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무대 세팅할 때 띄운 피피티 화면
최은영
행정 간사님께 피피티를 드렸다. 글쓰기반이 연말 파티에 참석하는 건 복지관 역사상 처음이라면서 기대하겠다고 했다.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드디어 결전의 날, 복지관 건물 전체가 들썩거렸다. 우리 팀을 제외한 10개 팀이 모두 빵빵한 음악을 준비해서였다.
모델워킹부터 시작해서 라인댄스, 우쿨렐레와 하모니카, 팝송이 끝날 때마다 흥에 넘친 박수가 나왔다. 이 흥겨움 속에서 음악도 없이, 전문 성우도 아닌 어르신들의 30초 낭독이 시작되면 얼마나 썰렁해질까 하는 마음에 기다리는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열한 번째, 글쓰기반 순서가 됐다. 처음으로 피피티 슬라이드가 내려왔다. 낭독 전에 8초 영상이 대문짝만하게 떴다. 뒷자리까지 발표자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는 게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거기에 핀마이크로 담은 영상 속 목소리는 흥겨웠던 관객을 단번에 집중 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짧은 영상이 끝난 후 낭독이 이어졌다. 지팡이 짚고 절뚝거리며 올라온 어르신의 마지막 문장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잘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였다. 앞의 10개 팀 중 가장 큰 박수 소리가 났다. 우리반 7명 모두의 순서가 지나는 동안 그 소리가 작아지지 않았다.
성과가 아닌 관계의 결과물
돈도 안 되는 일을 굳이 만들지 말자, 에너지를 아끼면서 살자가 내 기본 모토였다. 그동안 글쓰기를 진행했던 강사 중 아무도 참여 안 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더듬거리며 피피티 만드는 시간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르신들이 '우린 뭐 안 해요?'라고 물었을 때, 그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신뢰였고, '선생님이라면 뭔가 만들어줄 거다'라는 기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신뢰를 저버릴 수 없어서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관장님이 울컥했다며 내게 인사할 때 나도 뭉클했다.
이건 일의 성과가 아니라 관계의 결과물이었다. 1년 동안 쌓아온 신뢰가 무대 위에서 꽃핀 순간이었다. 간사님들이 내년 글쓰기 수업 경쟁률 치열하겠다며 행복한 고민이라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좋은 기회란 결국 사람을 통해 찾아온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지켜내는 일이 먼저라는 걸 잊고 있었나 보다. 효율은 그 다음에 챙길 일이다.
집에 가는 길, 핸드폰 속 8초짜리 영상을 다시 봤다. 작은 조명 아래 환하게 웃던 얼굴들, 이게 내가 얻은 최고의 효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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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복지관 사상 최초 발표, 가시방석은 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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