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심정 그대로, 일제에 맞선 역사가들

몰랐던 역사를 마주한 우리들... 고된 환경 속에서 기록을 남긴 감사한 이름들

등록 2025.12.17 11:03수정 2025.12.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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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책 모임 친구들과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를 읽고 나누는 세 번째 시간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책을 읽으며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헤친 마르크스와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100년이 지난 이야기였지만 읽는 내내 답답하고 안타깝고 분노가 치밀었다.


집을 나서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늘도 내 마음처럼 우울하고 어두워 보였다. 빨리 친구들을 만나서 답답함을 덜어내고 싶었다. 도서관 2층 문화 아지트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눈이 부시다. 도서관에서 등을 바꾼 모양이다. 그 덕에 친구들의 모습이 밝아 보였다. 환하게 반겨주는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다 보니 내 마음도 조금은 맑아졌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지냈던 소소한 이야기로 잠시 숨을 돌렸다. 금값이 다시 오른다며 재테크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살림꾼인 친구가 겨울의 별미인 남해 섬초 조리법을 공개해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섬초를 끓는 물에 데치지 않고 기름에 살짝 볶아서 베트남의 멸치 액젓이라는 느억맘 소스를 뿌려 먹었더니 입맛 까다로운 아들 녀석도 맛나게 잘 먹었다고. 다들 섬초를 사야겠다고 난리였다.

우리 모임의 막내는 사회복지사다. 그 친구가 복지 시설의 아이들과 함께 백령도와 대청도를 다녀왔다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네 시간 동안 뱃길을 달려 도착한 백령도와 대청도의 모습은 이국적이었다. 특히 백령도는 북방 한계선에 가까워 북한이 바로 보였다고 했다. 그 소리에 누군가 그곳 주민들은 지난해 이맘때 정말 불안하고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전직 대통령이 2023년 10월부터 계엄을 모의한 정황이 드러났다는 뉴스를 떠올리며 모두 분노했다.

"그 사람은 도대체 역사에서 무얼 배운 걸까?"

역사는 그저 지나간 일이 아니라는 걸 매주 새롭게 깨닫는다.


금기어였던 마르크스를 다시 알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데이비드 보일의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함께 읽은 책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전문이 실린 데이비드 보일의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데이비드 보일의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함께 읽은 책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전문이 실린 데이비드 보일의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김효숙

마르크스(1818~1883)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금기어였다. 마치 해리포터 이야기 속 '볼드모트' 같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책 속에서 만난 마르크스는 불손한 정치 선동가가 아니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태 속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안타까워한 학자였다. 자본주의 사회를 누구보다 집요하게 공부하고 분석해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소외되는지, 자본가들은 또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는지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말했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로 고통스러웠던 많은 이들에게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마치 동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끝나는 것처럼 이상 사회가 도래하는 것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수천 년을 살아온 인간의 역사를 꿰뚫어 보았지만, 그 이후 세상은 정말 몰랐을까? 자신의 희망 사항을 모두에게 주입하고자 다가오는 현실을 외면한 것이었을까?

안타깝지만 마르크스가 꿈꾸던 '천년왕국' 유토피아는 그저 소설에서나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결론이다. 안타깝고 답답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 역사가들

"우리는 우리 역사를 너무 몰랐어."

친구들은 빨리 우리 민족주의 역사가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박은식(1859~1925)은 조선 말엽의 유학자였다. 하지만 나라가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우리 민족이 깨어나고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국권피탈 후 소설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를 발표해 조선 사람 특히 배운 사람들이 조선이 아닌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젖어 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박은식은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며 <한국통사(韓國痛史)>에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세세히 기록했다. 우리는 <한국통사(韓國痛史)>를 통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실을 잘못 알고 살아왔는지 알았다. 한일병합조약 당시 이완용이 아니라 시종 윤덕영이 옥새를 찍었다는 기록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박은식이 기록해 놓은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들과 일제에 작위를 받은 자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기로 했다.

신채호(1880~1936) 역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정신을 깨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박은식과 달리 그동안 왜곡됐던 고대사를 바로잡으려고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사료를 수집하고 비교·분석했다. 그는 김부식의 사대 역사관을 비판하고, 신라 중심의 역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만이 아니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연개소문의 역할을 밝혀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인 통일신라를 만들어낸 일국 공신 김유신과 김춘추를 사나운 정치가로 해석한 대목에서 우리는 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이긴 자의 시선에 길들여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아(我)"를 우리 민족으로 설정하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여기서 "아(我)"는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인류 모든 역사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그의 역사적 통찰력에 감탄했다.

1990년대 중반에 사학과를 다녔다는 한 친구는 4년 동안 역사를 배우면서도 <한국통사>나 <조선상고사>는 펼쳐본 적이 없다며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역사관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6년에는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도 꼭 읽자고 약속했다.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 자꾸 늘어나지만 뿌듯했다.

유시민이 고른 민족주의 역사가 세 사람 중 마지막 인물은 백남운이었다. 백남운(1895~1979)은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 발전 단계론을 빌려 우리 역사를 설명하려 했다. 아무리 봐도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일제가 내세운 식민지 역사관에 반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유시민 작가의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제 강점이 없었더라도 조선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열어 나갔을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백남운의 절박한 심정을 느꼈다. 그리고 쉽게 비판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또 다른 눈으로 보아서라도 일제에 맞서고자 했던 역사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모두의 삶에 영향을 주는 역사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눈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눈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김효숙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던 참에 아이들과 역사 현장을 다니며 교육하는 한 친구가 학교 역사 교육 현실이 안타깝다고 털어놓았다. 초등학교의 본격적인 역사 교육은 5학년 2학기와 6학년 1학기에 걸쳐 단 1년 뿐이라며 너무 짧다고 했다. 역사가가 어떤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는지도 중요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역사를 전달하는 선생님의 역할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지만 모든 사람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남다른 성취를 이루거나 빛나는 선행을 한 사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기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역사는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199쪽

우리는 마르크스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예견한 극심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그의 식견에 놀랐다. 또한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는데도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먹먹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과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은 소수지만, 그 역사는 우리 모두의 삶에 영향을 준다. 역사는 그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계획하는데 큰 틀을 마련해 준다. 이날 만난 역사가들은 이 전의 어느 역사가들보다 고된 환경 속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그렇기에 더욱 감사했다.

*다음 시간에는 현대를 살면서 기록하고 미래를 예고한 여러 역사가(E.H 카부터 유발 하라리까지)를 만난다. 그들은 어떤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또 미래를 얘기할지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카카오 브런치와 네이버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돌베개, 2018


#역사의역사 #역사를보는눈 #마르크스 #박은식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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