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Before Time' 공식 웹사이트 메인 화면 2021년 빅토리아주 정신건강시스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의 최종 보고서는 향후 시스템 개편 방향을 제시했지만, 당사자·생존자들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해악이 부정된 채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문제의식을 반영해 2022년 보건부는 "국가 차원의 해악 인정(State Acknowledgement of Harm)" 모델을 공식적으로 의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Not Before Time' 프로젝트이다. 웹사이트는 이 프로젝트의 배경, 당사자 증언, 정책적 의미, 그리고 전체 보고서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 출처: https://www.livedexperiencejustice.au/
Not Before Time
Not Before Time: 국가가 초래한 해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Not Before Time > 프로젝트가 출범한 배경에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빅토리아주 정신건강 시스템에 대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조사가 있었다. 왕립위원회는 영국·호주 같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정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공적 조사 방식으로,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공개 청문을 통해 국가 책임을 규명하고 개혁안을 직접 제시하는 준사법적 감시 장치다.
방대한 조사 끝에 왕립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단호했다. 빅토리아의 정신건강 시스템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고 공식 선언하며, 기존 구조에 서비스를 덧대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이를 위해 제시된 총 74개의 권고안은 구조 개편의 범위와 깊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 지역사회 기반 조기지원 서비스 확대
▲ 당사자 중심의 독립 규제기관 '정신건강 및 안녕 위원회(Mental Health and Wellbeing Commission)' 신설
▲ 강제입원·격리·신체적 구속의 단계적 축소 및 인권 보호 장치 강화
▲ 아동·청소년·청년 대상 연령맞춤형 지원체계 확충
▲ 위기 상황에서 경찰 개입 의존도를 줄이고 대안적 응급지원 모델 개발
▲ 정신건강 인력의 교육·역량·노동조건 개선
▲ 투명한 데이터·성과지표 시스템과 재정 감시 구조 마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이는 단순한 서비스 개선이 아니라 정신건강 정책·거버넌스·인권 규범을 새로 설계하는 '시스템 전환'을 요구하는 보고서였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언론은 이를 '전례 없는' '역사적' 판결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깐의 성취감이 지나면 시민들은 언제나처럼 아무 후속 조치도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더 깊은 냉소와 무기력만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빅토리아주 시민·당사자·활동가들은 이 보고서를 결코 종착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립위원회가 제시한 개혁 로드맵은 야심찼지만, 지난 수십 년간 정신건강 시스템이 당사자에게 남긴 죽음, 구속, 강제입원, 차별 같은 반복적 피해를 '정치적·구조적 책임'의 문제로 명명하진 못했다. 그 피해들은 여전히 "개별 사건"으로 분절돼 있었고, 원인 역시 "서비스 부족"으로 축소돼 있었다. 정작 이 모든 고통을 만들어낸 국가, 법률, 의료시스템이라는 실질적 권력 장치를 정면에서 호출하는 작업은 전혀 없었다.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 제기한 곳이 바로 빅토리아 정신질환 당사자 협의회(VMIAC)였다. VMIAC은 정신건강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왕립위원회가 수많은 구조 개혁안을 내놓았음에도 정작 당사자들이 수십 년간 겪어온 구조적 피해는 여전히 "개별 사건"으로 축소되어 묵살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가 이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개혁도 근본적 변화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지적은 예상치 못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VMIAC에 "정신건강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해악을 초래해왔는지, 그리고 국가가 이를 어떤 절차와 언어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정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요청은 전례 없는 작업을 요구했다. '피해(harm)'를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정치적·구조적 개념으로 재정의하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제도적 모델을 설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2022년 '국가 차원의 해악 공식 인정(State Acknowledgement of Harm)' 프로젝트가 출범했고, 당시 독립 경험당사자 기반 정책 자문가였던 사이먼 카털이 그 책임을 맡았다. 그는 10명의 경험당사자로 구성된 자문단(reference group)과 2명의 경험당사자 퍼실리테이터와 함께 '구조적 해악'의 개념을 정립하고, 국제 비교 연구를 수행하고, 국가적 인정 모델을 만드는 전 과정을 이끌었다. 그 결실이 바로 〈 Not Before Time 〉이다.
〈 Not Before Time 〉은 단순히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는 선언적 구호를 담은 문서가 아니었다. 이 보고서는 먼저 정신건강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해악을 생산해 왔는지를 집요하게 구조화한다. 그가 정의한 해악의 범위에는 식민화 과정의 산물이자 생산자로 기능해 온 정신건강 시스템 자체, 비서구적 건강·회복 관점을 폄훼하며 문화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돌봄을 지속해 온 관행, 원주민에게 불균등하게 더 많이 적용되는 격리·구속과 같은 인종차별적 조치가 포함된다. 또한 격리·구속·비자발적 치료, 경찰에 의한 폭력과 사망, 인슐린 혼수요법(coma insulin therapy), 얼음 목욕(hydrotherapy), 전두엽 절제술, 시설 수용과 폐쇄 병동, 방임과 차별 등 물리적·제도적 폭력 전체가 해악의 역사적 지형으로 포괄된다.
보고서는 사람들이 정신건강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성(personhood)이 사실상 정지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즉, 다른 시민이 누리는 기본적 인권에서 배제되고, 현행 정신건강법이 호주의 국제 인권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하는 구조가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협소한 생의학적 접근은 "당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만을 묻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병리화하며, 그 과정에서 특히 주변화된 집단에게는 약물 부작용, 만성적 건강 악화, 조기 사망이라는 치명적 비용이 전가되어 왔다고 보고서는 분석한다.

▲빅토리아 정신건강 왕립위원회 증언: "도움을 청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에 직접 증언한 아멜리아 모리스는 "도움을 요청하면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시스템"의 현실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라'는 캠페인 문구와 달리 실제 시스템 안에는 사람을 받아낼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지적했다. 이 증언은 왕립위원회가 결론적으로 내린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진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Royal Commission
동시에 보고서는 '도움을 요청하라'는 사회적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한 사람들이 실제로 마주한 것이 지원이 아니라 방기와 인권 침해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로 인해 일부는 생명을 잃었고, 남겨진 가족·돌봄 제공자·지지자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보고서에 따르면 강제력은 입원 절차의 초기 단계부터 경찰 밴 이동·무력 사용에 이르기까지 시스템 전반에 깊이 박혀 있었으며, 많은 정신건강 서비스가 정신건강법과 인권법을 사실상 무력화한 채 비공식적·위법적 관행으로 운영되어 왔다. 게다가 1만 4천 건이 넘는 공식 불만 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기관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인권 보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보고서는 명확히 드러낸다.
자기 도움·상호 지원·동료 지원과 같은 경험 기반 지식은 시스템 전반에서 체계적으로 평가절하돼 왔다. 위기 상황에서 실제로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당사자·가족·친족·동료들이지만, 이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기술과 지혜는 제도적 인정의 바깥에 머물렀다. 특히 친족 돌봄이 일상적인 원주민 공동체의 돌봄은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되거나, 충분한 지원 없이 사실상 착취적으로 동원되어 왔다.
보고서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해악을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식민주의·인종주의·생의학적 패러다임·강제와 위법적 관행·경험 기반 전문성의 조직적 부정·가족·친족 돌봄의 착취가 서로 얽혀 발생시키는 국가 구조의 산물로 재정의한다.
결론적으로 < Not Before Time >은 빅토리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선택지 — 진실·화해/회복적 정의 절차, 공적 사과, 개인 배상, 집단 배상, 상징적 배상, 재발 방지 보장 — 를 제시하며, 그중에서도 경험 당사자 위원이 이끄는 회복적 정의 실행 과정(restorative justice process)과 그 이후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공식 사과를 개혁의 중심 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여기서 회복적 정의 실행 과정은 단순한 사과 절차가 아니라, 정부가 당사자의 해악 경험을 직접 듣고 인정하며, 이를 공적 기록으로 남기고, 가능하다면 생존자·가족과 국가·전문가 집단 사이에서 책임의 재배치와 관계 회복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설계됐다.
요컨대 < Not Before Time >은 정신건강 시스템에서 축적돼 온 상처를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국가가 초래한 구조적 피해'로 명확히 규정한 첫 공식 문건이었다. 보고서는 이 피해가 법과 정책, 제도 설계, 임상 관행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공적으로 인정하게 함으로써, 개혁의 출발점을 '개인의 회복'이 아니라 국가 책임의 인정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국가가 이 책임을 기록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 의무를 구체적 조치로 이행하지 않는 한, 어떤 제도 개선도 표면적 조정에 머물 뿐 진정한 변화가 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기준 제시는 이후 빅토리아뿐 아니라 다른 주와 국가들에게도, 정신건강 개혁에서 무엇이 '책임 기반 접근(accountability-based approach)'의 최소 조건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이후 < Not Before Time >이 제시한 문제의식과 책임 기반 프레임은 다른 주로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2023년 MHLEPQ의 < Shining A Light > 보고서다. 제목처럼 이 문서는 퀸즐랜드 정신건강 시스템의 보이지 않던 영역에 '빛을 비추기' 위한 시도였으며, 피해 사례의 나열이나 단순한 서비스 개선 제안을 넘어서서, 국가가 정신건강 시스템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개인에게 해를 가해왔는지, 그리고 그 해악을 어떻게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책임 있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묻는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
< Not Before Time >과 < Shining A Light >는 동일한 철학적 기반 위에 놓여 있다. 두 보고서 모두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을 하나의 전문지식으로 인정하고, 피해를 말할 권한이 당사자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다. 또한 국가의 구조적 책임을 분명히 규정하며, 회복적 정의·인권·시민권의 언어를 정신건강 정책의 핵심 틀로 도입한다. 무엇보다 두 문서는 모두 "정신건강 시스템 개혁은 그 시스템이 축적해 온 해악을 국가가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동일한 명제를 확고히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끝이 아니다. 사이먼 카털의 문제의식은 결국 국제 인권법의 가장 급진적인 실험이었던 UN 장애인권리협약(CRPD)과 접속하게 된다. 한국의 섭식장애·정신건강 당사자들에게 CRPD가 왜 아직 '해방의 언어'로 작동하지 못했는지, 한국의 비준 과정이 어떠한 정치적 맥락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그 의무 대부분이 여전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CRPD가 어떻게 탄생했고, 한국이 이를 어떤 과정으로 도입했는지를 포함한 그 이상의 서사가 필요하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장으로 이어진다.
CRPD: 세계를 다시 쓰려 했던 조약
CRPD의 탄생: 당사자가 쓴 최초의 인권 조약
CRPD 비준이라는 정치적 제스처
'주권적 이용자(Sovereign Users)'
'구조적' 외상 후 성장(Systemic Post-Traumatic Growth)
호주는 구조를 바꾸고 있다. 한국은 아직 언어조차 갖지 못했다.
위의 내용을 포함한 기사 전문은, 분량을 고려해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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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의 섭식장애는 아직도 '개인의 비극'으로 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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