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뜬 용암 평원이 내게 건넨 위로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의 백미,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에서 느낀 것

등록 2025.12.24 14:53수정 2025.12.2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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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 끝자락에 선 무지개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 지대에 선 무지개가 손에 잡힐 듯하다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 끝자락에 선 무지개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 지대에 선 무지개가 손에 잡힐 듯하다 라인권

'빅 아일랜드'로 불리는 하와이에서 둘째 날, 하와이 볼케이노스 내셔널파크의 할레마우마우 분화구에서는 살아 숨 쉬는 지구를 경험했다고 해야 할까? 지구의 심장 보는 듯한 할레마우마우 크레이터를 탐방하고 거대한 양치식물 '하우푸 트리펀'이 우거진 지역을 지나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에 들어섰다. 아, 체인 오브 크레이터 로드야말로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의 백미였다.

검은 너럭바위 평원의 장관


길은 곧 울창한 수림 지대를 지나 광활한 마우나 울루 용암 지대에 들어섰다. 1970년대에 두 차례의 분화로 마우나 울루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뒤덮은 평원으로, 그 면적이 46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차를 세우고 내외가 그 광활한 용암 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호에호 용암이 이룬 그 검은 너럭바위 평원의 장관에 잠시 말을 잃고 붙박인 듯 서 있었다.

할레마우마우 인근의 하우푸 트리펀가 우거진 길 양치식물 중 키가 가장 큰 하우푸 트리펀가 우거진 길이 이국적이다
▲할레마우마우 인근의 하우푸 트리펀가 우거진 길 양치식물 중 키가 가장 큰 하우푸 트리펀가 우거진 길이 이국적이다 라인권

빗낱이 드는 고원의 거센 바람이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눈은 창세기의 현장 같은 풍광에 매료되었으나 마음 한구석이 편치 못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할레마우마우 분화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불 없이 연기만 내는 분화구, 식어 차가운 돌이 된 용암 벌이 꼭 예전의 열정을 잃고 돌처럼 식어 버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현듯 목사 안수를 앞둔 주일 예배에 나그네로 참석했던 모매가 내게 건넨 인사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뜨겁게 목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학도의 길을 시작하며 사흘을 굶던 일, 첫 사역지 천막 교회와 소똥 냄새 진동하던 사역지가 신도시가 되어 난관에도 새 성전을 건축하던 일, 낮 시간에 안 되면 밤에 하고, 밤에 모이지 못하면 새벽에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분출하는 마그마 같았다고나 할까?

이런 사람이 40년이 훌쩍 넘은 목양 길에서 이제는 연기만 오르는 분화구같이 겨우 연명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열정과 비전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식어 돌처럼 되었다는 자책에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여운 일곱 살 손녀까지 함께하는 가족 여행이어서 설레야 할 이번 여행이 그다지 설레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스스로 못마땅한 내가 거기 할레마우마우 분화구와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의 용암 벌에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우나 울루 용암지대 1970년대 두 번의 분화로 이루어진 광활한 용암 너럭 바위지대가 장관이다
▲마우나 울루 용암지대 1970년대 두 번의 분화로 이루어진 광활한 용암 너럭 바위지대가 장관이다 라인권

그래도 창조의 현장을 보는 듯한 검은 용암의 대지, 분화구를 따라서 바다를 보며 내려가는 화산 지대의 경이로운 풍경은 그 괴로운 마음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마우나 울루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홀레이 파호에로에 광활한 용암 지대와 거기 맞닿은 짙푸른 태평양의 망망함. 체인 오브 클레이터스 로드가 고원에서 바다로 휘어져 내리는 구간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용암 벌과 서쪽으로 아득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해안선의 풍경이 꿈결 같았다.

그 꿈결 같은 길을 내려서자 다시 검은 용암의 평야가 펼쳐졌다.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 지대로 1969년과 1974년의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형성한 검은 용암의 대지이다. 마치 강추위에 얼음이 솟아올라 깨진 것같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얼음장처럼 갈라져 있거나 용암의 물결이 그대로 굳어 작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는 듯한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홀레이 파호에로에 스로프 고원에서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 지대로 내리는 길에서 보이는 서쪽 풍광
▲홀레이 파호에로에 스로프 고원에서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 지대로 내리는 길에서 보이는 서쪽 풍광 라인권

탄성 속에서 '홀레이시티 아치'가 있는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 끝자락에 이르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홀레이시티 아치를 보려면 그 빗속을 걸어야 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터라 이 나이에 그 찬비를 맞을 수는 없었다. 홀레이시티 아치 해안의 절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차를 돌려 다시 용암의 대지를 거의 다 나올 무렵에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바로 코앞 동쪽에 거대한 무지개가 서는 게 아닌가? 황홀했다.

용암지대에 뜬 쌍무지개

거기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용암은 비에 젖어 그 빛이 더욱 검고 저녁 햇살을 머금어 보석같이 빛이 났다. 서쪽으로는 그 윤기 나는 검은 용암 평야 넘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선이 아득하고, 동으로는 용암 벌 넘어 드높은 초원 산자락이 바다로 내려앉는 배경으로 하늘과 땅의 가교인 양 쌍무지개가 높이 섰다. 그 용암 벌로 안으로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면 무지개가 손에 잡힐 듯했다. 그 몽환적인 용암 벌에 선 무지개가 쇠진하고 지친 내게 잘 오셨다고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지대 60년대와 70년대 두번의 분화로 이루어진 파호에로에 용암의 대지가 장관이다
▲홀레이 파호에로에 용암지대 60년대와 70년대 두번의 분화로 이루어진 파호에로에 용암의 대지가 장관이다 라인권

나는 거기서 그 무지개를 보며 용암처럼 식어버린 나를 괴로워할 것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돌아보면 목양으로 늙어 온 세월은 돌이 되는 세월이었다. 아파도 소리 내지 않고, 정으로 쳐도 소리 내지 않는 바위처럼 함묵해 온 길이었다. 내가 시를 쓰고 글을 쓰는 건 그 함묵의 해소였던 셈이다.

그 찬란한 무지개 아래 용암 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이 들어 쇠진한 목자여! 당신 오늘 보지 않았느냐? 식생은 분출하는 용암이 아니라, 식어 버린 용암에서라는 걸!" 그랬다. 분출해 흐르는 마그마는 모든 걸 태웠지만, 그 뜨거운 마그마가 낮은 자리를 찾아 내려가며 식어 돌이 된 곳에는 식생이 자라고 있었다. 이렇듯 내가 분출하는 마그마 같을 때보다 저 돌 같이 되었을 때 그것을 터전 삼아 영혼들이 살고, 공동체가 살 수 있었다. 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글대던 용암이 차가운 돌이 되는 것이 목양의 길이었던 거다.

40년 넘게 태워 왔으니 이제 재만 남고, 평생을 함묵해야 했으니 돌이 되고, 남은 건 예전 같지 않은 몸뚱이 하나. 그래도 이룬 것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 부적감과 죄책에 괴롭고 탈진한 목자에게 무얼 더 태울 것이 있어 연기만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이 불 꺼져 연기만 나고, 식어 버린 저 용암같이 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런 내 목양의 시름과 고뇌는 연기 오르는 분화구 아래에 불이 있듯 아직도 내 속에 불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불타는 용암이 분화의 기억을 찾아서 흐르던 불의 길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 끝자락의 무지개는, 돌이 되어 온 것이 바른 목양의 길이라는 인증이며 위로이자 축복이 아니었을까? 흐르던 마그마가 바다에 이르러 식어 용암의 대지를 이룬 끝자락에 무지개 서듯, 태우고 태워서 재가 되고 돌이 된 목양의 길 끄트머리에 땅과 하늘을 잇는 언약의 무지개가 선 것이 아닐까? 이제 곧 벗어야 할 짐이며, 그쳐야 할 남은 걸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일흔둘의 만추에 침잠했던 나는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 로드에서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지난 10월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가족 여행으로 하와이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티스토리에도 실립니다.
#하와이 #빅아일랜드 #용암 #가족여행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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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신대원, 연세대 연합 신대원에서 신학을 했다. 은혜로교회를 86년부터 섬겨오는 목자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다!"는 지론으로 칼럼과 수필, 시도 써오고 있다. 수필과 칼럼 집 "내 영혼의 샘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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