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딛고 서 있는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

황석영 소설 <할매>를 읽고

등록 2025.12.17 09:14수정 2025.12.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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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은 각각 다른 층을 형성했다. 팽나무의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겹겹의 층이었다.' p.46

황석영 작가의 <할매>(2025년 12월 출간)는 작가의 표현대로 겹겹 기억의 층으로 읽혔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군산 하제마을의 팽나무는 그저 묵묵히 서 있는 것으로 자기를 살아낸다. 그를 스쳐 간 햇빛과 바람, 새와 꽃, 나비와 풀과 사람을 품고 차곡차곡 기억을 새기며 거친 세월을 안으로 가다듬으며 긴 세월을 바람처럼 살고 있다. 오는 세월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세월을 붙잡지 않는다. 그것이 오래 견디는 것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이고 철학이다.

<할매>가 출간되기를 오래 기다렸다. 마치 외가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 할머니 보고 싶은 마음을 이불깃 대신하여 뒤척이듯, 어린 시절을 만나러 가는 설렘을 다독이며 기다린 <할매>였다. 왜냐하면 군산의 이야기니까, 내가 수십 년 몸담고 살았던 공간을 발로 누비고 자료를 찾고 사람을 만나며 직접 쓴 작가의 발자취를 빨리 더듬어 보고 싶었으니까.


할매 황석영 작가 군산의 하제 팽나무가 있는 책 표지
▲할매 황석영 작가 군산의 하제 팽나무가 있는 책 표지 김정희

꼭 <할매>여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었을까. 할매가 아니라면 어떤 제목으로 이 팽나무를 말해야 할까. 책을 받고 표지를 어루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책이 할매여야 할 이유를 찾은 것도 같다. 할머니만큼 오랜 보편적 고유명사가 있을까.

할머니는 그저 처음부터 할머니여서 한 번 할머니라 불리면 오랜 세월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로 이어지는 숱한 세월이 곧 할매이고 그 할매는 사는 동안 계속 이어진다. 할머니가 죽으면 또 다른 할머니가 존재하듯 나무 역시 그렇다. 한 나무가 쓰러지면 이미 다른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기둥을 굳히며 가지는 자유라는 영역을 넓힌다.

황석영 작가의 글은 바람과 닮았다. 거칠 것 없다. 한숨에 몇백 년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흘러가는 시간과 세월의 바람을 할매는 놓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절대 잊거나 잃어서는 안 되며, 역사는 바람으로라도 새겨야 한다는 듯 할매 팽나무는 600년 동안 실금 같은 시간을 하늘에 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제 팽나무 겨울 사진 겨울에 찍은 하제 팽나무 사진
▲하제 팽나무 겨울 사진 겨울에 찍은 하제 팽나무 사진 김정희

처음에는 책 <할매>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기 때문에 이렇게 순하게 읽혀도 되나 싶었다. 뭔가 황석영 작가답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개똥지빠귀 얘기가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극적인 자연 다큐를 보는 듯했다. 먹고 먹히는 엄혹한 생의 순환과 생명을 이어가는 것들의 존엄성을 알 수 있도록 앞부분을 충분히 할애하고 있다. 결국 생물의 삶과 사람의 삶이 세대 교체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책 <할매>의 주인공은 사람이고 역사이다. 생물이고 갯벌이며 자연이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다 주인공이다. 그들의 '자잘한 일에 지나지 않은' 일이 곧 역사를 이룬다는 작가의 생각에 닿았다.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머나먼 북방 대륙에서 날아' 온 덕에 오늘날 하제의 팽나무가 존재하게 된 인연의 서사가 아름다웠다. 개똥지빠귀의 목숨을 희생으로 뱉어진 씨앗 한 개가 긴 세월을 품고 축적의 미학으로 오늘도 여전히 나부끼고 있다.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는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에 있는 나무로, 2024년 10월 31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어서 성취한 값진 결과이다.

작년 이맘때 팽나무를 보러 갔었는데, 바람과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을 뿐, 정적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그래서 더 신령스럽게 느껴졌을까? 아니면 나뭇잎을 죄 떨군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팻말도 없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작은 팻말이 전부여서 잠깐 실망스러웠다. 잎이 나오는 봄에 또 와야지 했으나 올해를 다 넘기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꼭 가야 할 명분이 생겼다.

책을 읽은 후에 그곳에 간다면 적어도 작년에 느꼈던 감정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 말이다. 팽나무 앞에 서서 책에서 읽었던 사실은 물론이고, 군산에 살면서 놓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부채감을 가진 것에 대하여도 팽나무 할매에게 말해 볼 작정이다.

몽각과 당골네, 유 사공, 배 지동과 춘삼, 배경순과 배동수, 유 신부(산하)등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삶과 청일전쟁과 일제 강점기, 조선시대의 서학과 동학의 탄압, '중일전쟁이 시작된 해에 비행장 부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받고 속수무책으로 그곳을 떠나야 했던 마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역사를 할매는 그저 켜켜이 나무에 새기고 있었음을 우리는 입에서 입으로, 기억에서 기록으로서 알고 있다.

한때 하제포구는 '서해안에서 최대의 조개 생산지'였다고 한다. 살아 숨 쉬는 갯벌에 조개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인하여 시장은 활기를 띠며 살맛이 나는 고장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을은 비었고, 사람의 흔적이 없다. 살아가야 할 오직 하나의 이유인 갯벌이 사라진 마을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의 하구를 막아 갯벌을 매립해서 농지를 얻겠다는 서해안 간척사업은 집권에 급급한 정치인과 탐욕스러운 건설업자와 사익을 위하여 거들었던 언론이 어우러져 저지른 토목 범죄였다. 신군부가 재집권하면서 전라도 민심을 달래고 표를 얻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내놓은 안이 새만금 개발사업이었다.' - 195~196p.

지금도 진행형인 끝날 줄 모르는 이 사업으로 인하여 갯벌은 사라지고 하제 할매의 기억은 씁쓸함만 기록하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할매 나무에 부디 펄펄 살아있는 갯벌의 새들과 조개, 생명 있는 것들의 합창이 스며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군산 하제 팽나무 겨울 사진 겨울에 찍은 하제 팽나무
▲군산 하제 팽나무 겨울 사진 겨울에 찍은 하제 팽나무 김정희



덧붙이는 글 한 그루의 오래된 나무에는 살아있는 생물과 인간의 기나긴 역사가 촘촘하게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지역사회에 관심을 두면서 사는 일에 대하여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산 #하제 #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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