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 조식
김동수
선조가 쓴 남명의 '사제문(賜祭文)'
임금이 신하의 사망에 임하여 쓴 제문도 있다. 이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흔치 않는 경우이다. 선조는 남명 조식의 부음을 듣고 손수 '사제문(賜祭文)'을 지었다. '사제문(賜祭文)'은 '제문을 내린다'는 뜻이 담긴다. 남명은 끝내 벼슬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힌 학자여서 신하가 아닌 처사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제문을 내리면서 자신을 제자로 겸양하는 '소자(小子)'라는 호칭까지 썼다. 새삼 남명의 학덕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하늘이 이토록 문명된 학문과 제도를 버리니, 선비가 나아갈 바를 잃었다. 사람들은 진성(眞性)을 아로새기고, 순정(淳情)을 무너뜨려 세속에 아부했지만 공(公)은 뜻을 더욱 굳게 가져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 문장(文章)은 여사(餘事)로 삼고 오직 대도를 향해 매진하니 그 도달한 경지가 홀로 높았다... 자기의 생각을 발표할 때도 의기가 순정(純正)하고 말과 글(辭章)에 위엄이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이는 봉황의 소리라고? 모든 사람의 입에서 재갈을 벗기니, 간신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고, 뭇 벼슬아치들의 얼굴에 땀이 흐르게 하였다. 위엄은 종묘와 사직에 떨쳤고, 충성스런 분노는 조정을 격동시켰다.
사람들은 조공(曺公)에게 위태롭다 걱정했지만, 공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간당(姦黨)이 물러가고 현덕을 찾음에 공을 으뜸으로 부르니 백의로 마주하여 절실하고 긴요한 좋은 방책을 바치어 묻고 대답함이 산울림 같고 고기와 물이 서로 의지하고 기뻐하듯 하였다... 내 대통을 이은 뒤 일찍이 성망을 흠모하여 선왕의 뜻을 따라 초빙하였건만, 공은 더욱 멀기만 하니 내 정성이 부족했는지 부끄러웠다. 충성어린 소장(蔬章)은 남이 감히 못할 말을 하였고 그로써 과인은 공의 학문이 깊고 넓음을 알았다. 이를 병풍 대신 둘러치고 조석으로 읽어 보며, 공이 오기만 하면 팔과 다리로 삼으려 했는데,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 한 번 병들자 처사의 별이 빛을 잃을 줄이야...
누구를 의지해서 냇물을 건너며 어디에서 높은 덕을 보고 배울까. 소자(小子)는 어디에 의탁하며, 민생들은 누구에 기대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다. 옛날 은둔한 선비들을 되돌아보니 그 시대마다 찬연히 빛났다. 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교훈(風聲)을 세워서 당우唐虞 시대가 순박했고, 노중련(魯仲連)은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였고, 엄자릉(嚴子陵)은 하나라의 기강을 세웠다.
한 사람의 절개와 지조로도 이같이 일세의 퇴폐를 막았거늘 하물며 금옥같이 곧은 미덕 으로서야. 비록 몸은 두어 이랑 논밭에 서식했지만 세상의 경중을 한 몸으로 좌우하여 그 빛은 일대를 밝히고, 그 공은 백세에 남을 것이니 비록 사후에 영예직을 수여(贈職)하지만 어찌 예를 다했다 하겠는가?
지난 날 선왕께서 세상을 같이 하지 못하심을 한탄하시더니, 내 이제 그 말씀 되새겨 봄에 마음이 부끄럽다. 음성과 용모를 영원히 못 보게 되었으니 이 한스러움 어찌 헤아리리오. 남쪽 하늘 바라보니 산 높고 물만 깊고나. 하늘이 은둔한 선비를 아끼지 않아 나라의 대로(大老)가 잇달아 세상을 뜨니, 온 나라가 텅 비어 본받을 데 없음을 어찌하랴.
정철의 '율곡을 제사하는 글'
송강 정철(1536~1593)은 그의 정치적 행보와는 상관없이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를 많이 지은 문인으로 더 잘 알려진다. 이이·성혼 등 당대의 석학들과 친교를 맺었다. 다음은 율곡의 사망에 지은 제문 중 일부이다.
애달프오이다! 공은 나라를 근심하는 한결같은 마음이 죽음에 임하여서도 조금도 쇠하여지지 않아서, 내가 문병을 갔을 때에 간신히 목숨이 붙어있었음에도 내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의 내용이 모두 국사에 대한 것뿐이었소. 이러한 정신이 죽어서도 흩어지지 않고 응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상서로운 구름과 단비로 변하여 이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해줄 것이고, 백성으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들기며 태평성대를 누리게 할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으면 몰아치는 바람과 번쩍이는 천둥으로 변하여 도깨비나 잡귀들을 자취도 없이 물리치도록 하지 않겠소? 또 성인의 상징인 기린이나 봉황이 되어 만 가지 복을 몰아다 주지 않겠소? 또는 큰 산이나 높은 멧부리가 되어 우리 도읍지를 수호하여 천년 만년 동안 국운을 뻗치게 할지 어찌 알겠소?
나의 생각으로는, 공의 영혼은 반드시 위의 네 가지로 변하여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도와주고 보살펴 줄 것으로 믿소. 결코 용렬한 무리의 영혼과 같이 살아서 겨우 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죽어서는 바람에 날리는 연기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나는 믿소.
아하! 공의 죽음을 애도하다 보니 갑자기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소이다. 마치 짝을 잃은 외로운 새와 같이 육체와 그림자만이 서로 의지하는 처지가 되었소. 그것은 줄만 남은 거문고나 구멍 없는 통소와 같아서 아무리 줄을 퉁기고 바람을 불어넣어 보아도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소이다.
아하, 슬프오! 벗은 본래 핏줄로 맺어진 사이도 아니거늘 어쩌면 이리도 슬프단 말이오? 내가 사는 서호(西湖)에 조수가 밀려오고, 동산에는 달이 떠올랐소. 봉래산의 오색 구름은 예나 같은데 애달프오이다! 우리 숙헌은 언제 돌아온단 말이오? 드리고 싶은 말을 끝내고 술잔을 올린 뒤에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부디부디 흠향하소서.
김성일의 '퇴계선생조문'
퇴계 이황에 대한 수많은 조문 중에는 제자 김성일(金誠一)의 글이 일품이다.
쉽고 명확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 道요, 따스한 봄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금과 아름다운 옥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안정복의 '성호선생 조문'
성호 이익이 세상을 떠났을 때(1763년), 그의 문인(門人) 안정복(安鼎福)은 다음과 같이 애끓어 하는 조문(弔文)을 지었다.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 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學)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和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아(秋月氷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는 선생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으니 장차 어디에 돌아가 의지하겠습니까.
안정복(1712~1791)이 누군가. 일찍부터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경학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의학 등 광범한 분야에 폭넓은 지식을 가졌던 인물이다. 안정복은 성호에게서 학문을 배워 실학을 깊이 연구했다. 특히 역사학에 전념하여 종래의 잘못된 역사 지리학을 세밀하게 고증한 <동사강목>을 저술했다. 문집으로 <순암집(順菴集)>이 있으며 스승의 글을 모은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가 해외로 망명할 때 순암의 후손으로부터 빌린 <동사강목>을 한 질 짊어지고 떠났다는 얘기는 잘 알려진다.
성호는 한국고대사의 정통이 고조선으로부터 삼한(三韓), 특히 마한(馬韓)으로 이어진다는 학설을 폈다. 성호의 정통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안정복은 한국사의 정통을 단군조선·기자조선·통일신라·고려로 보았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 어느 한 나라에 정통을 줄 수 없으므로 무통(無統)으로 처리했다. 스승을 사모하는 짧은 글이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조문이다.
사람은 가고 권력이나 부귀도 어김없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글이다. 글이라고 하여 다 남는 것도 아니다. 쓸 만한 사람이, 제대로 쓴 글이라야 오래도록 남는다.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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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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