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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 들판에 쫙 깔린 고기... '화·금'에만 문 여는 특별한 맛집

[현장 스케치] 독수리 위한 김신환 수의사의 '야생 식탁'... "손님 끊긴 흑두루미 방, 언젠간 다시 차겠죠"

등록 2025.12.25 11:21수정 2025.12.2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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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를 위한 만찬 사람들이 차를 타고 멀찍이 물러나자, 눈치만 보던 독수리 100여 마리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까치와 까마귀도 덩달아 신이 나서 합석했다. 줌을 당겨 촬영한 영상. ⓒ 김선영


23일 오전 9시, 독수리 먹이나누기를 하는 김신환 원장을 따라 충남 서산 천수만으로 동행 취재를 시작했다. 김 원장은 이른 아침부터 여섯 군데 정육점으로부터 고기 부산물을 받아 자신의 승용차에 가득 실어 놓았다.

서산 버드랜드로 향하는 매끈한 포장도로를 눈앞에 두고, 앞서가던 낡은 승용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차가 향한 곳은 울퉁불퉁한 비포장 둑길.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덜컹거리는 김신환(수의사) 원장의 차량 뒤를 쫓으며 생각했다.

'짐도 무거운데, 왜 굳이 편한 길을 두고 저 험한 길로 가실까.'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서도 계속해서 창밖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황량한 천수만
황량한 천수만 김선영

"없네... 없어. 예년 같으면 지금 800마리는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흑두루미가 영 안 보여요."

창밖을 응시하던 김 원장이 핸들을 톡톡 치며 혼잣말처럼 아쉬움을 토해냈다. 그의 시선 끝에 걸린 들판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사라진 단골손님, 흑두루미를 좇고 있었다. 텅 빈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또 다른 'VIP 손님'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차려지는 '독수리 만찬'

김 원장의 차량이 멈춰 선 곳은 독수리들을 위한 '오마카세(주방장 특선)' 식당이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주 2회 문을 여는 이곳의 주 메뉴는 정육점에서 공수해 온 신선한 고기 부산물이다.


 현장에는 이희출 서태안환경연합국장이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 트렁크가 열리자 김 원장과 이 국장, 그리고 자원봉사자가 익숙한 호흡으로 고기를 길게 흩뿌렸다.
현장에는 이희출 서태안환경연합국장이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 트렁크가 열리자 김 원장과 이 국장, 그리고 자원봉사자가 익숙한 호흡으로 고기를 길게 흩뿌렸다. 김선영

현장에는 이희출 서태안환경연합국장이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 트렁크가 열리자 김 원장과 이 국장 그리고 자원봉사자가 익숙한 호흡으로 고기를 길게 흩뿌렸다. "싸우지 말고 골고루,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는 김 원장만의 배식 철학이 담긴 플레이팅(?)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 원장은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오늘도 독수리들이 건강하게 밥을 먹습니다. 후원자님들 덕분입니다."

 후원자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홀로 영상을 찍는 김신환 원장.
후원자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홀로 영상을 찍는 김신환 원장. 김선영

현장에 오지 못하지만, 마음을 보태준 전국의 후원자들에게 전하는 생생한 활동 기록이다. 이는 그에게 단순한 보고가 아닌, "우리가 함께 이 생명을 지키고 있다"는 끈끈한 연대의 확인이다.

사람들이 차를 타고 멀찍이 물러나자, 눈치만 보던 독수리 100여 마리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까치와 까마귀도 덩달아 신이 나서 합석했다. 덩치 큰 독수리와 자그마한 까치가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풍경. 김 원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어느덧 칠순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 수차례 이어진 수술로 성한 곳 하나 없는 몸이지만, 무거워지는 어깨를 이끌고 그가 이 척박한 들판으로 출근하는 이유가 바로 저 미소에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 휴업 중입니다"

독수리들을 위한 성찬은 성황이었지만, 김 원장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해 보였다. 독수리가 식사하는 동안 우리는 1시간여를 더 차를 타고 천수만 구석구석을 돌았다. 목표는 흑두루미였다.
하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10월 말쯤 먹이 나눔을 한 번 한 게 전부라고 했다. 손님이 없으니 식당 문을 열 수가 없는 노릇이다.

김 원장의 시선이 꽁꽁 얼어붙은 무논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시에서 만들어 둔 무논(물 채운 논)은 꽁꽁 얼어버렸고, 간월호 수위가 높아서 흑두루미가 쉴 모래톱이 다 잠겨버렸어요. 환경이 안 받쳐주니 다들 순천만이나 일본 이즈미시로 떠나버린 거죠."

정치권에서는 가로림만 생태 복원을 외치지만, 정작 눈앞의 천수만은 예전만 못한 서식지로 메말라가고 있었다. 김 원장은 "일본으로 간 녀석들이 겨울 나고 다시 북쪽으로 돌아갈 때, 그때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식당 문은 열립니다

돌아오는 길, 문득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천수만이 잊혀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김신환 원장은 "힘 닿는 데까지는 해봐야죠"라며 담담히 다음 '영업일'을 기약했다.

세상에는 이런 곳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화려한 빌딩 숲이 아닌 황량한 들판에서, 말 못 하는 짐승의 배 부른 모습에 자신의 배고픔을 잊는 사람. 계산에 밝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바보같이 해맑은 웃음.

 화려한 빌딩 숲이 아닌 황량한 들판에서, 말 못 하는 짐승의 배 부른 모습에 자신의 배고픔을 잊는 사람. 계산에 밝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바보같이 해맑은 웃음.
화려한 빌딩 숲이 아닌 황량한 들판에서, 말 못 하는 짐승의 배 부른 모습에 자신의 배고픔을 잊는 사람. 계산에 밝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바보같이 해맑은 웃음. 김선영

하지만 오늘따라 김 원장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끝내 만나지 못한 흑두루미 때문이었을까.

천수만의 '독수리 맛집'은 다가오는 금요일에도 어김없이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흑두루미 손님들이 다시 찾아와 "사장님, 밥 주세요" 하고 문을 두드릴 날을 김 원장은 기다리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밥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법, 이 특별한 식당에 오면 배울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천수만 #무논 #흑두루미 #독수리 #김신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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