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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바닥과 혼연일체된 당신에게 윙크와 이 말을 전합니다

[2026년, 나를 위한 말] 열심을 의심하고 실패를 긍정하기

등록 2026.01.03 11:03수정 2026.01.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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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나를 이끌고, 다독이고, 나아가게 한 문장을 새겨봅니다. 2026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일으킨 말들을 나눕니다.[편집자말]
2026년엔 열심을 의심하기로 했다.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 별안간 열이 나고 병을 얻어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여럿 봐왔으므로. 주말을 불태우며 근무 외 수당 없이 일한 동료가 그랬고, '워커홀릭'으로 살다 해지는 창문을 보며 몸살을 앓던 내 일요일 이부자리가 그랬다. 특별한 에피소드는 아니다. 부모 세대의 부모 세대가 그랬듯, 다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퍽 의심스러워졌다. 죽을 만큼은 아닌데, 그 임계치 직전까지 몽롱한 이 고통의 지도는 왜 서로 닮았을까. 업계를 막론하고 기업이 위기라는 압박 속에서 노동자들은 아파도 숨을 죽이고, 한 해를 난다. 그 한 해가 지나가는 어느 날, 뉴스에 보도되는 산업 현장 속 다치고 죽는 이들은 하나같이 성실한 노동자다.


왜일까.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간밤에 뛰었던 사람은 테트리스 블록을 맞추듯 손쉽게 희생자가 된다. 로켓배송, 당일배송의 편리함 뒤에 혼을 쏙 빼놓게 하는 노동이 도사린다.

애써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권리

 '열심'을 의심하기로 했다.
'열심'을 의심하기로 했다. antjt on Unsplash

2026년 새해엔 열심이란 녀석의 민낯을 보고 싶다. 노동자에게 맹목적으로 최선을 요구하는 사회 시스템은 정작 자신은 왜 '열심히' 개선하지 않을까. 그 뻣뻣함에 괘씸하다고 말해도 좋을 텐데,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어떤 일에 온 정신을 다하여 골똘하게 힘쓰는" 의미를 지닌 '열심'을 행하지 않는 기득권자들에게 정당히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다.

사실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한 첫째 행동은 단출한 것이다. '주눅 들지 않을 권리' 지키기. 그리고 이왕 열심히 하는 데 벗어나자 마음먹은 뒤엔 맨정신이 괜찮은지 살피는 일 년을 잘 살아내고 싶다.

그럼 먼저 할 건 숨구멍을 만드는 일이겠다. 꽉 깨물었던 이를 느슨하게 풀어 주변을 돌아보는 일. 하지만 화려한 책방, 음식점, 관광 명소로 떡칠된 SNS에선 도무지 실패한 하루가 없다. 대체로 현실은 시궁창인데 폰 속에는 무릉도원이 수백 개다.


시뮬라르크(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짜 이미지)로 범벅된 인스타그램 사진들을 현실에 갖고 오려면 대다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2025년을 버티게 했던 문장은 오히려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독여주는 성질의 것이었다.

"포기는 김장할 때나 쓰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포기를 컵밥이나 참치캔 하나로 때우는 한 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의 속이 편하다. (중략) 나는 성공을 긍정하는 이야기보다 실패를 긍정하는 이야기를 더 오래 쓰다듬는다. 내 삶이, 우리네 인생이 대체로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 <우리 반에도 있다>(김현) 중에서

시인 김현이 쓴 청소년 에세이 <우리 반에도 있다>에 담긴 문장이다. 시인은 운동을 시작하려고 수강권을 끊었지만 '운동 한번 가기 어렵네' 말하며 방바닥과 혼연일체되는 사람의 느슨함을 긍정한다. 즉, 사소한 계획을 포기하는 마음을 사사롭게 먹어도 괜찮아, 하고 독자들을 다독여준다.


그는 "옆집 사는 친구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운동화 끈을 꽉 조이는 '인간'인 것보다 그런 때마다 '어쩔 수 없지' 하며 끈을 느슨하게 하는 '사람'인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 느슨함의 자리가 2026년 새해를 맞이하는 청소년에게 필요하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에게도 마찬가지겠다. 이를 꽉 깨물지 않아도, 갖은 애를 쓰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도 불행하지 않을 권리를, 곁에 있는 사람들과 가득가득 누리는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우리 반에도 있다>(김현 청소년에세이)
<우리 반에도 있다>(김현 청소년에세이) 낮은산

실수를 풍선껌이나 초콜릿 한 알처럼 여길 자유

숨죽여 열심이었을 열아홉을 잠깐 떠올려 보자. 수능이 끝난 철, 노력한 만큼 성과를 못 이뤘다고 여겨온 열아홉의 한겨울은 어떨까. 어쩌면 인생 첫 실패를 맛봤다고 책상 앞에서 자책하지 않을까. 현장 실습을 갔거나 취업해 출근하는 또 다른 열아홉은 어떨까. '쓸모'를 다하려면 '실수' 하지 않아야 한다고 노심초사하지 않을까. 일도 학교도 아닌 곳에서 시작하는 열아홉의 아침은 또 어떨까.

그렇게 잇몸이 조금씩 상하는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기 전에, 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났으면 좋겠다. 나의 실패도 친구의 실패도 긍정하는 어른이 되게 하는 마중물이니까. 실패를 긍정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다듬을 줄 알게 되면, 내 상처도 더 잘 돌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곧 스무 살이 되거나 막 성년이 된 이들에게는 어른이 됐다는 설렘만큼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불안이 도사린다. 하여 시인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자각한 십 대 시절의 상처를 찬찬히 그러모아 어린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큰 바윗덩어리가 가로막힌 것 같"아도 "용기 내어 바위를 올라가" 보자고.

그렇게 힘을 북돋은 끝에 남몰래 불안하고, 행복하고, 슬프고, 미워해온 자신 같은 사람이 "우리 반에도 있"으니, 안심하라고 안아 준다. 하여 이 책의 백미는 귀여움이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선심 쓰듯 애써서 말하지 않고, "너 같은 애 또 있어" 하고 찡긋 윙크해준다.

코인노래방에서 애창곡 하나 뽑듯이 새해를 기운차게 보내고 싶은 어른도, 목표지향적인 논술형 책 읽기에 지친 청소년도 퍽 개운하게 읽을 수 있겠다.

"나는 유용한 것들에게조차 몸을 낮추지 않"는다고 했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느긋함을 따라하기엔 깡 있게 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유창한 인공지능의 답변 앞에서 무용한 것과 유용한 것을 구분하기 어렵고, 손해나 실수 없이 살아가려는 이익 집단 속에서 누군가는 벼랑에 몰리고 누군가는 신기루에 허덕인다. 그래서 실패를 풍선껌이나 초콜릿 한 알 만큼으로 여기는 자유가 새순처럼 우리들 사이에 희미하게나마 돌았으면 좋겠다.

힘을 조금 빼고, 멍청해져도 퍽 괜찮은 얼굴로. '망했어' 하고 사색이 된 친구의 얼굴이 여전히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희망이 습관처럼 새해에 번지길 믿는다.

우리 반에도 있다

김현 (지은이),
낮은산, 2025


#새해 #올해의한마디 #김현 #청소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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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보다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사람이 많다. 너도밤나무 산신령에게도 만 가지 사연이 있다고 믿는다. 산신령의 등을 잘 긁어주는 한 마리 날다람쥐가 되고 싶다. 월간지 편집자로 일한다. e-mail/moonf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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