불하 때문에 문책하러 온 모양. 똑같은 도둑놈들인데...'
면사무소 근무 50여 일 지난 12월 11일 수요일 일기다. 김영철 열사 유고 모음 <못 다 이룬 공동체의 꿈>에 실려 있다.

▲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열린 청년회 주말학교 활동 모습. 1977년 모습이다.
김영철열사 가족

▲ 들불야학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지도하고 있는 김영철 강학. 1979년 모습이다.
김영철열사 가족
공직사회 비리에 절망한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서울에서 신문 배달, 과일 행상, 포장마차 등을 경험했다. 1976년 순천중앙교회에서 열린 신용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에 참여했다. 그동안 가까이 지내던 김순자와 혼례를 올린 것도 그때다. 농사와 막일을 하며 교회 청년회 활동을 했다. 이듬해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로 임명돼 광주 영신영아원으로 옮겨갔다.
1977년 10월 광천동시민아파트에 살며 주민운동과 빈민운동을 했다. 새마을지도자로도 선출됐다. 이듬해 광주YWCA신협 이사장 추천으로 참사(상무) 근무를 시작했다. 고아 박용준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생활했다. 들불야학 특별강학으로 참여해 회의 진행과 토론법, 레크리에이션 등을 맡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간엔 여러 유인물과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다. 도심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해방광주' 기간엔 분수대 연단에 올라 연설도 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을 맡아 최후까지 도청을 지켰다.

▲ 옛 상무대 헌병대 영창. 옛 헌병대가 자리한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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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상무대 헌병대에 급조된 군사법정.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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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끌려간 그는 상무대 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항쟁을 '간첩의 사주받은 폭동'으로 몰아가는 데에 맞서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진을 시도했다. 고문에 굴복하면, 광주에 붉은색이 덧칠될 게 불 보듯 뻔했다. 항쟁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신군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을 통해 1심 10년, 2심에서 7년 형을 선고했다. 81년 성탄절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영철은 병원 치료와 장기 입원을 되풀이했다. 고문과 자살 시도 후유증이었다. 공간이 헌병대 철창에서 감옥으로, 다시 정신병원 철장으로 옮겨진 것이다.
육신의 기력이 다한 김영철은 1998년 8월 16일 애처로운 생을 마감했다. 18년 동안 계속된 그의 '오월투쟁'도 마침표를 찍었다. 문병란 시인의 표현처럼 '무너진 도시를 안고 18년을 앓아온 사나이', 김영철 열사의 헌신과 열정의 태 자리가 순천 금곡동이다.

▲ 들불 7열사 기념비. 광주 5.18자유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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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지킨 김영철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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