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급제보다 어렵네" 어르신들이 울고 웃는 이 복지관

노년이 외롭지 않을 것 같은 예감

등록 2025.12.21 16:25수정 2026.01.2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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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해. 나 떨어졌어." "와, 붙었어. 두 개 다 됐어." "아니 대체 왜 떨어진 거지? 장원급제보다도 어렵네." 떨어졌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붙었다고 좋아하며 옆 친구와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사람도 있다.

대학입시 결과 발표장이 아니다. 시립노인종합복지관 내에서 있던 일이다. 65세 이상의 학생만 받는 복지관에는 다양한 수업이 개설되어 있다. 어머니는 구연동화와 난타에 합격했다고 좋아하신다. 경쟁률이 치열해 몇 번을 신청해도 계속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과목별로 선정 기준이 다른 듯한데 기존 신청자에게 우선권을 주기도 하고 과목 특성에 맞는 회원을 뽑는 것 같다.


복지관의 인기에는 맛있는 밥도 한몫 한다. 어머니 친구분들 중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지관에서 수업을 듣고 식사까지 다 해결하는 분도 많다고 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메뉴도 다양하며 무엇보다 맛이 좋다는 것이다.

복지관 수업 과목을 살펴보니 정말 다양하다. 고전 중 고전인 논어부터 최첨단의 AI수업까지 인문 과학 기술 예체능 등 원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배움에 시간과 나이를 잊을 것 같다. 또 하나 좋은 건 복지관에서 배워 일정 정도 수준까지 오른 분들이 복지관 내에서 수업으로 재능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배운 걸 다시 내 주위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 베푸는 재능 기부는 배운 걸 활용한다는 뿌듯함도 주고 봉사활동으로 마음을 한껏 고양시킬 것 같다.

며칠 전에는 점심 시간에 난처한 일을 겪은 어머니 친구분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메뉴는 돈가스였는데 어머니 친구분 옆 할아버지가 말을 시키더라는 것이다. "아주머니, 내가 이제 나이 드니 많이 먹지를 못해 맛있게 먹었는데도 절반이 남았으니 남은 것 좀 드실라우? 덜어놔서 깨끗해요"라며 절반을 친구분 접시에 덜었단다. 보통은 음식을 남기고 마는데 음식 버리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어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까운 음식이 버려지지 않게 노력한다. 아낄 줄 모르는 나는 뜨끔한다.

어머니는 복지관에 갈 때마다 입을 옷을 고르느라 고심이다. 수수한 걸 미덕으로 알고 사셨는데 복지관 학생들이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상당히 멋쟁이라는 것이다. 옷차림이며 화장이며 굉장히 세련되어 어머니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나 보다. 지팡이를 짚고 오시는 분들도 많은데 비록 지팡이에 의지는 하지만 외관이 너무나 깔끔하고 세련돼 놀란 적이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노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나머지 한쪽 눈으로만 책을 보며 글을 쓴다고 하여 역시 노장답다 생각했는데 그다음 말에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안전하게 걸으려면 지팡이를 쓰라고 하는데 모멸감이 들어 도저히 그건 못하겠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아무리 걷기가 힘들어도 끝끝내 지팡이를 안 쓰셨던 게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어머니에게는 힘들면 지팡이를 얼마든지 짚으시라고, 노인이라 걷기 힘들어 짚는 것이니 절대 부끄러워하거나 겸연쩍어 하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말은 이리 호기롭게 하지만 겪어보지 않아서 큰소리를 치는 것이지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면 나 역시 약해질 것 같다.

누구도 예외없이 겪게 될 노년의 학교에 미리 가 본 느낌이 들면서 노년이 외롭지 않을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된다. 지금 70-80대 분들은 신산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고초와 가난을 헤치고 잘 버텨주시어 여기까지 당도했다. 어려웠던 시절을 뒤로 하고 그 시절의 고생을 삶의 자양분으로 삼아 뒷세대들에게 경험과 지혜를 전수하고 있다. 노년에 다니는 제2의 학교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그 용기와 활력에 나도 덩달아 힘이 난다.


선배들이 이리 길을 보여주시니 우리도 곧 다가올 노년을 맞이하면 과거급제보다도 당첨되기가 어렵다는 복지관 수업에도 도전해보고, 지팡이를 짚었을지라도 최대한 멋을 내어 보무도 당당하게 다닐 생각이다.
#노년 #복지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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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현안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수학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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