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10월 15일 당시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판가름할 공론조사 시민 참여단의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충남 천안의 계성원에서 진행된 설문조사를 마친 한 시민 참여단이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늘날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혼란과 찬핵 여론의 강화에는 문재인 정부 시기의 한계 또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를 명확한 공약으로 제시했으나, 집권 이후 이 사안을 공론화 절차에 부쳤다. 이 과정에서 공약 이행의 정치적 책임이 정부와 여당이 아닌 시민사회로 전이되었다.
더 큰 문제는 탈핵 선언 이후에도 국민을 상대로 한 체계적인 설명과 설득, 그리고 탈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법·정책적 후속 조치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탈핵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장기적인 전력 수급 전략, 산업 전환, 지역 전환 정책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시기 탈핵 정책은 이러한 종합적 접근보다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론화 과정에서도 정부와 여당은 정책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책임 있게 설명하기보다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 결과 원전산업계와 찬핵 진영은 조직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여론 형성에 나섰고, 공론화 과정이 구조적으로 불균형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에너지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여론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통해 정책을 되돌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숙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정책 결정을 보완하는 절차이지, 정치적 책임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기의 공론화는 결과적으로 "공약 이행 실패의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했다"는 비판을 낳았으며, 이러한 미완의 탈핵 정책은 이후 정부가 신규 원전 추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더 단순화된 공론화 방식을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키운다.
이재명 정부의 신규 원전 건설 공론화 주장은 이미 사회적으로 확인된 에너지 정책 방향을 축소·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특정 원전의 건설 여부를 넘어, 향후 원전 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시민참여단의 판단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론화위원회가 실시한 최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민참여단은 원전 '축소' 53.2%, '현상 유지' 35.5%, '확대' 9.7%라는 응답을 보였다. 이는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논의가 진행될수록 '확대' 의견은 줄어들었고, '축소' 의견은 강화되었다. 심지어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에 찬성한 응답자들 사이에서도 '확대'보다 '축소' 의견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 결과는 공론화의 핵심 메시지가 단순히 "해당 원전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원전을 줄여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값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신고리 공론화는 신규 원전 확대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명확히 드러낸 절차였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이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지 않고 제11차 전기본에 신규 원전 2기를 포함시켰다. 이재명 정부 역시 이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기보다 여론조사와 토론회라는 형식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다. 이는 숙의 민주주의의 성과를 존중하기보다는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적 후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여론조사 공론화'가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여론조사+대국민 토론회' 방식은 숙의 민주주의의 핵심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크다. 숙의 민주주의는 ▲충분한 정보 제공 ▲상반된 관점의 균형 있는 제시 ▲반복적인 학습과 토론 ▲의견 변화의 추적이라는 요소를 전제로 한다. 이는 단순한 의견 수렴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형성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신고리 공론화 역시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시민참여단 구성, 다단계 조사, 합숙 토론이라는 최소한의 숙의 구조는 갖추고 있었다. 반면 이번 방식에서는 시민이 정책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응답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대국민 토론회 역시 전문가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지역 주민과 시민사회의 참여는 제한적인 발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더욱이 현재의 여론 지형은 AI·반도체 산업 성장 담론과 결합된 전력 수요 증가 전망, 그리고 '값싼 전기'라는 오래된 프레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실시되는 여론조사는 정책 환경의 왜곡을 그대로 반영할 가능성이 높으며, 장기 전략인 전력수급계획을 단기적 민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는 숙의의 깊이와 제도화
해외의 숙의 민주주의 사례는 한국 정부의 접근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영국의 '기후 시민의회(Climate Assembly UK)'는 2050년 탄소중립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구성되었으며, 108명의 시민이 약 60시간 내외의 학습과 토론에 참여했다. 이들의 권고안은 단순한 여론이 아니라, 정부 정책을 평가하고 수정하는 기준점으로 활용되었다.
프랑스는 150명의 시민이 참여한 '기후를 위한 시민협약'을 통해 149개의 정책 제안을 도출했으며, 동시에 국가공론위원회(CNDP)라는 상설 기구를 통해 대규모 국책 사업에 대한 공공 참여 절차를 제도화하고 있다. 독일 역시 탈핵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2011년 원자력법 개정을 통해 탈핵을 법률로 명문화함으로써 정책의 지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확보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탈핵의 사회적 합의를 법과 제도로 고정하지 못했고, 그 결과 정권 교체 때마다 에너지 정책이 급격히 흔들리는 불안정성을 반복해 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론을 핑계로 한 정책 후퇴가 아니라, 그간의 실패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책임 있는 제도적 보완이다.
공론화는 정치의 대체물이 아니다

▲ 지난 8월 5일 부산시의회에서 지역의 예술인들이 "핵발전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보성
숙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장치이지, 정치의 책임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니다. 시민에게 물었다는 이유로 정부가 정책 책임에서 물러나는 순간, 공론화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이재명 정부는 여론조사라는 이름의 '가짜 공론화'를 중단해야 한다. 이미 확인된 탈핵과 신규 원전 건설 중단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고, 장기적 에너지 전환 전략을 책임 있게 제시해야 한다. 특히 신고리 공론화에서 확인된 '원전 축소 53.2%'라는 수치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회적 기준이다.
원전 정책은 여론의 파도에 맡길 사안이 아니다. 제12차 전기본은 부풀려진 수요 전망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원전 밀집 위험, 송전망 갈등, 해결되지 않은 사용후핵연료 문제 등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묻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설명하고, 설득하며, 책임지는 데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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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생명 걸려 있는 사업을 '여론조사'로 결정? 정부 왜 이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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