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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날' 행사의 실체... 그들이 관리하던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

[한국의 미군 '위안부', 진실을 향한 투쟁] 기지 주변 지역사회 운영의 또 다른 주체, 미군

등록 2025.12.18 15:25수정 2025.12.1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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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8년간의 배상 소송에서 122명의 미군 '위안부'가 승소했다. 2025년 9월 5일, 117명의 미군 '위안부'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미군 '위안부'는 새로운 한국여성사를 쓰고 있다. 그렇다. 미군 '위안부'들은 국가폭력이 드리운 긴 그림자와 가부장제 성문화의 깊은 낙인,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뚫고 여성해방과 인간존엄성을 향한 선언을 하고 있다.[기자말]
경기도 파주 법원리 기지촌 거리 상점들 (1960년 6월)  미군은 기지 주변 지역사회 일상에 개입하며 다양한 층위의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경기도 파주 법원리 기지촌 거리 상점들 (1960년 6월) 미군은 기지 주변 지역사회 일상에 개입하며 다양한 층위의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한국저작권위원회

2005년 초, 아직 봄을 맞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 당시 평택은 용산 미군 기지의 확장 이전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뉴스에서 반대 운동을 접하던 나는 당시 학생 기자로서 '기지촌'의 현재를 취재하러 평택을 찾았다.

사실 당시의 관심사는 주민의 기지 이전 반대 운동 그 자체보다는 '기지촌'이라는 공간이었다. 나에게 '기지촌'은 기사와 시사 프로그램에서 접하던 미군 범죄의 온상, '금단의 공간'이자 불법과 불온의 중심지였다. 그 공간의 현황을 학생 사회에 공유하여 미군 기지가 지역사회에 미친 악영향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자 했다.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 당시에는 충격으로 남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We love USA Army -All of the Residents.(우리는 미 육군을 사랑합니다 - 모든 주민 일동) "

그리고 양쪽 길을 따라 나란히 세워져 있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들어왔다. 지역에서는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그 이미지와 의문의 답은 이후 많은 연구를 진행하며 찾을 수 있었다. '기지촌'은 낙인의 공간을 넘어 미군이 지역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집약된 장소였다.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 경계와 그 너머의 공간

그래서, '기지촌'에는 어떤 관계가 조성되고,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이른바 '기지촌 여성'이라고 불리던 미군 '위안부'는 '기지촌'에서 미군과 주민이 형성하는 여러 관계 중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지촌 여성'은 한국 정부와 미군 간 군사 이해관계가 부합하는 가운데 특정 공간에서 허용된 성매매에 종사하던 '기지촌' 구성원이었다. 이와 함께 미군의 소비에 의존하여 생계를 이어갔던 상업 종사자들도 '기지촌'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를 이룬다.

그런데, 미군은 '기지촌'에서 소비자만이 아니었으며, 성매매로 성병이 발생하자 이로 인한 병력 손실을 우려하며 통제에 나선 수동적 대응 주체만도 아니었다. 전쟁의 포성이 멈췄지만, 미군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다. 그리고, 고정된 기지의 주변 지역사회를 기지 운영의 일부로 포함하였다. 이는 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군은 지역 주민과 관계를 형성하며, 지역사회를 일종의 '관리 구역'으로 설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는 기지의 경계가 분명했지만, 미군의 권한은 그 경계를 넘어 기지 주변 지역사회에 적용될 수 있었다.


애초에 기지는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진지이자 외국군의 활동이 전개되는 주둔지"이다. 외국 군대의 치외법권적인 강력한 자위(自衛)가 보장되는 구역으로 주권 개념과의 충돌 가능성이 내재되어있는 공간이다. 즉 미군 기지는 마치 '작은 미국'처럼 미국의 주권 아래에서 미군의 자율성과 권한이 보장된다. 그런데, 그 권한은 기지 내부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 권한은 1966년 체결된 한미 간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드러났다.

주둔군지위협정 제3조 1항: "미국은 시설과 구역 안에서 이러한 시설과 구역의 설정, 운영, 보호 및 관리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후략)

조항만 보면 미군의 시설과 구역 안으로 권한을 제한한 것 같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 3조의 합의의사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3조에 대한 합의의사록: "비상시의 경우에 미국 군대는 시설과 구역의 주변에서 동 군대의 보호와 관리를 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합의한다"

이는 미군이 군사적 목적 혹은 기지 및 군대의 안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지 외부에도, 그것이 한국의 주권 영역이자 민간 공간임에도 권한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부산 하야리아 부대 북서쪽 경계 철책과 주변 마을 (1959년 10월)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 사이에 물리적 경계가 설정되어 있었지만, 미군의 권한은 기지를 넘어 지역에까지 적용될 수 있었다.
▲부산 하야리아 부대 북서쪽 경계 철책과 주변 마을 (1959년 10월)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 사이에 물리적 경계가 설정되어 있었지만, 미군의 권한은 기지를 넘어 지역에까지 적용될 수 있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실제로 한국인에게 기지는 명백한 경계였지만, 미군에게 기지와 주변 지역사회는 분리된 공간이 아니었다. 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미군이 관리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1957년의 미8군 자료에 의하면 지역사회(community)는 "군 시설이나 인력이 주민에게 특별한, 혹은 경제적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다. 즉 기지 주변 지역사회는 미군의 영향력 속에서 그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기지촌'에는 기존 주민들이 계속 거주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아 타지역 주민들이 이주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기지 주변 지역사회는 주민의 선택에 따라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공간이 운영되는 양상과 지역 주민들의 삶이 전개되는 방향은 주민의 선택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바로 미군이라는 핵심 구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지촌'의 미군을 떠올릴 때 소비자, 혹은 미군의 소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방어적 주체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경계지로서 지역사회: 권한의 중첩과 미군의 통제

1957년 파주에서는 미군 헌병 80여 명이 '기지촌'으로 알려진 용주동(현재 파주시 연풍리) 마을의 300여 세대를 수색하며 집에 있는 집기 등 2300여 점을 압수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명 '파주 사건'은 미군의 거짓 보고에서 비롯되었다. 용주동의 한 초등학생이 미 제24사단 헌병 중대 소속 하사에게 담배를 구매해 달라고 부탁하며 5달러를 건넸다.

하지만 이 하사는 돈만 받고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초등학생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미군 하사는 아이를 폭행했다. 화가 난 초등학생은 돌을 던졌다.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하사는 부대에 "노상에서 한국인 강도 4명을 만나 부상을 입었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이 실체 없는 '강도'를 잡기 위해 주민에 대한 기습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1962년 대학생들의 '주둔군지위협정 체결 요구' 운동으로 이어졌던 일련의 미군 관련 갈등 사건 중 하나였으며, 미군의 권한이 기지 외부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국회는 미군의 권한이 지역사회에 부당하게 적용되었음을 지적하며 주둔군지위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주둔군지위협정에서도 미군 헌병의 주변 지역에 대한 권한은 유지되었다. 실제로 제22조 10항 (나)는 '시설과 구역 밖에서의 헌병 권한은 반드시 대한민국 당국과의 약정에 따를 것'을 전제한다. 언뜻 보면 헌병의 권한을 제약하는 것 같지만, 제22조에 대한 합의의사록에서 '미군 당국이 시설이나 구역 주변에서 미군에 대한 범죄에 관하여는 체포 또는 유치할 수 있다'고 보완되었다. 주둔군지위협정 역시 시설 주변에서의 미군 헌병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었다.

경기도 부평 주한 미 군수사령부(ASCOM) 주변 지역 상가 (1964년)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상업 지역은 '오프 리밋'을 매개로 미군의 통제가 가해지던 주요 공간이었다.
▲경기도 부평 주한 미 군수사령부(ASCOM) 주변 지역 상가 (1964년)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상업 지역은 '오프 리밋'을 매개로 미군의 통제가 가해지던 주요 공간이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미군 헌병은 기지 주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미군이 있다면 어디에든 헌병이 있었다"는 부평 주민의 회고처럼 헌병은 일상적으로 지역사회를 순찰하였다. 미군 헌병은 'MP'(Military Police)라고 불렸고, 완장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지위를 식별할 수 있었다. 헌병의 등장으로 미군과 지역 주민 간의 갈등을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미군의 소비에 의존하던 주민들은 헌병의 역할을 더욱 직접적으로 대면하였다. 바로 '오프 리밋'(off limits) 때문이었다. '오프 리밋'은 미군 병사들에 대한 출입 금지 조치이다. 특정 상점에 내려지기도 하지만, 일정한 구역 전체에 내려지기도 했다. 미군과 주민 간 갈등이나 범죄, 성병이 발생하였을 때, 혹은 미군이 규정한 위생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내려졌다. 지역 상점들에 있어 미군의 출입 제한은 곧 수입의 감소를 의미했다.

지역 내 상점들은 '오프 리밋'을 피하려 미군이 제시한 위생 규정과 성병 예방 조치 등을 따랐고, 미군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미군 헌병이 기지 주변 지역사회의 경제 활동을 통제함으로써 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지역사회의 '협조'를 강제하였음을 보여준다.

미군의 '이웃 만들기'와 지역 운영 개입

한편, 이러한 통제는 주한미군이 주변 지역사회에 대한 경계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단 상황에서 적(敵)과 식별하기 어려운 얼굴을 가진 주민들은 사실 언제든 위협 요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통제만 해서는 오히려 반발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군은 지역 주민들을 포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우호적인 이웃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은 축제, 스카우트, 문화 교류 행사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연령대와 성별을 초월하여 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하였다.

매년 서울 포함 미군 주둔 지역에서 시행되었던 '미군의 날' 행사는 대표적인 문화 교류 프로그램이었다. '미군의 날'은 "미군의 자유 세계 안보에 대한 기여를 치하"하는 날이었는데, 대부분 지역사회와 교류 프로그램으로 행사를 구성하였다. 특히 미군의 날은 평소 주민들이 출입할 수 없었던, 그래서 출입 가능 여부로 주민들 사이에 일종의 위계가 형성되기도 했던 미군 기지의 문이 일반에게 열리는 날이었다.

주민들은 개방된 기지에 들어가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가 연결된 공간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미군은 기지 내부에서 미국 문화와 함께 미군이 강한 군사력을 갖고 한국의 안보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였다. '미군의 날'은 기지와 지역사회의 경계를 무너뜨려 미군이 지역사회에 우호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지역사회에서 미군의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두천 주둔 미 제7사단의 기지 개방 (1964년) 기지 개방은 기지와 지역사회의 경계를 무너뜨려 미군 기지가 지역사회와 연결된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행사였다.
▲동두천 주둔 미 제7사단의 기지 개방 (1964년) 기지 개방은 기지와 지역사회의 경계를 무너뜨려 미군 기지가 지역사회와 연결된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행사였다. KTV국민방송

전시된 미군 무기를 구경하는 지역 주민 미군은 '미군의 날' 행사를 활용하여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군의 기여를 강조하고, 지역사회 내 위상을 확인했다.
▲전시된 미군 무기를 구경하는 지역 주민 미군은 '미군의 날' 행사를 활용하여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군의 기여를 강조하고, 지역사회 내 위상을 확인했다. KTV국민방송

주한미군이 지역사회에 제공하는 원조는 지역사회에서 미군의 존재감을 알리는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군은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지방 정부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장비와 인력을 제공하였고, 학교나 고아원을 건설하면서 필요한 물자를 제공했다. 지역사회 내 여러 사회 시설을 지원하기도 했다. 지역 경찰이나 관료는 주한미군에게 감사를 표했고, 때로는 주한미군에 직접 원조를 요청하였다.

나아가 지역 관료와 미군은 회의체를 조직하여 지역사회의 사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1953년부터 설치되었던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Community Relations Advisory Council)는 1957년 미군 기지가 주둔한 전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는 '한미친선위원회'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1970년대의 '한미친선협회'(Korean-American Friendship Councils)와는 성격이 다르다.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에는 해당 지역 미군 사령관 혹은 대표와 지역 관료 대표가 주재하며 미군과 지역사회 현안의 실무자가 참석했다. 논의된 안건은 미군의 지역사회에 대한 교통질서 준수 요구부터 지역사회의 미군에 대한 학교 시설 원조 요청까지 다양했다. 주로 미군과 지역사회가 상호 간 필요한 사항을 협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장이었다.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는 지역 관료의 협조 속에서 주한미군이 지역사회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매개 조직이었다.

부평 ASCOM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 회의록 일부 (1958년 2월 21일)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 운영과 관련한 의제를 논의하였던 '지역사회관계자문위원회'에는 지역 관료와 미군이 참여하였다.
▲부평 ASCOM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 회의록 일부 (1958년 2월 21일)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 운영과 관련한 의제를 논의하였던 '지역사회관계자문위원회'에는 지역 관료와 미군이 참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러한 사례는 미군 기지 주변 지역이 기지 외부에 있으면서도 기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미군의 관리 범위 내에 속하는 일종의 경계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벽한 미군의 영역도 아니지만, 한국의 주권 영역만도 아닌, 권한의 중첩 지역이었다. 미군은 그 모호함을 활용하여 '경계심을 바탕으로 한 이웃 만들기'를 시도했다. 이는 공산 진영에 대한 경계심이 심화하고, 베트남 전쟁으로 동아시아 지역 안보 정세가 경색되었던 냉전기에 시행되었다. 군사적 긴장 속에서 경계 대상으로 형성된 이웃 관계는 미군의 정책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지역사회의 변화와 기억: 기지와 지역 운영의 주체, 미군

1971년 주한미군의 감축은 미군과 지역사회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이전까지 미군은 직접 지역사회의 문화, 경제, 사회, 행정 측면에 개입하고, 주민과의 관계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제는 주민들이 주도한 지역사회 관리에 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다. 미군은 다른 의제보다 위생과 보건에 집중하였고, 주한미군이 지역사회에서 시행하던 원조 활동도 줄여나갔다.

미군은 여전히 병력 관리에 중요한 성병 통제에 집중하되 지역 주민과의 우호적 관계 형성에는 한발 물러났다. 기지와 지역사회의 경계가 선명해졌다. 중요한 건 기지 운영의 효율성이었다. 미군이 지역사회에서 소비하는 달러를 줄이고, 병사들의 활동을 기지 내부로 흡수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지역사회와 미군의 관계는 이제 '한미친선협회'를 매개로 작동했고, 여기에는 지역 상인과 '기지촌 여성'이 참여하였다. 미군의 지역사회 내 권한을 보장하며 협조하였던 한국 정부도 지역사회 관리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미군 감축과 지역사회와의 분리, 협회를 매개로 한 미군의 간접 관리 속에서도 지역사회는 여전히 미군의 안정적 활동을 위한 배후지로 설정되었다. 미군은 지역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지역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감독관 역할을 지속했다.

미군 제2보병사단 한국 주둔 5000일 기념식 (1975년) 한국 유엔한국참전국협회가 주관한 행사로, 주한미군이 감축된 이후에도 한미 친선이 계속됨을 강조하였다.
▲미군 제2보병사단 한국 주둔 5000일 기념식 (1975년) 한국 유엔한국참전국협회가 주관한 행사로, 주한미군이 감축된 이후에도 한미 친선이 계속됨을 강조하였다. 한국정책방송원

1980년대 들어 미군과 지역사회 관계의 공백은 커졌고,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내면서 지역사회에서 미군의 의미도 바뀌었다. 1990년대 용산 미군 기지의 이전이 결정되었을 때 이전지로 예정된 평택에서는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부산, 부평 등 여러 지역에서는 기지 반환 운동이 등장했다. 주민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활 공간을 규정하고,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것이 안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02년 한미 간 연합토지관리계획이 수립되면서 용산 미군 기지의 평택 이전은 시행되었다. 현재 평택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는 주한미군의 중심지이자 동아시아 안보 분담의 허브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는다. 평택 미군 기지 건설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생활 터전을 잃었다. 정부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신도시 건설과 예산 지원을 약속했다.

2019년에는 '군용 비행장·군 사격장 소음 방지 피해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기지 주변의 주민 피해에 대한 보상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지역사회도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기지의 반환과 활용에 관한 주민 의사를 수렴하고, 박물관 건립과 지역사 연구 등으로 미군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기지와 공존하고 있는 주변 지역사회이다. '기지촌'은 마치 다른 지역보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듯 과거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기존의 '기지촌 정화'가 '기지촌'을 통제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내버려두거나 개발 논리로 무마하는 모습이다.

남겨진 과제

서울 이태원의 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는 미군이 개입하고, 통제했던 미군 기지 주변 지역사회의 구성원이었다.
▲서울 이태원의 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는 미군이 개입하고, 통제했던 미군 기지 주변 지역사회의 구성원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기지 주변 지역사회에 대해 정부의 지원과 사회적 관심 외에 무엇이 필요한가. 미군의 존재를 기지 주변 지역과 주민의 삶 속에서 그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안보와 외교적 이익을 목적으로 주민과 생활 공간이 동원되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그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향후 우리 사회의 방향을 고민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중 한 움직임이 2025년 9월 5일 시작되었다. 기지를 보조하는 공간으로서 지역사회를 돌아본다면 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소송이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며, 소송 대상이 미군을 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육군본부법무감실편, 1988, 『행정협정해설서』, 육군본부
금보운, 2019, 「주한미군과 주둔지 주변 지역사회의 관계 (1964~1973년)-미군 대상 지역사회관계 프로그램 운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3
금보운, 2020, 「주한미군기지 인접 지역 내 미군경찰의 활동과 의미 (1954~1970년)」, 『사림』 74
금보운, 2021, 「주한미군의 ‘기지생활권’ 형성과 ‘지역사회관계’의 변화 (1945~1971년)」,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금보운, 2022, 「지역 운영의 군사개입과 ‘예외 공간’의 형성(1957~1971년) - 주한미군의 ‘지역사회관계 자문위원회’ 조직과 활동을 중심으로 -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12
금보운, 2022, 「군사도시의 지역사회관계 형성― 주한미군의 근린 정책과 ‘기지생활권’을 중심으로 (1957~1971년)」, 『도시연구:역사·사회·문화』 29
금보운, 2025, 「주한미군 재편과 지역사회 관계의 재구성: 1970~80년대 평택의 공간사적 분석」, 『도시연구:역사·사회·문화』 40
「허위신고에 놀란 미 헌병대」, 『경향신문』, 1957.4.23.
「정식항의하겠다 파주사건 검찰측 불법으로 단정」, 『경향신문』, 1957.4.25.
#주한미군 #지역사회 #기지촌 #미군기지 #미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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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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