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의 섭식장애는 아직도 '개인의 비극'으로 남는가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3)] 호주 정신건강 당사자 인권활동가 사이먼 카털 인터뷰

등록 2025.12.15 11:02수정 2025.12.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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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AW2026 특집]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섭식장애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나 미적 기준의 영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감정, 신체, 관계, 사회 구조, 의료 체계, 기술 환경이 서로 깊게 얽힌 정치적·물질적·제도적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논의는 오랫동안 개인 책임, 가족 문제, 혹은 의학적 진단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는 이러한 협소한 틀을 넘어, 세계 각지의 연구자·활동가·정책 전문가·당사자 연구자들이 경험과 지식으로 구축해온 더 넓은 정치적 지평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현장에서 일하지만 섭식장애를 이해하고 돌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법, 젠더, 노동, 디지털 기술, 불평등, 거버넌스, 당사자 경험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이 시리즈는 그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해 전하며, 한국의 독자 - 특히 당사자, 활동가, 정책 입안자, 연구자 - 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기획·글: 박지니 (작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활동가)

"대한민국은 2008년 UN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습니다"

"대한민국은 2008년 UN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고, 그 뜻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한국 정부가 당사자들이 자발적이고 당사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며 질적으로 우수한 정신보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그 지원은 당사자들에 의해 설계되고 실제로 운영되기까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캠페인을 지지합니다. 여러분도 함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 국가 청원 캠페인에 보내 온 사이먼 카털의 응원 메시지 지난 7월부터 약 2개월에 걸쳐 진행한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아동청소년 섭식장애 치료 및 지원 시스템 구축을 위한 국가 청원 캠페인'을 위해 20여 명의 국내외 인사들이 응원 영상을 보내왔고, 사이먼 카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CRPD와 그에 대한 한국의 비준 사실을 언급하며 글쓴이를 놀라게 했다.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섭식장애 치료 및 지원 시스템 구축을 위해 한국 정부에 청원하는 서명 캠페인에 힘을 실어달라는 요청에 호주 정신건강 당사자 인권활동가 사이먼 카털(Simon Katterl)이 보내온 영상 메시지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과 호주 빅토리아의 작은 지역 이름인 '미안진(Mianjin)'을 짧게 언급한 뒤 곧바로 이 문장을 말했다. 그저 어떤 선의의 국제협약을 슬쩍 언급한 것일 수 있었지만, 내게는 너무 갑작스럽고 낯설었으며, 한국의 현실에서는 거의 이질적인 언어로 느껴졌다.

'UN 장애인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CRPD)'이라니? 한국에서 이 협약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존재는 알고 있으나 실질적 의미는 누구도 모르는 협약이다. 그리고 섭식장애 당사자의 문제가 이 협약의 관심사나 논의 영역에 해당하는지조차, 한국에서는 제대로 논의된 적 없다. CRPD에서 말하는 '장애'는 무엇이며, 정신건강·섭식장애 경험자는 그 정의 안에 어떻게 위치될까. 무엇보다, 강제력 없는 국제협약을 들이밀며 윤리적·정치적 구속을 촉구하는 그의 메시지가 과연 한국 정부에게 실질적 압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나 표정에서는 조금의 의혹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이미 CRPD를 비준한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 비준이 실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한국 정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그는 국제협약의 조항을 당사자 권리 주장의 직접적 근거로 활용하는 걸까?

사이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 아직 일론 머스크가 인수하기 전의 트위터에서 우연히 접한 <Not Before Time(더 늦기 전에)>이라는 캠페인 덕분이었다. 호주 정신질환 경험 당사자들의 캠페인이었고, 동명의 제목 하에 분명한 기획 의도와 구조를 가진 웹사이트가 갖춰져 있었고, 바다를 연상시키는 짙은 푸른색 메인 페이지와 절제된 UI가 인상적인 웹사이트에는 무언가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PDF로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건 단순한 바이럴 캠페인이 아니라, 제도와 법과 국가 책임을 겨냥한 공식 문서였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듯, 그 문서를 관통하는 핵심 언어 — 해악(harm), 강제(coercion), 책무성(accountability), 거버넌스(governance),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 — 은 결국 같은 방향, 같은 요구로 수렴하고 있었고, 그 언어를 만들어낸 과정의 중심에는 사이먼 카털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공식 보고서 표지 'Not Before Time' 호주 빅토리아주 정신건강 시스템에서 '국가가 초래한 해악(state-inflicted harm)'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경험 당사자 주도 보고서 (2022). 사이먼 카털을 포함한 당사자 전문가들이 작성했으며, 빅토리아주의 정신건강부 장관에게 제출된 정책 권고안의 최종본이다. 강제, 차별, 방치 등 제도적 피해를 국가 책임의 언어로 재구성한 최초의 당사자 주도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https://www.livedexperiencejustice.au/
▲공식 보고서 표지 'Not Before Time' 호주 빅토리아주 정신건강 시스템에서 '국가가 초래한 해악(state-inflicted harm)'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경험 당사자 주도 보고서 (2022). 사이먼 카털을 포함한 당사자 전문가들이 작성했으며, 빅토리아주의 정신건강부 장관에게 제출된 정책 권고안의 최종본이다. 강제, 차별, 방치 등 제도적 피해를 국가 책임의 언어로 재구성한 최초의 당사자 주도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https://www.livedexperiencejustice.au/ Not Before Time

그의 영상 메시지에서 느껴졌던 위화감은, 결국 한국의 현실과 그가 서 있는 세계가 어떤 구조적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드러낸 증후와 같았다. 그는 CRPD의 조항을 직접 호출하며 한국 정부에 정치적·법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비준 후 거의 20년이 지나도록 이 협약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체계적 논의조차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 간극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섭식장애 치료 시스템을 국가의 책무로 요구하는 우리의 운동 또한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 붕괴'에서 규제와 책임의 정치로


어떤 급진적 문제의식은 사유에서가 아니라, 오직 체험에서 시작된다. 사이먼 카털도 그랬다. 그가 오늘날 국가 책임, 구조적 해악, 인권 감시를 자신의 정치적 좌표로 삼게 된 배경에는, 한 시기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은 붕괴 경험이 자리한다. 그것은 한국에서 흔히 호출되는 '상처—불운—치유'의 심리학적 서사와는 전혀 다른 결의 균열이었다. 개인의 회복 서사로 봉합되지 않는, 제도가 초래한 균열이자 정치적 질문으로 이어지는 손상이었다.

균열의 시작은 국제원조 현장이었다. 2010년대 초, 유복한 성장기를 보낸 그리피스대 법학도였던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 법학과 국제정치학에서 얻은 지식, 그리고 그가 나중에 "약간의 허영심"이라 부른 감각을 품고 동티모르로 향했다. 아이들의 학업을 돕고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문구류를 공수하고, 학교 운영을 돕고, 선의를 실천하는 일은 서구적 윤리 감수성 안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좋은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교육·보건·폭력·행정·젠더·빈곤이 얽힌 구조적 조건들은 단순한 선의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었고, 어떤 한 번의 개입도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었다. 그가 나중에 기록한 표현을 빌리면, 서구에서 '도움'이라 여겨진 대부분의 행위는 실제 맥락에서는 거의 무효했으며, 때로는 해를 끼치기까지 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구조와 책임의 기원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마주했다. 무엇이 윤리인가, 무엇이 권력인가, '도움'은 누구에게 이롭고 누구에게는 침해인가라는 질문이 그를 압도했고, 이 균열의 순간은 이후 그의 세계관과 정치적 실천을 완전히 다른 궤도로 밀어 올렸다.


그 경험은 결국 그를 무너뜨렸다. 귀국 후 그는 오랫동안 "지속적 위기 상태(perpetual state of crisis)" 속에서 살았다. 그는 "자살을 생각했고, 집 안에 숨어 지냈고, 동료들 간 충돌이 잦은 직장에서는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고 기록했다. 한국식 '마음건강' 담론에서는 이런 표현이 흔히 개인적 취약성이나 심리적 증상으로 번역되지만, 그 위기는 구조적 현실을 직면한 뒤 찾아온 윤리적 붕괴였다. 자신이 믿어 온 도덕적 자아가 실제로는 특정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했던 세계 속에서의 내 의미나 목적이, 내부의 질서 자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붕괴가 이후의 정치적 사유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는 '도움을 주는 사람(helper)'의 위치에서 한 발 물러나, '감시하는 사람(watcher)'의 자리로 이동했다. 국제개발의 프레임에서 국가와 제도를 분석하는 프레임으로, 자선·복지의 언어에서 인권·규제·거버넌스의 언어로 옮겨간 것이다. 왜 치료나 회복, 혹은 동료지원(peer support)의 영역을 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순히 자신이 가장 기여할 수 있는 자리, 그리고 운동 내에서 가장 꾸준히 간과되어 온 자리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당사자 운동 내부에도 다양한 전문성이 존재하지만, 규제·법제·행정 구조를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법학·정치학·심리학적 배경이 바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지점이라고 판단했고, 그 선택은 이후 그의 모든 실천을 견인한다.

2024 퀸즐랜드 정신건강연맹(QAMH) 연례회의 2024년 11월 퀸즐랜드 정신건강연맹 연례회의에 초대된 사이먼 카털은 '운(luck)·기회·행동'이라는 프레임으로, 왜 그리고 어떻게 정신건강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인권을 놓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과거 월스턴 파크(Wolston Park) 같은 정신병원이 국가가 만든 고통과 학대의 공간이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운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은 정신적 붕괴 이후 강제 정신의료 시스템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의 손에 "운 좋게" 안길 수 있었다는 경험을 들려주며, 퀸즐랜드에 이미 존재하는 주(州) 인권법이야말로 이 분야에 주어진 '운'이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인권이 중심에 놓이지 않으면 돌봄과 학대의 경계가 쉽게 흐려지며, 인권법은 따라서 결정이 내려진 뒤 붙이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결정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검토 기준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sb7Us9X2yRE
▲2024 퀸즐랜드 정신건강연맹(QAMH) 연례회의 2024년 11월 퀸즐랜드 정신건강연맹 연례회의에 초대된 사이먼 카털은 '운(luck)·기회·행동'이라는 프레임으로, 왜 그리고 어떻게 정신건강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인권을 놓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과거 월스턴 파크(Wolston Park) 같은 정신병원이 국가가 만든 고통과 학대의 공간이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운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은 정신적 붕괴 이후 강제 정신의료 시스템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의 손에 "운 좋게" 안길 수 있었다는 경험을 들려주며, 퀸즐랜드에 이미 존재하는 주(州) 인권법이야말로 이 분야에 주어진 '운'이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인권이 중심에 놓이지 않으면 돌봄과 학대의 경계가 쉽게 흐려지며, 인권법은 따라서 결정이 내려진 뒤 붙이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결정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검토 기준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sb7Us9X2yRE QAMH

그 과정에서 그는 국제개발 분야에서 발견했던 실패의 역학이 정신건강 시스템에서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구조가 복잡할수록, 권력이 클수록, 책무성은 흐려지고 피해는 더 쉽게 은폐된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본 것처럼, 정신건강 시스템에서도 당사자는 가장 약한 위치에 놓인다. 그에게 개인적 고통은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신호(system signal)"였고, 그 신호는 예외 없이 제도와 권력의 결함을 가리켰다. 그의 개인적 경험 역시 '한 사람의 회복담'을 넘어, 구조와 권력이 개인에게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는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강압적 치료와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던 자신과 달리, 그렇게 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이제까지 이어져온 그의 경력은, 그의 개인적 당사자 경험에서 비롯된 정치적 언어가 개인의 것으로 끝맺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빅토리아 정신질환 당사자 협의회(Victorian Mental Illness Awareness Council, VMIAC)에서 그는 시스템 최하단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독립적 정신건강 권리옹호기구(Independent Mental Health Advocacy, IMHA)에서는 강제력과 권리의 충돌을 최전선에서 목격했다. 정신건강 불만조사위원회(Mental Health Complaints Commissioner, MHCC)에서는 규제기관이 어떤 법적 권한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권한이 제대로 행사될 때 얼마나 많은 삶이 달라질 수 있는지를 배웠다. 빅토리아 평등기회·인권위원회(Victorian Equal Opportunity and Human Rights Commission, VEOHRC)에서는 인권법과 차별금지 구조를 깊이 이해했고, 빅토리아 법률지원공단(Victoria Legal Aid)에서는 법제도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에게 침묵을 강요하는지를 실무적으로 경험했다.

빅토리아주 정신건강 시스템에 대한 왕립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그는 총 34명의 당사자가 증언대에 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단순히 개별 사례를 지원하는 일이 아니라, 개별 증언이 구조적 양상을 드러내고, 그 양상이 정책 권고와 제도 개편이라는 정치적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도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에게 분명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정신건강 시스템의 변화는 치료의 질을 높이거나 회복을 지원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권력과 책임의 재배치에서 시작된다는 것임을.

그가 가장 최근에 택한 행보 역시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다. < Not Before Time >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국가 차원의 해악 인정(State Acknowledgement of Harm)' 모델을 설계한 그는, 올해 8월 빅토리아주를 떠나 퀸즐랜드주의 정신건강 경험당사자 피크바디(Mental Health Lived Experience Peak Queensland, MHLEPQ) CEO로 취임했다. 호주는 주마다 정치문화와 정신건강 제도 생태계가 크게 다르다. 빅토리아가 오랜 당사자 운동과 인권 인프라가 축적된 가장 진보적인 주라면, 퀸즐랜드는 당사자 거버넌스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2021년에야 출범한 MHLEPQ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운동의 기반을 처음부터 구축하는 작업을 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9월 그와 함께 국제섭식장애연구컨소시엄(CoRe-ED)의 연구 주제 제안 발표를 준비하던 당시 그가 "개인 자격이 아니라 MHLEPQ의 이름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던 순간도 전혀 다르게 읽힌다. 그때 나는 그 말을 단순히 업무가 많은 상황에서 조직적 분담을 원하는 제스처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 주를 대표하는 공식 당사자 중심 '피크바디(Peak Body: 특정 집단을 대표해 정부와 공식적으로 협상하고, 정책·예산·제도 설계에 참여하는 대표기관)'의 수장이었고, 동료 경험당사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고, 조직 전체의 지식과 역량을 한국의 현실과 연결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개인의 참여'가 아니라 '집단적 책임'을 전제로 한 참여 방식이었다.

'Not Before Time' 공식 웹사이트 메인 화면 2021년 빅토리아주 정신건강시스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의 최종 보고서는 향후 시스템 개편 방향을 제시했지만, 당사자·생존자들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해악이 부정된 채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문제의식을 반영해 2022년 보건부는 "국가 차원의 해악 인정(State Acknowledgement of Harm)" 모델을 공식적으로 의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Not Before Time' 프로젝트이다. 웹사이트는 이 프로젝트의 배경, 당사자 증언, 정책적 의미, 그리고 전체 보고서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 출처: https://www.livedexperiencejustice.au/
▲'Not Before Time' 공식 웹사이트 메인 화면 2021년 빅토리아주 정신건강시스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의 최종 보고서는 향후 시스템 개편 방향을 제시했지만, 당사자·생존자들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해악이 부정된 채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문제의식을 반영해 2022년 보건부는 "국가 차원의 해악 인정(State Acknowledgement of Harm)" 모델을 공식적으로 의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Not Before Time' 프로젝트이다. 웹사이트는 이 프로젝트의 배경, 당사자 증언, 정책적 의미, 그리고 전체 보고서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 출처: https://www.livedexperiencejustice.au/ Not Before Time

Not Before Time: 국가가 초래한 해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Not Before Time > 프로젝트가 출범한 배경에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빅토리아주 정신건강 시스템에 대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조사가 있었다. 왕립위원회는 영국·호주 같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정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공적 조사 방식으로,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공개 청문을 통해 국가 책임을 규명하고 개혁안을 직접 제시하는 준사법적 감시 장치다.

방대한 조사 끝에 왕립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단호했다. 빅토리아의 정신건강 시스템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고 공식 선언하며, 기존 구조에 서비스를 덧대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이를 위해 제시된 총 74개의 권고안은 구조 개편의 범위와 깊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 지역사회 기반 조기지원 서비스 확대

▲ 당사자 중심의 독립 규제기관 '정신건강 및 안녕 위원회(Mental Health and Wellbeing Commission)' 신설

▲ 강제입원·격리·신체적 구속의 단계적 축소 및 인권 보호 장치 강화

▲ 아동·청소년·청년 대상 연령맞춤형 지원체계 확충

▲ 위기 상황에서 경찰 개입 의존도를 줄이고 대안적 응급지원 모델 개발

▲ 정신건강 인력의 교육·역량·노동조건 개선

▲ 투명한 데이터·성과지표 시스템과 재정 감시 구조 마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이는 단순한 서비스 개선이 아니라 정신건강 정책·거버넌스·인권 규범을 새로 설계하는 '시스템 전환'을 요구하는 보고서였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언론은 이를 '전례 없는' '역사적' 판결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깐의 성취감이 지나면 시민들은 언제나처럼 아무 후속 조치도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더 깊은 냉소와 무기력만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빅토리아주 시민·당사자·활동가들은 이 보고서를 결코 종착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립위원회가 제시한 개혁 로드맵은 야심찼지만, 지난 수십 년간 정신건강 시스템이 당사자에게 남긴 죽음, 구속, 강제입원, 차별 같은 반복적 피해를 '정치적·구조적 책임'의 문제로 명명하진 못했다. 그 피해들은 여전히 "개별 사건"으로 분절돼 있었고, 원인 역시 "서비스 부족"으로 축소돼 있었다. 정작 이 모든 고통을 만들어낸 국가, 법률, 의료시스템이라는 실질적 권력 장치를 정면에서 호출하는 작업은 전혀 없었다.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 제기한 곳이 바로 빅토리아 정신질환 당사자 협의회(VMIAC)였다. VMIAC은 정신건강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왕립위원회가 수많은 구조 개혁안을 내놓았음에도 정작 당사자들이 수십 년간 겪어온 구조적 피해는 여전히 "개별 사건"으로 축소되어 묵살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가 이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개혁도 근본적 변화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지적은 예상치 못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VMIAC에 "정신건강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해악을 초래해왔는지, 그리고 국가가 이를 어떤 절차와 언어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정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요청은 전례 없는 작업을 요구했다. '피해(harm)'를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정치적·구조적 개념으로 재정의하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제도적 모델을 설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2022년 '국가 차원의 해악 공식 인정(State Acknowledgement of Harm)' 프로젝트가 출범했고, 당시 독립 경험당사자 기반 정책 자문가였던 사이먼 카털이 그 책임을 맡았다. 그는 10명의 경험당사자로 구성된 자문단(reference group)과 2명의 경험당사자 퍼실리테이터와 함께 '구조적 해악'의 개념을 정립하고, 국제 비교 연구를 수행하고, 국가적 인정 모델을 만드는 전 과정을 이끌었다. 그 결실이 바로 〈 Not Before Time 〉이다.

〈 Not Before Time 〉은 단순히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는 선언적 구호를 담은 문서가 아니었다. 이 보고서는 먼저 정신건강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해악을 생산해 왔는지를 집요하게 구조화한다. 그가 정의한 해악의 범위에는 식민화 과정의 산물이자 생산자로 기능해 온 정신건강 시스템 자체, 비서구적 건강·회복 관점을 폄훼하며 문화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돌봄을 지속해 온 관행, 원주민에게 불균등하게 더 많이 적용되는 격리·구속과 같은 인종차별적 조치가 포함된다. 또한 격리·구속·비자발적 치료, 경찰에 의한 폭력과 사망, 인슐린 혼수요법(coma insulin therapy), 얼음 목욕(hydrotherapy), 전두엽 절제술, 시설 수용과 폐쇄 병동, 방임과 차별 등 물리적·제도적 폭력 전체가 해악의 역사적 지형으로 포괄된다.

보고서는 사람들이 정신건강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성(personhood)이 사실상 정지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즉, 다른 시민이 누리는 기본적 인권에서 배제되고, 현행 정신건강법이 호주의 국제 인권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하는 구조가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협소한 생의학적 접근은 "당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만을 묻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병리화하며, 그 과정에서 특히 주변화된 집단에게는 약물 부작용, 만성적 건강 악화, 조기 사망이라는 치명적 비용이 전가되어 왔다고 보고서는 분석한다.

빅토리아 정신건강 왕립위원회 증언: "도움을 청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에 직접 증언한 아멜리아 모리스는 "도움을 요청하면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시스템"의 현실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라'는 캠페인 문구와 달리 실제 시스템 안에는 사람을 받아낼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지적했다. 이 증언은 왕립위원회가 결론적으로 내린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진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빅토리아 정신건강 왕립위원회 증언: "도움을 청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에 직접 증언한 아멜리아 모리스는 "도움을 요청하면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시스템"의 현실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라'는 캠페인 문구와 달리 실제 시스템 안에는 사람을 받아낼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지적했다. 이 증언은 왕립위원회가 결론적으로 내린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진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Royal Commission

동시에 보고서는 '도움을 요청하라'는 사회적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한 사람들이 실제로 마주한 것이 지원이 아니라 방기와 인권 침해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로 인해 일부는 생명을 잃었고, 남겨진 가족·돌봄 제공자·지지자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보고서에 따르면 강제력은 입원 절차의 초기 단계부터 경찰 밴 이동·무력 사용에 이르기까지 시스템 전반에 깊이 박혀 있었으며, 많은 정신건강 서비스가 정신건강법과 인권법을 사실상 무력화한 채 비공식적·위법적 관행으로 운영되어 왔다. 게다가 1만 4천 건이 넘는 공식 불만 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기관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인권 보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보고서는 명확히 드러낸다.

자기 도움·상호 지원·동료 지원과 같은 경험 기반 지식은 시스템 전반에서 체계적으로 평가절하돼 왔다. 위기 상황에서 실제로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당사자·가족·친족·동료들이지만, 이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기술과 지혜는 제도적 인정의 바깥에 머물렀다. 특히 친족 돌봄이 일상적인 원주민 공동체의 돌봄은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되거나, 충분한 지원 없이 사실상 착취적으로 동원되어 왔다.

보고서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해악을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식민주의·인종주의·생의학적 패러다임·강제와 위법적 관행·경험 기반 전문성의 조직적 부정·가족·친족 돌봄의 착취가 서로 얽혀 발생시키는 국가 구조의 산물로 재정의한다.

결론적으로 < Not Before Time >은 빅토리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선택지 — 진실·화해/회복적 정의 절차, 공적 사과, 개인 배상, 집단 배상, 상징적 배상, 재발 방지 보장 — 를 제시하며, 그중에서도 경험 당사자 위원이 이끄는 회복적 정의 실행 과정(restorative justice process)과 그 이후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공식 사과를 개혁의 중심 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여기서 회복적 정의 실행 과정은 단순한 사과 절차가 아니라, 정부가 당사자의 해악 경험을 직접 듣고 인정하며, 이를 공적 기록으로 남기고, 가능하다면 생존자·가족과 국가·전문가 집단 사이에서 책임의 재배치와 관계 회복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설계됐다.

요컨대 < Not Before Time >은 정신건강 시스템에서 축적돼 온 상처를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국가가 초래한 구조적 피해'로 명확히 규정한 첫 공식 문건이었다. 보고서는 이 피해가 법과 정책, 제도 설계, 임상 관행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공적으로 인정하게 함으로써, 개혁의 출발점을 '개인의 회복'이 아니라 국가 책임의 인정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국가가 이 책임을 기록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 의무를 구체적 조치로 이행하지 않는 한, 어떤 제도 개선도 표면적 조정에 머물 뿐 진정한 변화가 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기준 제시는 이후 빅토리아뿐 아니라 다른 주와 국가들에게도, 정신건강 개혁에서 무엇이 '책임 기반 접근(accountability-based approach)'의 최소 조건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이후 < Not Before Time >이 제시한 문제의식과 책임 기반 프레임은 다른 주로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2023년 MHLEPQ의 < Shining A Light > 보고서다. 제목처럼 이 문서는 퀸즐랜드 정신건강 시스템의 보이지 않던 영역에 '빛을 비추기' 위한 시도였으며, 피해 사례의 나열이나 단순한 서비스 개선 제안을 넘어서서, 국가가 정신건강 시스템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개인에게 해를 가해왔는지, 그리고 그 해악을 어떻게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책임 있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묻는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

< Not Before Time >과 < Shining A Light >는 동일한 철학적 기반 위에 놓여 있다. 두 보고서 모두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을 하나의 전문지식으로 인정하고, 피해를 말할 권한이 당사자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다. 또한 국가의 구조적 책임을 분명히 규정하며, 회복적 정의·인권·시민권의 언어를 정신건강 정책의 핵심 틀로 도입한다. 무엇보다 두 문서는 모두 "정신건강 시스템 개혁은 그 시스템이 축적해 온 해악을 국가가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동일한 명제를 확고히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끝이 아니다. 사이먼 카털의 문제의식은 결국 국제 인권법의 가장 급진적인 실험이었던 UN 장애인권리협약(CRPD)과 접속하게 된다. 한국의 섭식장애·정신건강 당사자들에게 CRPD가 왜 아직 '해방의 언어'로 작동하지 못했는지, 한국의 비준 과정이 어떠한 정치적 맥락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그 의무 대부분이 여전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CRPD가 어떻게 탄생했고, 한국이 이를 어떤 과정으로 도입했는지를 포함한 그 이상의 서사가 필요하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장으로 이어진다.

CRPD: 세계를 다시 쓰려 했던 조약

CRPD의 탄생: 당사자가 쓴 최초의 인권 조약

CRPD 비준이라는 정치적 제스처

'주권적 이용자(Sovereign Users)'

'구조적' 외상 후 성장(Systemic Post-Traumatic Growth)

호주는 구조를 바꾸고 있다. 한국은 아직 언어조차 갖지 못했다.

위의 내용을 포함한 기사 전문은, 분량을 고려해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 게재되었다.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4758127
#CRPD #사이먼카털 #섭식장애 #잠수함토끼콜렉티브 #UN장애인권리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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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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