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보도연맹 예비검속 오창면 보도연맹원들의 예비검속 현황
진실화해위원회
헌병대 주관 2차 예비검속은 1950년 7월 8일, 오창에서 이루어졌다. 경찰과 의용소방대원들은 각 마을을 돌며 미리 작성된 명부를 근거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소집 방식은 다양했다. 종을 치거나 경찰이 논밭으로 찾아다니기도 했고, 구장의 도움을 받아 교육을 하거나, 비료를 나눠 주거나, 피난을 시켜주겠다고 속여 모으기도 했다.
소집된 오창 보도연맹원들은 오창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 당시 오창창고는 청주·청원 지역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가로 30m, 세로 50m, 높이 5~7m 정도였다. 창고 안에는 볏짚이 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진천에서는 문백면과 진천면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사석지서 옆 방앗간에 구금되었다.
사석지서에서는 방공호를 판다며 주민들을 전부 사석지서 앞으로 모이게 했다. 하지만 정작 방공호는 파지 않고, 70~100명의 보도연맹원들을 골라 방앗간에 구금했다. 이들은 다음날인 7월 9일, 오창 양곡창고로 이송되었다.
북이면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2일부터 8일 사이, 북이지서 경찰에게 예비검속되어 북이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북일면(현재 내수읍)에서는 7월 5일경 경찰에게 소집되어 북일국민학교에 구금되었다. 그러다 7월 9일, 북이면 옥녀봉으로 이송되었다.
"대한민국 만세"
창고에 구금된 지 3일째인 7월 10일, 군인들은 '바람을 쐬게 해 준다'며 창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당에서 땀을 식히던 보도연맹원들은 군인들이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군경은 오창지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 10여 명을 지서 창고로 끌고 가 권총으로 사살했다. 또한 그날 탈출을 시도한 여천리 주민 이만우를 창고 앞마당에서 공개 총살했다.
같은 날 밤, 지역 유지들이 오창지서에 찾아왔다. "주동자급은 이미 사살했고, 창고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도장만 찍은 자들이니 죽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설득했다. 이에 6사단 19연대 헌병대와 경찰은 구금자 사살을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헌병들은 구금자들을 갑자기 풀어주면 난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열쇠를 의용소방대원이나 오창지서장에게 맡긴 채 창고 문을 잠그고 후퇴했다.
이와 다른 증언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열쇠를 손에 넣은 곽희만 면장이 창고 문을 열려 할 때, 의용소방대장 김아무개가 "왜 빨갱이를 살려주려고 하냐!"며 열쇠를 빼앗아 달아났다고 한다.
7월 11일 새벽, 진천 잣고개 전투에서 패배한 수도사단 군인들이 오창창고를 지나갈 때였다. 창고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보도연맹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령비 학살터 근처에 세워진 위령비
박만순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자물통을 부수었다. 역겨운 냄새가 확 풍겼다. 400여 명의 땀과 오물 냄새였다. 군 장교는 "볏가마니를 문 앞 한쪽에 높이 쌓아라"라고 지시했다. 창고 정문과 후문에는 기관총이 설치됐다. 장교가 들었던 손을 내리자 기관총과 M1 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이어서 수류탄이 터졌다. 어떠한 심문 절차도 없었고, 해명의 기회도 없었다.
보도연맹원들이 짚단 쓰러지듯 창고 바닥에 널브러졌을 때였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군 간부의 외침이었다. 양청리 유광혁(1925년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유광혁은 기절해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저세상으로 갔다. 함정수사도 아닌 '사기 학살'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서 확인사살이 이루어졌다. 창고 곳곳을 다니며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들의 가슴과 등에 대검을 꽂았다. 움직이면 여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확인사살은 창고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근 민가로 도망간 이들의 뒤를 쫓아 인간사냥을 했다.
유리 임만호(1915년생)는 살인귀들의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면사무소 옆 창고 화장실로 숨었다. 군인들의 다가오는 소리에 똥통으로 몸을 담갔다.
7월 11일 새벽의 집단학살극이 벌어진 후 몇 시간 뒤였다. 오전 8시 30분경 F-51 전투기 2개 편대가 나타나 기총 사격과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미군기의 폭격으로 중경상을 입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팔다리와 몸뚱이가 창고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이틀간의 광기 어린 학살극으로 300여 명의 오창·진천 보도연맹원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 와중에 90여 명이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

▲옥녀봉 청원군 북일면-북이면, 괴산군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옥녀봉
박만순
동네 개들이 밥을 안 먹는 이유
북이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됐던 보도연맹원들의 심사가 이루어졌다. 일부가 풀려난 후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이 인근 야산인 옥녀봉으로 이송되었다.
"군경 가족은 손들어!" 북이면 임헌두와 임노진은 순간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사실 그들은 군경 가족이 아니었다. 다행히 추가 질문은 없었고,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빽'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죽음의 골짜기에 묻힐 시간이 다가왔다. '드르륵'하는 기관총 소리와 '빵빵'하는 콩 볶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10명씩 줄지어 있던 이들이 푹푹 쓰러졌다.
군경의 지시로 사전에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약 800명의 공동무덤이 되었다. 길이 40~50m, 폭 2~3m, 깊이 2m 정도인 구덩이였다. 1950년 7월 9일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청원군 북일면·북이면과 괴산군 증평면(현재의 증평군)·사리면·칠성면·불정면·괴산면 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괴산, 청원(북일·북이)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당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갔던 유가족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골짜기에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고 한다. 또한 한동안 송장 냄새가 인근 마을에 진동했다. 당시 북이면 의용소방대원이었던 윤기병은 "동네 개들은 밥을 안 먹었어. 옥녀봉 골짜기에서 시체로 배를 채운 거여"라고 말했다(<동양일보> 1992.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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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개들은 밥 안 먹었어..." 의용소방대원의 끔찍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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