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와 과학수사

등록 2025.12.09 11:54수정 2025.12.09 11:54
0
흔히들 CSI와 과학수사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보도자료 기준, 25년 11월 18일 경찰청이 개최한 행사 이름도 「제11회 국제 과학수사(CSI) 콘퍼런스」다. 그런데 CSI는 Crime Scene Investigation의 약자로, 직역하면 '범죄 현장 수사'다. 엄밀하게 말하면 범죄 현장에서 인적·물적 증거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그에 기초하여 사건을 재구성하도록 돕는 초기 수사가 CSI다. 물론 그 과정에 잠재지문, DNA, 혈흔 같은 물적 증거를 수집·분석하는 데 과학적 기법과 도구를 사용하므로 과학수사를 포함하고 있으나, 피해자 구조, 목격자 인적사항 확인, 관련자 진술청취, 도주로 차단, 보고서 작성 등에서 알 수 있듯, CSI는 모든 과학수사 활동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또한 디지털 포렌식, 부검, 문서 감정, 진술분석 등과 같이 과학수사도 모두 범죄 현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처럼 'CSI=과학수사'라고 하기엔 서로 겹치지 않는 부분이 많다.

19세기 초 패러데이가 제본소 수습생이던 시절 많은 사람이 과학 강연회에서 색이 변하는 액체라든가 자기장으로 움직이는 쇳가루 등에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느꼈듯, 물적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과 결과가 주는 소름 돋는 경외감에 과학수사를 물증 중심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말이 주는 '정확, 무오류, 신뢰, 발전, 미래지향'이라는 어감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물증 수집·분석 영역에 과학수사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유혹했을 것이다. 게다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런데 과학수사를 물적 증거 수집과 분석으로만 한정하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수사는 과학적 도구나 기법을 사용한 물적 증거 수집·분석을 포함하여 추론, 의사결정 등 모든 과정을 과학적 방법으로 하는 수사다.

그러면 과학 또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경험으로 반증될 수 있는 이론체계만을 과학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반증가능성 원리를 제시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어떤 경험적 결과도 자신들의 이론 체계 안으로 재해석하며 설명할 수 있어서 반증할 수 없으므로 과학이 아니라고 포퍼는 주장했다.

과학은 가설로부터 시작하며, 가설이 반증되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반증을 견뎌낸 가설은 이론의 지위를 얻지만, 언제든 새로운 반증에 의해 기각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수사 또는 과학적 수사란 과거에 발생한 범죄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①증거를 수집하고, ②수집한 증거를 충족시키는 복수의 여러 가설을 수립하고, ③각 가설을 반증할 증거를 추가로 수집하고, ④반증된 가설을 제거한 후, ②~④ 과정을 반복하여 실체적 진실에 최대한 수렴하는 가설이 최후에 남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 살아남은 가설이 진실에 가깝긴 하지만 언제든 반증 가능성이 있으므로 100%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구나 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뉴턴 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의해 오류와 한계가 드러난 것처럼.

예를 들어 보면,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 피가 묻은 칼이 발견되었는데, 칼 손잡이에서 A의 지문이 나왔다고 하자. 하급 수사관은 그 지문의 주인을 바로 범인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A를 부르거나 체포한 후 칼을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너의 지문이 나왔으니, 네가 범인이다'라며 자백받으려 할 것이다. 만일 수사관의 기대와 달리 A가 '제가 그 칼을 만진 적은 있지만 저는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부인하면, 자신의 가설이 깨져 당황하고 화난 수사관은 A를 장시간 반복적으로 불러 다그치거나, 여러 번 압수수색하여 확보한 사생활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별건 수사를 통해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등 자백할 때까지 최대한 고통을 주는 가학수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된 칼에서 나온 지문의 주인인 A가 100% 범인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끝까지 고집한다.

하지만 그 수사관이 전문가라면 칼에 지문이 묻은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설정할 것이다. ①A가 범인, ②피해자가 A의 칼을 빌려왔는데 타인이 그 칼로 범행, ③피해자의 칼을 A가 빌려 쓴 후 돌려주었는데 그 칼로 타인이 범행, ④A가 버린 칼을 피해자가 주워다 놓았는데 그 칼로 타인이 범행 등등. 이후 각 가설을 반증하는 증거와 자료를 찾는다. 새로운 증거와 자료로 가설을 제거하고 다시 새로운 가설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가장 진실에 가까운 가설을 채택하여 결론짓는다.

이렇게 과학수사가 반증가능성을 전제한다면 언제든 반증에 의해 내 결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반증이 있다면 기존 가설을 고집하지 말고 내 가설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그런 겸손함도 필요하다. 포퍼도 독재적 사회를 비과학적 이론에, 민주적 사회를 과학적 이론에 비유했다.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는 '비판을 수용하고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다. '열린 마음'은 수사관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한국 검사는 사과나 잘못 인정에 인색하다고 한다. 검사가 기소했는데 무죄판결이 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의 모두 항소하여 피고인을 계속 괴롭힌다. 재심 사건에서 피고인이 무죄라는 증거가 명확해도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에 계속 유죄구형 또는 백지구형이라도 고집한다. 이를 어기고 무죄구형을 한 임은정 검사는 4개월 정직처분을 받았다. 검사 출신 전직 대통령이자 내란 우두머리는 그렇게나 많은 잘못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유치하고 옹졸한 자존심에 찌든 닫힌 마음이다. 이런 자세는 과학수사에 적합하지 않다.

사법시험 과목에 과학적 수사 방법은 없었다. 로스쿨 커리큘럼에도 없을 것이다. 경찰대학은 '범죄수사학' 과목에서 몇 시간 가르쳤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사실 아직 학문적 체계도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연구와 실무 적용 피드백이 필요한 분야다. 아무튼 법 잘 알고, 책 많이 읽고, 시험 잘 보고, 글 잘 쓰는 사람이 수사도 과학적으로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행히 공소청 검사에게는 수사 권한이 주어지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는 경찰도 경험과 도제식 전수에만 의존하는 수사에서 벗어나도록 연구와 교육을 통해 전 수사관 과학수사 역량을 균질적이고 체계적으로 향상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부터 준비해야 한다. 계획과 실행 없이 구호로만 얻어지는 것은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글쓴이 이윤 인권연대 칼럼니스트는 현재 경찰관으로 재직 중입니다.
#CSI #과학수사 #경찰수사능력향상 #이윤 #인권연대
댓글

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1971년생들 보세요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공천헌금 의혹' 김경 시의원, 강선우와 함께 교회 다녔다 [단독] '공천헌금 의혹' 김경 시의원, 강선우와 함께 교회 다녔다
  2. 2 '불의타' 외쳤던 윤석열, 체포방해 혐의 등 징역 5년 선고 '불의타' 외쳤던 윤석열, 체포방해 혐의 등 징역 5년 선고
  3. 3 "'이재명 구타 연행' 연극, 은평제일교회 각성하라" "'이재명 구타 연행' 연극, 은평제일교회 각성하라"
  4. 4 일반인과 엘리트의 대결...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반전 일반인과 엘리트의 대결...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반전
  5. 5 "이것 하나가 사람을 살게 해" 할아버지가 들려준 삶의 지혜 "이것 하나가 사람을 살게 해" 할아버지가 들려준 삶의 지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