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내면 보도연맹원 학살지도 청원군 강내면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지도
박만순
6.25가 난 지 10여 일 후, 강내지서에서는 방공호를 판다며 주민들을 소집했다. 탑연리 동산에 방공호를 판 뒤, 보도연맹원들만 골라 지서 창고에 구금했다.
강외면 역시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이루어졌다.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강외지서장이 지서 창고 문을 열어 줘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서장의 "가라!"라는 말을 청주 충북보도연맹 사무실로 가라는 의미로 이해한 5명이 청주로 가다가 강내지서 경찰에게 붙잡혔고, 이들도 창고에 구금되었다.
"도망가는 놈들은 6촌까지 모두 죽일겨!"
강내지서장의 엄포는 공갈이 아니었다. 며칠 전, 김용립에 대한 성고문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소집에 응하지 않은 이들 집이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강내지서 창고에 보도연맹원 70명이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화장실은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비치해 놓고, 그곳에서 대·소변을 해결하게 했다. 밖에는 나가지 못했다.
"얼릉 갔다 올게, 잘 놀고 있어."
우천성(1912년생)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막내 유순을 번쩍 안고 눈을 맞추었다.
"아빠 어디 가는데?"
"응, 잠깐 면소재지에 갔다 올 테니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이렇게 청원군 문의면 괴곡리 우천성은 동생 석준(1922년생)과 함께 면소재지로 가 금융조합 창고에 구금되었다. 어두컴컴한 창고에는 초조한 눈빛의 약 50명 보도연맹원이 있었다.
미원면과 강서면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지서에 구금했다. 부용면과 남이면은 지서와 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먼저 소집된 이들은 지서 유치장에, 나중에 소집된 이들은 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다.
부용면은 갑·을·병으로 나뉘어 세 차례 소집이 있었다. 7월 6일 1차 소집이 있었다. 밤중에 억수같이 비가 오는 날, 경찰이 집집이 다니며 10명을 소집했다. 7월 7일 2차 소집이 있었으며, 부강지서에 소집되어 유치장에서 2~3일 머물렀다. 3차로 소집된 150여 명은 부강초등학교에 구금되었다.

▲박헌동 부용면 수리너머 고개에서 학살된 박헌동(뒷줄 우측에서 두번쨰)
충북역사문화연대
손발 묶인 채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 수리너머 고개서 울린 총소리
구금된 지 나흘째인 7월 9일, 지서 창고의 이들이 소방서 창고로 이송되었다. 다음 날 미군기의 폭격이 있었다. 폭격을 피해 보도연맹원들이 창고를 나오는 중, 김기반이 탈출을 했다.
폭격이 있던 7월 10일, 보도연맹원들이 탑연리 야산 방공호 앞에 세워졌다. 군경이 60여 명을 죽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 지서장은 지서 창고에서부터 보도연맹원들을 2인씩 삐삐선(군용 전화선)으로 묶었다.
강내지서 경찰 한 명은 탑연리 방공호 앞까지 갔다. 대부분 학살은 CIC가 기획하고 헌병대가 현장에서 주도했으며, 군인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경찰은 보도연맹원 소집과 학살 현장 이송을 책임졌다.
그러나 강내지서는 예외였다. 소집을 피해 달아난 보도연맹원들의 형제를 잡아 구타와 성고문을 가하고, 집을 방화했다. 더군다나 삐삐선으로 묶은 이들을 학살 현장에까지 인계하는 데 지서장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부강지서에 1차로 소집된 10명은 분터골 혹은 피반령에서 처형되었다. 2차로 소집된 26명은 7월 10일 토요타 트럭에 실렸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보도연맹원들은 손과 발을 새끼로 꽁꽁 묶인 채 트럭 적재함에 실렸다.
트럭 네 귀퉁이에 서 있는 군인들이 보도연맹원 머리 위로 가마니를 씌웠다. 가마니를 뒤집어쓴 이들은 누구도 입을 뻥끗하지 못했다. 잠시 후 청주 가는 방향의 수리너머 고개에서 총소리가 났다.
3차로 소집된 150명은 부강초등학교에 구금되어 있었다. 계급장 없이 군복만 입은 군인들이 M1에 실탄을 장전하는데, 부강 지서장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가 책임질 테니 군인들은 신경 쓰지 마라"고 해 군인이 철수했다(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광원마을 청원군 문의면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광원마을(현재는 대청댐으로 수몰됨)
박만순
미원면 보도연맹원 약 30명은 미원과 낭성 경계인 낭성면 머구미고개에서 학살당했다. 남이면은 지서와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분터골에서 학살되었고, 옥산면은 지서에 구금되었다가 청주경찰서로 이송된 뒤 분터골에서 학살되었다.
대청호에 수몰된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 광원마을 뽕나무밭도 죽음의 땅이었다. 문의면 보도연맹원 50명이 가족들의 피울음을 뒤로 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학살이 있은 며칠 후, 김기반은 탑연리 현장에 갔다.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는 시신들의 배가 차올랐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팔을 잡아당기자 고무장갑이 빠지듯 팔이 쑥 빠졌다. 잡아당기는 이나 옆에 있던 이 모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나마 면내에서 학살된 이들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분터골에서 학살된 남이면과 옥산면 보도연맹원 시신은 그럴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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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유로 가마니 씌워 학살... 잔혹한 7월의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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