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휴대폰 열게 한 평범한 그 한마디

잊고 있던 단어, 우애

등록 2025.12.23 15:37수정 2025.12.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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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시어머니께서 짜 주신 들기름.
친구 시어머니께서 짜 주신 들기름. 임혜영

만나기로 한 친구가 날짜를 바꾸자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시어머니와 기름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매해 말, 깨를 준비해 방앗간에 가서 일 년 치 참기름과 들기름을 짜는 것이다. 친구네를 포함해 아주버님과 시누이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하니 양이 꽤 되나 보다.

나중에 만난 친구에게 기름은 잘 짰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어머니 집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각자 집의 기름이 다 떨어지면 자식들이 방문해 한 병씩 가져간다는데 보관 장소를 듣고는 의아했다. 소금 항아리라는 것이다.


소금 일 년치를 사서 항아리에 넣어놓고 간수를 빼는데, 그 사이사이에 기름을 박아놓으면 기름이 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나 쓰던 방식이니 이제는 냉장고에 넣으시라 해도 어머니는 '냉장고보다 이게 낫다'며 꼭 소금 사이에 기름을 보관하신단다. 마트에서 기름을 사서 먹는 나로서는 소금의 간수를 빼는 것도, 기름을 소금 사이에 보관하는 것도 다 놀랍다. 경험한 어른 만이 아는 지혜이다.

개인주의가 일상화된 요즘 친구 시어머니는 예전의 가족주의를 지향하신다. 얼마 전 큰 며느리인 친구가 몸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동서와 시누이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형님이, 새언니가 수술을 받았으니 전화 한번 넣어라. 다른 때는 몰라도 아플 때는 특히 챙겨야 한다"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인지 친구는 동서와 시누의 안부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왜 어머니는 바쁜 사람들한테 굳이 전화를 해서 알리셨을까'라고 생각했던 친구도 막상 전화를 받고 나니 가슴이 따뜻해지며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에 위로 받고, 어머니에게도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웃 포비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 사이의 끈끈함이 사라진 걸 자주 느낀다. 가장 가깝다는 형제자매도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집이 많다. 지인이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유언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하길래 무슨 말씀을 하셨냐고 물었다. 너무나 평범한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 말이 가슴을 칠 정도로 와 닿으며 결국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동안 뭘 그리 어렵게 삥 돌아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머니가 유언으로 남긴 말씀은 "우애(友愛)해라"였다. '형제 간 친구 간 서로 사랑하라'는 고전의 교훈 같은 말씀이 아흔 넘은 어머니가 인생의 마지막에 자식들에게 남긴 한 마디였다. 참 어렵고도 쉬운 '우애'를 생각하다 나도 슬며시 휴대폰을 연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쑥스럽지만 문자를 보낸다.


"요즘은 어찌 지내니? 아픈 데는 없니?"
#우애 #어른 #형제자매 #들기름참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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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현안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수학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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