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마친 고3 학생들에게, 이 황금같은 시기에 전하고픈 말

[주장] 삶의 나침반을 어떻게 놓을지 사색하는 시간이기를

등록 2025.12.08 11:51수정 2025.12.0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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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이맘때다. 몇 해 전 모교인 ○○고등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수능을 마치고 졸업 때까지 다양한 직업군의 전문가를 초대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더러 농사꾼 얘기를 해 달라며 내가 쓴 책을 이미 읽은 학생들도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읽었다는 책은 <소농은 혁명이다>와 <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라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모교에 갔다. 최초로 전교조 분회가 만들어진 학교, 전교조 교사 탄압 광풍에도 단 한 명의 강제 해직도 일어나지 않았던 학교였다. 마찬가지로 요즘 세상에 학교에서 농사꾼을 불러 농사지으라고 안내하라니, 참 보기 드문 학교인 건 분명하다. 내 강의를 듣고 농사꾼이 몇 명이나 탄생했는지 아직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내 모교와 같은 학교가 하나 더 기억난다. 고(故) 김인봉 교장 선생님이 계시던 학교다. 노골적으로 농민이 되라고 하지 못하는 풍토인지라 은근슬쩍 농사와 농민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던 그를 떠올리니 기억이 새롭다. 수능이 끝나고 진로를 고민하는 이때 농사꾼을 떠올리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 살아갈지,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둘지를 고심하는 시기에 말이다.

우연히 김인봉 선생님 학교의 졸업 앨범을 처음 보았던 때가 떠오른다. 첫 장을 넘기고는 크게 놀랐다. '편집 실수인가?' 싶었다. 이런 편집은 처음 봤다. 놀라운 컬러 사진을 본 것이다. 학생 대표 사진이 큼지막하게 있고 그 밑에 교장과 교감, 교무주임들의 사진이 있었다. 졸업 앨범의 주인은 학생이기에 학생이 으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아마 2009년 4월께로 기억한다.

첫 만남은 '놀라움'이었다

이런 놀람은 그 전해에도 있었다. 김인봉 선생님이 교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내기 시작한 <까치소리>라는 학교신문 1면에는 교장의 인사말 대신에 1학년 신입생의 글이 실렸다. 2008년 11월쯤으로 기억한다. 학교신문 1면에 신입생의 글이 실리다니. 이 사실에 안 놀라는 사람은 학교교육의 관료성과 고답성, 서열 문화를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놀라야 정상이다.

그렇다면 교장의 인사말은 학교신문 어디쯤 있었을까? 한 페이지를 넘겨 봐도 없다. 학생회장과 2명의 부학생회장 인사말이 있을 뿐이다. 귀퉁이에 교장 인사말이 있었는데 딱 네 줄짜리다. 학생회장 인사말의 1/3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인사말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교사들이 교육 활동에 전념하도록 도와주고,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하도록 보살피고, 학부모들의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교육 도우미'가 되겠습니다."
- 교육 사랑방 대표 김인봉

김인봉, 교장이 아니라 교육 도우미에 불과하다는 김인봉. 그는 '교장실'이라는 팻말을 떼고 '교육 사랑방'이라고 붙였다. 그런 그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3월 장수군 농민회 단합대회 자리였다. 농민회 단합대회에 현직 중학교 교장이 참석하다니 의외였다. 시골 중학교 학부모 대부분이 농민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돈 없는 농민과 노동자는 아랫사람으로 여겨지는 우리 교육 풍토에서는 학교 교장이 이런 자리에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와 악수하면서 들은 김인봉이라는 이름 석 자에서 바로 김두봉 선생과 김원봉 선생을 떠올렸다. 이름뿐 아니라 얼굴도 비슷했다. 김원봉·김두봉은 민족혁명당의 일원으로 독립운동 시기에 무장투쟁뿐 아니라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발군의 혁명가다. 일제 치하의 전설적인 조직가 이재유 선생과 함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이다. 밤이 깊도록 그와 "건배~"를 여러 차례 하면서도 나는 몰랐다. 겨우 2년여 뒤에 내가 그의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오열하며 그의 영정 앞에서 미안하고 슬프고 부끄럽고 괴로웠다.

2008년 그 화사한 봄날의 연속

그와 함께한 봄날은 참 짧았다. 겨우 56세. 억울한 나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하늘나라로 가기에 정말 억울한 나이다. 그리고 그 봄날은 곧 몰아닥칠 혹독한 시련은 상상도 못할 만큼 마냥 따뜻하고 화창했다.

2008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장수중 교사들이 한 마을회관으로 찾아와 교육 상담을 했다. 장수읍 개정리 하평마을회관이었다. 서 아무개 학생부장 선생님이 창을 내듯 벽에 청테이프로 현수막을 붙였다. 현수막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가는 마을별 학부모 좌담회'라고 써 있다.

전국 최초의 찾아가는 마을별 학부모 교육 상담이다. 김인봉 교장과 4명의 교사들은 분주했다. 교자상 위에는 교사들이 준비한 과자와 토마토, 귤 등 다과가 놓였고, 음료수도 컵에 따라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마을의 학부모 15명 가운데 9명이 참여했다. 한 학부모는 집이 멀어 김 아무개 연구부장 선생님이 차를 몰고 가서 모셔 왔다. 그렇게 저녁 8시 10분께 좌담회가 시작되었다.
[관련기사] 밤 늦은 '학교개혁' 밥상, 학부모 '신뢰'가 풀풀~ https://omn.kr/70uo

교사들이 번갈아 가며 학교 예산과 교육과정 운영 계획, 학생 생활지도 계획을 설명했고 이어 학부모 발언 시간이 되었다. 3학년 김 아무개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이가 뭐 잘하는 게 있어야지요. 중간은 한다고 하더만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조 아무개 교무부장이 말을 받았다.

"어머니. ○○이 친한 친구가 누군지 압니다. □□인데요. 도서 반 일을 같이하는데 '아침 편지' 방송을 하는 멤버이기도 해요.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그러자 ○○이 어머니의 검은 얼굴에 슬며시 웃음기가 배어들었다. 이내 학부모들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가 집에 와서는 도통 말을 안 해요. 시험지도 주덜 안 해요. 두들겨 패야 할랑가." 모인 사람들이 모두 와르르 웃었다. "선생님들이 학생한테 약속한 걸 잘 안 지킬 때는 애들이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더만요." 교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밤 10시 15분, 박수 소리와 함께 좌담회가 끝났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엔 학부모와 교사와 학교 일반직 직원들이 직접 투표로 뽑은 공모 교장인 김인봉 선생이 있었다.

2008년 5월, 김인봉 선생은 전북 장수중학교 학부모들을 충돌질(?)하여 나를 장수교육청 대강당에 세웠다. 막 출간된 내 책 <똥꽃>(그물코, 2008)을 놓고 장수중 학교운영위원회 주최로 저자 초청 강연회를 열었다. 봄날의 따스함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그가 '날로 줄어드는 지역 인구문제 해결에는 귀농·귀촌 활동이 중요하다'면서 장수군 귀농인연대 발대식에 와서 축사를 했다. 그는 자기 학교 학생들이 농촌에서 농사짓기를 바란다고 했다. 공부보다 친구들과 잘 놀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학부모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만 골라 했다.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2009년 1월 15일, 전북교육청 징계위원회 심의를 마치고 나온 김인봉 교장은 우리에게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교육청과 이명박 정부는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고 난리지만 실은, 일제고사를 치는 날에 가정학습을 신청한 학생들을 허락한 것이어서 괜찮다고 했다. 학생과 학부모는 가정학습을 신청할 권리가 있고 학교장은 이를 웬만해서는 거절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초·중등교육법' 48조에 나온다.

그 당시 대기실에 있던 20여 명의 기자들의 질문을 받던 김인봉 선생은 다시 "괜찮다"라는 말로 우리를 참 답답하게 했다. 한 기자가 "1차 일제고사 거부로 징계위에 회부가 된 상태에서 또 2차 일제 고사를 거부할 때 부담되지 않았느냐?"라고 물었을 때다. 그는 "학교운영위원회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서 교장은 묵묵히 따르는 게 도리"라고 대답했다. 참석자들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태도였다.

또 다른 기자가 물었다. "올봄에 학교가 개학하면 일제 고사가 또 있는데 거부할 거냐? 징계위원들이 그런 질문 안 하더냐?"라고 물었다. 실제 징계위원들도 몇 번이나 비슷한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개학하면 또 일제고사를 거부하겠느냐'며 애절하게(?) 물었다고 한다. 그도 가벼운 징계를 내리기 위한, '개전의 정'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인봉 교장은 역시나 '답답한'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징계위원들의 질문에,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본다거나 안 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학교 구성원들의 민주적인 의사 수렴 과정을 거쳐 결정하겠다"라고 답했다. 이 말은 일제고사를 거부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누범 중징계를 자초한 발언이다. 나는 기자도 아니면서 불쑥 나서서 그에게 말했다. "좀 정치적인 감각을 발휘해서 '최근 일련의 사태들을 되짚어 보면서 지혜롭게 잘 대응하겠습니다'라고만 답변해도 훨씬 부드럽지 않았겠느냐"라고. 한참을 침묵하던 김인봉 교장의 답변은 이랬다.

"학교 구성원들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말 외에 다른 답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서늘했다. 이 신념. 교육자로서 학생 앞에서, 세상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이 신념. 이 신념을 죽음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 김인봉이다.

전주지방법원의 해임 취소 가처분 결정으로 가까스로 다시 교단에 선 김 교장은 2009년 3월 18일부터 학교로 출근했다. 그달 31일의 일제 고사. 장수중학교는 그 일제 고사를 거부한다. 나는 이 결정을 보면서 감히 안중근을 떠올리고 신채호를 떠올렸다. 둘 다 뤼순(여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뚜벅뚜벅 갈 길을 간 분들이다.

전투에서 사망하는 것과 달리 죽을 걸 뻔히 알고서 그 행위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내가 그랬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의 공포와 먼저 싸워야 한다. 나도 안기부와 보안사와 대공분실로 수도 없이 끌려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바람에 대문이 삐걱대는 소리만 나도 오금이 저리는 수배 생활이나 감방에서 언제 출장이 있을지 조마조마한 경험을 한 사람은 안다. 김인봉이 그랬을 것이다. 잠들 수 없는 밤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더불어 사는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그 꿈을 다 피우지 못하고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났다.

한국 교육의 고질적 폐해와 그 희생자들

일제고사 당시, 장수중학교 학생 8명이 신청한 체험학습 요청을 허락했다는 그 이유 하나로 김인봉 교장은 징계에 회부되고 법원 재판정에 불려 나가게 되었다. 그는 부당한 교육 당국의 처사를 수긍할 수 없었고 이에 저항했다. 개인적인 고집이 아니었다.

김 교장은 교육청 징계와 법원 재판을 받으면서도 "현장체험학습 신청이 들어오면 면밀히 검토하여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계속해서 승인할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하는 것이고,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전국의 많은 교사들 또한 '일제고사는 교육의 획일화와 양극화, 사교육비의 고액화, 창의성과 사고력이 아닌, 단순한 문제 풀이 능력만을 키우는 저급한 교육'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제고사로 학생들을 평가하다 보니 자율학습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도 예상 문제집을 보며 찍기 연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식의 교육이라면 점수가 낮은 에디슨 같은 발명가는 한국 땅에 나타날 수 없다. 빌 게이츠 같은 낙제생도 일찌감치 싹이 잘릴 것이다. 반면 내란 수괴가 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보자. 그는 서울대를 나오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다. 시험 점수 잘 따는 능력만 키운 한국 교육의 고질적인 폐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장은 2009년 10월 13일 전국적으로 실시된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를 위한 일제고사 날에도 학생 2명이 신청한 체험학습을 승인한다. 그는 이날 어느 기자와의 통화에서 "학교 운영계획 속에 '학생 현장체험학습권 존중'이라는 조항이 있고, 이 조항에 근거해 교직원 및 학교운영위원회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체험학습을 승인했다"라고 밝혔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도 피하고 싶은 잔이었을 것이다. 이번 일제고사 날에는 아무도 체험학습을 신청하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체험학습 승인이라는 책임을 교장이 뒤집어써야 하는 현실 때문이다.

그 행위로 징계 받고 재판 받는 상황에서 다시 같은 결정을 해야만 하는 교육자로서의 일관성과 원칙 사이에서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앞서 전북교육청 관계자는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평가를 거부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규정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날 전북 지역에서는 초등생 8명과 중학생 3명 총 11명이 체험학습 신청을 했는데, 중학생 3명 중 2명이 장수중 학생이였다.

이로 인해 징계와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일제고사가 또 예고된 가운데 김인봉 교장이 간암 판정을 받게 된다. 이때가 2010년 5월이었다. 이후 전북대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0년 8월 6일에 돌아가셨다. 교대로 병실을 지키던 우리를 뒤로하고 영영 떠나갔다. 병상에서 내 손을 꼭 쥐고 "장수에 나오면 학교에 꼭 와"라고 하실 때는, 장계 사는 내가 장수에 나갈 때면 가끔 교장실에 들러 차나 식사를 같이했던 때를 기억하시는구나 싶었다. 가랑잎처럼 말라가는 그는 병원 침대 위에서도 늘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참 스승이 그리워지는 시절

늦게까지 장례식장에 남아 밤을 새우는 여성들이 있었다. 21년 전인 1989년 진안여고 3학년 학생들이었다.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될 당시 선생께 국어를 배운 학생들이었다. 여덟 명의 제자들은 새벽까지 스승의 빈소를 지켰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면서 조선 학생들을 모아 신사 참배를 공개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항일 활동으로 2년의 옥고를 치렀었다. 1969년에는 우리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했는데 교육 당국에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모두 징계하라고 했지만 그 지시를 거부해서 교장에서 파면되었다. 하지만 법정 소송을 해서 승소했고 다시 교장에 복귀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교장 선생님이다.

모교 강의에서 대강당에 모인 고3 학생들은 내가 가져간 각종 선물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곧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자유와 해방감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내가 가져간 격월간 <녹색평론>을 구독하는 학생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4년도에 나는 친구들과 몇십 원씩 모아서 월 구독료가 400원이던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사설을 읽고 토론도 했다. 우리 교장 선생님은 <동아일보> 광고 탄압이 발생하자 대대적인 격려 광고 모금 운동을 일으켰고, 우리도 호주머니를 털어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내기도 했다.

수능을 마친 고3 교실이 '내 점수로는 어느 대학을 갈 수 있나?', '내 내신으로는, 내 가정형편으로는, 우리 학교는 어떤 지역 혜택을 받을 수 있나?'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내 삶의 나침반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를 깊이 사색하면서 큰 뜻을 품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빈다.
수능을 마친 이 시기. '어느 대학이냐'보다 '어느 학과냐'를 소중히 여기고, 어느 학과보다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빈다. 어떤 직업인가, 얼마나 벌 수 있나, 취업은 쉬운가 등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이웃을 위해 어떤 보탬이 될지를 고민하는 젊은이로 살아가기를 빈다.

수능을 마친 이 시기에 제대로 한번 생각해 보자. 이미 대학은 거대한 취업학원이 되어있지 않은가?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 강의에 귀 기울이는 학생이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외우고, 알아내고, 예측하는 것은 교수보다 AI(인공지능)가 더 잘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쌓고 지능을 높이는 것은 인공지능이 더 잘한다. 우리 질문하는 능력, 지능이 아니라 지성을 키워야 하는 때가 아닌가. 그런 길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 주에 <오늘의 교육>에도 실립니다.
#김인봉 #수능 #참교육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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