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세 아버지와의 약속, 이제 잊지 않겠습니다

아들이 깜빡해도 불평 드러내지 않으시는 아버지... 새해에는 말씀을 더 무겁게 들어야겠다

등록 2025.12.23 17:07수정 2025.12.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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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하면 잘 지키는 편이다. 직장과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약속을 어긴 적은 거의 없다. 자평하기 쑥스럽지만 약속 때문에 신용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듣지 않았다. 은퇴 이후 바깥 생활을 접고 단순한 집안 살림에서도 크고 작은 약속이 있다. 이제는 가족들과 주고받는 사소한 약속과 일정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내 경우 아버지와 아내와의 약속과 심부름도 매우 중요한 일과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약속을 어기는 실수를 나도 모르게 종종 하고 있다. 나이 탓은 결코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실수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게 반복되기에 내심 걱정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96)와의 약속 중 하나는 매일 드시는 우유를 냉장고에 준비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7시 조반을 드실 때까지 빈 속에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드시고 있다. 우유가 고령의 아버지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저 환히 웃으시는 아버지

 아버지가 매일 드시는 우유를 깜박 잊고 3일 만에 샀다.
아버지가 매일 드시는 우유를 깜박 잊고 3일 만에 샀다. 이혁진

우유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피고 냉장고에 미리 넣어두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이 작업은 좀처럼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우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께 금방 사드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3일 동안 우유를 준비하지 못했다. 아버지 우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그 사이 내 먹을 것을 위해선 얼마나 자주 냉장고 문을 열고 닫았던가. 아버지는 그래도 닦달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우유 사는 걸 깜박 잊어버려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이에 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간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생각하니 자식으로서 미안했다.

 지팡이 고무가 오래 전에 닳았는데 한 달만에 교체해 드렸다.
지팡이 고무가 오래 전에 닳았는데 한 달만에 교체해 드렸다. 이혁진

문제는 이러한 비슷한 실수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연초에 지팡이 고무가 닳아 교체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 닳은 고무를 보니 지팡이 금속 부분마저 마모된 상황이었다. 고장이 나고 오래 지팡이를 쓰고 계셨다.

이때도 고무를 새로 끼워드리겠다고 말하고 근 한 달이 지나고 서야 약속이 생각났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불편을 감수하고 지냈다. 아버지 청력이 그나마 약해서 그렇지 땅을 긁는 지팡이의 금속성 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아버지의 지팡이 고무 교체 요청도 대답은 쉽게 하고 그만 깜빡 잊고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지팡이 가게에 가서 고무를 사서 늦게나마 교체해 드렸다. 아버지는 부자지간이지만 자신의 불평과 불만을 자식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비단 이것 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고난을 체험하며 역경을 이겨낸 아버지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너그럽게 받아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다


나도 아내에게 심부름을 부탁하거나 물건을 사달라고 할 때가 있다. 아내는 나처럼 실수하지 않지만 만약 그럴 경우 나는 아버지처럼 참을성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마 아내에게 섭섭하다며 좁은 속내를 드러냈을 것이 틀림없다.

사실 사소한 것을 무시해 마음이 상할 때가 많다. 가까운 가족일지라도 대답과 약속은 쉽게 할 것이 아니다. 적어 놓고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이유와 변명을 떠나 상대에게 실수를 시인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정을 화평하게 하는 비결이다.

한 해를 돌이켜보면 고령의 아버지에게 지키지 않은 몇 가지 약속이 있어 마음에 걸린다. 그럼에도 너그럽게 받아주신 아버지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새해에는 아버지의 말을 보다 무겁게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60대 이상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
#약속 #우유 #지팡이고무 #지혜 #부자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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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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