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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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국의 시골 병원에서 물은 대개 큰 문제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면 되기 때문이다. 상수도가 끊기면 생수를 사서 쓰면 되고, 비용이 늘어날 뿐 병원 운영이 멈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병원 밖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돈이 없어서 깨끗한 물을 사 마시지 못하고, 그로 인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지만, 그 선택권조차 없는 이들이 있다.
이 글은 첨단 기술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첨단이 아니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공학의 이야기다.
왜 국제학회는 '화려하지 않은 포스터'에 상을 줬을까
2025년 1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물학회(IWA) Water and Development Congress(물과 개발 총회). 이 자리에서 한 장의 포스터가 'Best Poster Award'(최우수 포스터상)를 받았다. 필자(서울대 공과대학 한무영 명예교수)가 발표한, 메콩 지역 보건시설의 빗물 식수화(Rainwater for Drinking, RFD) 연구였다.
이 연구는 최첨단 기술도, 대규모 인프라도 아니다. 2019년 베트남 리년(Ly Nhan) 보건소 지붕 위에 설치된 것은 4톤짜리 빗물 저장 탱크 4기와, 이를 식수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단순하지만 정직한 공학적 설계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시스템은 대한민국의 공공 연구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보건기구(WHO)와 베트남 보건연구기관이 함께 협력해 구축됐다.
설치 당시 이 사례는 WHO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되었고,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사진과 함께 공유됐다(https://www.who.int/vietnam/news/detail/31-08-2019-who-snu-and-vihema-collaborate-to-improve-wash-in-ly-nhan-district-hospital-ha-nam-province). 그러나 국제학회가 이번에 다시 주목한 이유는 '누가 만들었는가'보다도, 6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조용히 작동해 온 시간이었다. 기술의 새로움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평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문제가 없어서, 오히려 드러나지 않았던 성과"
이 빗물 식수화 시스템은 지난 6년간 큰 고장 없이 운영됐다. 수질 문제도 없었고, 운영 중단도 없었다. 병원은 더 이상 물을 끓이지 않아도 되었고, 병입수를 대량으로 구매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난 6년 동안 약 290톤의 빗물이 식수로 활용됐고, 하루 평균 130~150리터의 깨끗한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됐다. 플라스틱 병 사용과 폐기물도 크게 줄었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생겼다. 문제가 없으니 관심도 줄어들고, 유지관리 예산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ODA 현장에서는 흔히 이런 말이 나온다. "문제가 생겨야 예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 연구는 그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성과라는 점을, 6년의 기록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국제학회가 높이 평가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공학은 돈이 안 돼도,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이 연구는 돈이 되는 기술이 아니다. 특허로 큰 수익을 내는 기술도 아니고, 화려한 상업화 사례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돈이 없어서 물을 사 마시지 못하고, 그로 인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줄이는 데 실제로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값비싼 장비 대신, 공과대학에서 축적된 기초적인 공학 지식과 적정기술, 그리고 현장을 외면하지 않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졌다. '물을 사서 쓰면 된다'는 전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물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서 질문을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첨단 기술이 아니더라도, 올바른 질문과 성실한 실천이 결합될 때 공학은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해법이 될 수 있다.
ODA의 성패는 '설치 이후'에 있다
많은 ODA 사업은 시설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쓰고, 다음 사업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 사례의 핵심은 그 이후에 있었다. 설치 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기록, 현장 점검이 이어졌다. 공대 연구자와 현장 관계자들의 꾸준한 관심이 6년간의 안정적인 운영으로 이어졌다. 국제학회는 특히 대규모 중앙집중형 시설이 아니라, 지역 기반의 분산형 해법을 통해 기후위기와 식수 문제를 동시에 대응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더 이상 물 문제의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술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계속 참여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설계가 뒤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시설 운영과 수질 관리에 참여할수록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게임화(gamification), 스마트폰 앱을 활용한 쉽고 투명한 관리와 기록,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사례를 축적하고 공유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때, 빗물 식수화는 하나의 시설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공학은 그 출발점일 뿐이며, 지속가능성은 결국 기술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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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빗물박사.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빗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다목적 분산형 빗물관리를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 실증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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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 아니어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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