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역 전시장(해자) 임진년 4월 15일의 아침이 동래읍성 남문 앞 해자에 413년간 묻혀 있다가, 2005년 4월 지하철을 공사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드러난 현장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이영천
2005년 4월, 부산 지하철 공사장에 드러난 광경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1592년 4월 15일(음력)의 비참한 아침이 그대로 펼쳐졌다. 물이 고였던 해자다. 습기로 무려 413년 전의 순간이 생생하게 보전되었다. 칼과 창을 비롯한 각종 무기와 갑옷이 무더기로 출토된다. 100여 명의 유골과 함께다.
유골은 적나라한 학살 현장 그대로다. 5살로 추정되는 두개골에 총탄 상흔이 보인다. 20대 여성의 두개골은 둔기에 맞아 쪼개졌다. 어느 여인의 두개골도 날카로운 칼에 베였다. 치아 상태로 보아, 대체로 영양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수안역 지하에 재현된 현장이, 우리를 남문 앞 그날의 참혹한 현장으로 끌고 간다.
왜군은 잔인했고, 장렬히 싸운 동래읍성은 처절했다. 함락된 동래읍성엔 개미도 살아남지 못했다. 군사 3천에 2만 백성이다. 왜의 칼과 조총이 할퀴고 간 학살이다. 만행이다. 110년간 싸운 왜 전국시대의 잔악한 유산이다. 동래읍성 해자에 버려진 2만 3천 희생자 중 겨우 100여 구가 드러났을 뿐이다. 지난 11월 중순, 동래읍성의 흔적을 찾았다.

▲동래부(1872년_지방지도_부분) 동래읍성과 온천천을 사이로 오른쪽의 경상좌수영과 왼쪽 아래로 부산진이 그려져 있다. 2중으로 된 네모난 모습에 '익성'이라 써있는 특이한 모습의 동래읍성 남문이 보인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공격한 왜군이, 침략 사흘째인 15일 동래읍성으로 향한다. 당시 이 지방의 중심지다. 따라서 성의 규모도 부산진이나 다대포진보다 컸다. 하지만 이때 함락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140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북문을 비롯해 복원된 성곽은 규모를 키워 18세기 중반에 쌓은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성곽이 아니다.
부산진에는 용맹한 정발 장군이 있었다. 왜군의 험난한 조선 침략 예고편이다. 그러나 다대포진 전투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왜군의 발목을 하루 동안 묶어 두었는데도 말이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 장군이 거짓으로 성을 비운다. 방심한 왜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 승리에 도취한 틈을 타, 기습으로 왜군을 무찌른다. 성을 지키며 하루를 버티다 결국 몰살 당한다.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이 다대포진에서 윤흥신 장군에게 혼쭐이 난다. 왜군의 발길을 하루씩이나 지체시켰으나, 다대포진 전투는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다.
이영천
윤흥신은 을사사화에 희생당한 윤임의 아들이다. 그의 12대손이 윤봉길 의사다. 윤흥신의 충절을 후손이 잊지 않은 까닭일까.
전투 장면 담은 동래부순절도
부산진과 다대포진에서 혼쭐이 난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다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군사를 3대로 나누어 1대는 서문으로, 2대는 동문으로 보낸다. 본대를 이끌고 송상현이 지키는 남문에 다다른다.
나무판을 세워 '싸워야겠다면 싸울 일이나, 그렇지 않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는 글을 내보이자, 송상현이 곧바로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회답한다.

▲동래부순절도 동래성 전투가 진행된 과정에 따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남문 앞 전투와 나무로 만든 팻말이 보이고, 남문 문루에 송상현 장군이 보인다. 오른쪽 위 함락된 성곽으로 왜군이 들이치고, 그림 가운데 북쪽을 향해 예를 갖추는 송상현이 보인다. 성안 왼쪽 아래 지붕의 기와를 던지며 저항하는 백성이 그려져 있다. 맨 위 도망치는 이각과, 오른쪽 성벽에서 싸우는 조영규도 묘사되어 있다.
국가유산청
순절도에도 묘사가 자세하다. 남문 앞 나무판에 假我途(가아도)와 假途難(가도난)이 보인다. 그 왼쪽엔 숲과 소나무가 우거졌다. 성을 밖에서 쉽게 관찰하지 못하게, 또한 기병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위해 송상현이 조성한 숲이다. 정면에 고니시 지휘소인 차양이 보이고, 문루 위 중앙에 갑옷 입은 송상현이 서 있다.
경상좌병사 이각이 싸우겠다며 동래성에 온다. 육군 사령관 격이다. 그러나 외곽에 진을 쳐 한양으로 가는 길을 막겠다며 성을 나간다. 첩부터 도망시키고 그도 줄행랑이다. 그림의 맨 위 왼쪽에 백마 타고 어디론가 가는 이가 그다. 해군 사령관 격인 경상좌수사 박홍 역시 마찬가지다. 판옥선을 자침 시키고 동래성에 왔다가 사라져 버린다. 양산군수 조영규만 남는다. 개전 초에 드러난 이런 줄행랑이 단지 예고편에 불과했을까.

▲동래 동래읍성 북장대 앞에서 바라 본 지금의 동래부. 왼쪽 망월산 위에 동장대가 있다.
이영천
북문과 동장대 사이에 인생문(人生門)이 있다. 당시엔 없던 문이다. 동문 쪽으로 간 왜군 2대가 성곽 안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결국 그곳이 무너져 왜군이 성안으로 밀물처럼 몰려든다. 성의 함락을 직감한 송상현이 붉은 조복(朝服)을 입고, 객사 앞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모습이 그림 한가운데 보인다. 고향인 전라도 정읍에 계신 아버지께 시로써 편지를 쓰고 난 후다.
그 왼쪽 아래 지붕에 적을 향해 기와를 던지는 갓 쓴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 아래 건물에선 두 여성이 역시 왜군을 향해 기와를 던지고 있다. 그 아래 왜군 몇이 쓰러져 있다. 성을 포위한 왜군은 죄다 양손에 칼을 들었다. 조총 부대는 뒤로 늘어서 총을 걸치고 있다.

▲동래읍성 1592년 함락되어 오랫 동안 흔적도 없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읍성 모형. 수안역 전시장에 마련되어 있다.
이영천
성가퀴에 선 조선군은 모두가 활을 쏘고 있다. 남문과 동문 사이 성벽 위의 장수가 조영규로 추정된다. 성 안에서 싸우는 조선군은 활과 긴 창을 들었다. 칼을 든 조선군은 예를 올리는 송상현 주위에 세 명뿐이다. 호위무사로 추정된다. 상징적인 '帥(수)' 깃발이 유난히 커 보인다.
동래읍성
동래는 이 도시의 전통 터전이다. 고려 시대를 망라한 고읍성(古邑城)이라 불린 동래가 지금의 수영구 망미동, 배산의 동남 쪽에 있었다. 조선의 경상좌수영이 고려의 고읍성 기능을 대체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동래부사접왜사도(동래읍성_부분) 왜 사신을 맞이하는 동래부사를 묘사하는 그림 중 동래읍성의 모습이다. 18세기에 넓혀 다시 쌓은 동래읍성을 묘사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동래읍성은 지금의 동래시장을 중심으로 15세기에 쌓은 1.4km의 성곽이다. 1446년, 세종 때로 추정한다. 이 읍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동래부사접왜사도'보다는 '동래부순절도'에 보이는 읍성 모습이, 비록 후대에 그려졌다 할지라도 당시 모습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후 한양엔 갈 수 없던 왜 사신을 동래부사가 맞이하는 장면이 '동래부사접왜사도'다. 18세기 이후의 읍성을 기반으로 한 그림이다.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인구 증가와 왜관 무역 확대를 이유로 3.8km 읍성을 다시 쌓는다. 이를 1870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한다.

▲송공단 동래성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 장군과 군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송공단. 동래시장 뒤편에 자리한다.
이영천
1906년 통감부가 동래부청을 동래감리서로 바꿔 초량으로 옮겨버린다. 여느 성곽처럼 동래읍성도 일제강점기에 거의 완벽하게 훼철된다. 남문에서 서문 구간이 헐리고, 남문에서 동문 구간에 도로가 개설되어 도시화에 매몰된다. 그 후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헐리고 사라져 도시 밑에 묻혀버린다. 여러 문루와 누각들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 언젠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1979년부터 복원한다. 동장대와 서장대를 필두로 옛 성벽의 흔적을 쫓아 복원이 이뤄진다. 북문과 인생문을 비롯한 1km 남짓의,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이다. 여느 읍성과 마찬가지로 동래읍성도 남문이 주 출입문이다.

▲송상현 선생 전포동 도로 옆에 서 있는 송상현 선생의 동상이다.
이영천
그러나 남문은 특이했다. 옹성에 문루가 2개였다. 각각 세병문(洗兵門)과 주조문(朱鳥門)이라 불렀고, 주조문 누각을 무우루(無憂樓)라 불렀다. 세병은 병기를 씻고, 무우는 근심이 없다는 뜻이니 문루에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남문을 나서면 다리 셋을 만난다. 금정산에서 흘러온 온천천을 건너는 다리들이다. 이중 서쪽의 만년교를 건너면 구포로, 남쪽 세병교를 건너면 부산진이고, 동쪽 이섭교를 건너면 수영강의 경상좌수영에 닿았다. 읍성 자리가 왜 이곳인지 짐작케 하는 단서다.
인생문과 장영실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자리엔 성벽이 없었다. 그 안쪽으로 성곽이 지났다. 동래읍성이 함락된 지점이다. 허물어진 당시 성벽으로 백성이 피난을 갔다. 그들이 모두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로, 후대에 문을 지어 인생문이라 불렀다.

▲인생문 동래읍성 동장대와 북장대 사이에 있는 인생문.
이영천
다른 하나는 시구(屍軀)다. 한양 도성에도 시구문이 있듯, 동래읍성 시구문은 인생문이었다. 개개 인생은 제 아무리 척박한 삶일지라도, 한 편의 소설에 버금간다. 한 생을 살다 떠난 시구가 이 문으로 빠져나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애환과 사연이 얽혀있겠는가.

▲장영실 과학동산 서장대로 오르는 성곽에서 바라 본 동래읍성. 바로 앞이 '장영실 과학동산'이고, 그 너머가 '북천박물관 야외 전시장'이고, 그 멀리가 동장대가 있는 망월산이다.
이영천
또한 동래읍성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를 기리려 북문 근처에 여러 발명품과 함께 '장영실 과학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장영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세종실록에 '동래현 관노인 노비였으며, 그의 부친은 원나라 사람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기록한다. 아버지는 고려 관리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모름지기 기녀인 어머니 신분에 따라 관노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 뭐래도 동래가, 이 도시의 정신이자 시원이며 깊은 뿌리이다. 하지만 동래읍성 지역은, 거대도시 부산의 그렇고 그런 어느 한 곳으로 여길 뿐이다. 한양이 점차 도성으로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과 대조적이다.
413년 만에 단 한 번 그날의 비극을 보여줬을 뿐, 지금 동래는 그때를 기억할 만한 이렇다 할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동래에 전통과 문화의 중심성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현세적이다. 잊혀가는 역사와 정신은 물론 우리 존재를 재확인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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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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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진 두개골, 413년 만에 드러난 임진왜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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